초중고 아직도 난자·정자 등 구태 교육… 학생들 "다 알아요"왜곡된 청소년 성문화 바로잡으려면… 정규교과 편입 고려를

#1. 고1 여학생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성교육을 처음 받았습니다. 남보다 조숙했던 탓인지 선생님 말씀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귀찮기만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받은 성교육도 다를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자가 헤엄쳐서 난자에 흡수되는 비디오를 보여주는 게 성교육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엔 초등학생도 맘만 먹으면 음란물을 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성 정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교 성교육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아기가 태어난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선생님께 여쭤보면 “너희들 다 알고 있잖아”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성교육, 본론은 가르쳐주지 않는 성교육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과 성범죄 등의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2. 중학교 3학년 남학생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정자는 올챙이 모양으로 생겼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아기가 생긴다’는 내용을 배웠습니다. TV에서 북유럽 국가가 만든 성교육 비디오를 본적이 있는데, 잘못된 성행위와 성병, 올바른 피임법 등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성교육관을 찾은 학생들이 임산부 체험 복장을 착용하고 임신 에 따른 체중변화를 느껴보고 있다. 박서강 기자
더욱 놀란 것은 그 비디오가 초등학생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솔직하지 못한 성교육은 성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숨기면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답을 찾게 돼 있습니다. 그냥 다 알려주세요. 이미 다 아는 사람은 속이 탑니다.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다. 보통 14세를 넘으면 육체적으로 성숙단계라는 게 의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물론 정신적으론 육체적 충동을 조절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다. 학교 성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학교 성교육은 ‘난자와 정자의 수정’만을 외치는 1970~80년대식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성의 상업화 도구로 전락한 인터넷과 휴대폰이다. 실제 초ㆍ중ㆍ고 학생의 절반 이상이 성인용 음란물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 게 현실이다. 학교 성교육의 부재는 저속한 성문화의 확산을 통해 잘못된 성행위와 미혼모 등 각종 성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날로 심각해지는 청소년 성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학교 성교육의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입시 위주·정책 부재 탓"

학교 성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과 성교육 정책 부재 탓이다. 현재 교육인적자원부의 ‘학교 성교육 운영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각급 학교에 학년별로 연간 10시간 이상 성교육을 실시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성교육 교사 연수 및 성교육 지침서 발행, 성폭력ㆍ성매매 예방교육, 지방자체단체 및 민간단체와의 성교육 연계 프로그램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밀리다 보니 실제 학교 현장에선 성교육이 형식적이고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학교 성교육은 체육, 기술가정, 도덕, 과학 등 정규 교과에 수록된 일부 성 관련 내용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학교는 이들 과목에서 다뤄지는 일부 성 관련 내용을 성교육으로 간주한다. 이러다 보니 교육부 권장수준을 지키는 학교는 15%도 안 된다. 교육 내용도 ‘난자와 정자의 생성과정’(과학), ‘사춘기의 신체 및 성적 발달’(체육), ‘이성교제와 사랑’(도덕), ‘인공 임신중절의 위험성’(기술가정) 등 구태의연한 성지식 주입 일변도다.

정부의 안일한 인식은 예산 책정에서도 드러난다. 학교 성교육 지도업무는 9월 1일부터 교육인적자원부 학교정책국의 학교폭력대책팀에서 맡고 있다. 여성교육정책과에서 하던 업무를 학생 부문만 떼어온 것이다. 이 때문에 올해 성교육 예산은 단 한푼도 배정되지 않았다. 내년 예산안에서도 성교육(학교폭력 자료개발비 포함) 관련 예산은 1억원 정도 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1만1,000여 개에 달하는 전국 초ㆍ중ㆍ고교의 성교육 예산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성교육을 담당하는 시간제 보건교사 이정옥 씨는 “학교 성교육은 집단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면 교육부에서 일제 하달하는 성폭행 방지 비디오를 보는 식으로 그때그때 땜질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그나마 아이들이 실제 알고 있는 성지식에도 크게 뒤떨어져 형식적인 수업에 그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중앙대 의료원장 김세철 교수(비뇨기과)는 “성병과 원치 않는 임신 등을 예방하려면 청소년기에 올바른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성교육이 필요하다”며 “14세 이후 청소년기에는 가정 교육 차원을 넘어 학교에서 전문가에게 성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담교사 배치 '열린 성교육' 절실

전문가들은 유명무실한 학교 성교육을 살리려면 성교육을 정규 교과에 포함시키든지, 아니면 최소한 창의재량시간만이라도 성교육을 전담 편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담교사에 의한 체계적인 성교육을 위해서는 과외시간 격인 창의재량시간만이라도 성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 일선 학교는 창의재량시간을 주로 국어, 영어, 수학 등 입시 비중이 큰 정규 교과목의 보강 목적으로 쓰고 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안천중학교의 경우 교장 재량으로 연 34시간의 창의재량시간을 보건교사에게 할당, 성교육 및 건강관리교육을 하고 있다. 이 학교 보건교사 조소영 씨는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성교육을 실시한 뒤부터 자기관리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면서 “지금처럼 성지식을 나열하는 식의 성교육이 아니라, 진솔한 토론을 통해 실생활 속의 건강한 성교육이 이뤄지게 하려면 전담교사를 배치해 정규수업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교육연구회’ 우목영 상임대표는 “요즘 아이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대부분 인터넷이나 케이블TV 등을 통해 성인 음란물을 접하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난자와 정자의 수정 이야기를 한다면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뤄질 리 없다”며 “성교육을 정규 교과과정에 넣어 전담교사를 통한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영웅 기자 new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