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515대 종손 권기철(權奇哲) 씨 - 후학 자상히 챙기는 '선비의 기질'… 낡은 종택 수리에 온 힘

“종손이 글 잘하기는 어렵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란 없는 법. 필자가 대학시절부터 글을 배웠던 농암 이현보 선생 16대 종손 이용구 옹은 안동 지역을 대표하던 한학자요 정채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요즘에도 선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거니, 생각된 어른이었다. 그 어른 외는 얼른 마땅한 대상자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실은 글 잘하는 종손이 또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학 방면 대표적 제자이면서 척(戚)으로 따지만 외종손자인 조선 중기의 학자요 문인인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의 15대 종손 권기철(權奇哲, 1941년 생) 씨가 주인공. 중앙대학교 문과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는 글이 뛰어나다 보니 정작 종손으로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권 교수는 올해 8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쓴, 우리나라 철학계의 큰 학자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종손보다는 교수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종손은 안동시 서후면 송야리 송암 종택인 관물당(觀物堂)에서 태어나 서후초등학교, 안동중학교, 안동고등학교(8회)를 거쳐 중앙대학교(1959년 입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송암의 차종손으로서 당시 동양철학을 전공한다는 건 당연한 귀결로 이해된다.

그러나 종손은 대학원 졸업 후 방향을 180도 틀어 서양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안동 군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선친(權五相, 1919-1999)이 학비를 지원했다. 선대 종손(택호 내성 댁)은 신학과 구학을 두루 겸했고 제반 처사가 반듯했으며, 문중이나 유림사회에 신망이 높았다. 모친인 광산 김씨는 부덕(婦德)이 있어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평이 있었다. 규방 문학에 조예가 깊어 안방에는 늘 사람들로 넘쳤다고 한다.

종손 권기철 씨
‘인다안동(人多安東)’이란 말이 있다. 안동에 인재가 많다는 말이다. 그들은 문(文)을 숭상해 교직을 선호했다. 안동 출신 교수들이 모여 ‘동연회(東硏會)’를 만들기도 했다. 퇴계의 영향으로 문학 및 철학과 교수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절반만 맞는 말이다. 동양철학과 교수는 거의 없으며 서양철학 전공자도 권 교수가 유일하다. 종손은 독일에서 7년여 공부 끝에 바이에른주 뷔르츠브르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귀국 후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지금까지 교편을 잡고 있다. 천직궁행(天職躬行)의 삶이다.

안동 출신 인사들은 기질상의 특징이 있다. 때로는 외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컬러도 있다. 종손 역시 만나보면 헤겔을 연구한 서양철학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포근함과 소탈함을 지녔다. 정년퇴임하면서 기념으로 낸 연구서 제목이 ‘헤겔과 독일 관념론’이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그는 영남의 선비 기질을 강하게 지닌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소리 소문 없이 퇴장하리라 늘 다짐해온 터에, 어느 날 후배와 제자들이 흩어져 있던 이런저런 편린들 중에서 특히 헤겔 철학과 관련된 글을 모아 하나의 주제 아래 책으로 발간한다고 통보해 왔다.” “나라의 대단한 석학들 밑에서 자라온 내가 어느덧 놀랄 만한 제자들의 활약상을 목도하고 있다. 그 사이 징검다리 노릇이나 제대로 해왔는지···.” 종손이 경기도 안양 평촌 우사(寓舍)에서 쓴 글이다.

송암문집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한 동기에 대해 물었다. “당시 대학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어요. 독일에 유학했던 교수, 경성제대 출신 등 한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최고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죠. 그분들 영향이 컸어요.” 스승만 한 제자가 없다지만, 학계의 풍토마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요즘, 일선에서 아직도 명예교수로 활동 중인 노학자는 줄곧 스승을 높이고 후배 학자들을 추켜세웠다. 이것이 바로 누구나 갖기 어려운 선비기질이 아닐까.

송암 종가의 앞날에 대해 물었다. 종손은 어린 외아들을 앞세운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이 귀한 종가에서 어렵게 얻은 금지옥엽 만득자(晩得子)였다. “차종손 문제는 이제 문중 어른들에게 그 결정을 일임했어요. 적절한 한 명이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담배를 한 대 더 피운다. 종가의 절손(絶孫)을 막기 위해 부심하는 종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충주가 고향인 경주 김씨와 결혼한 종손에게 딸(1981년생)이 있는데, 지금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다.

종택의 현안이 궁금했다. “종가(본채와 한서재)가 도(道)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수리비로 3억 7,000만원을 지원 받았는데, 아직 착공조차 못했습니다. 겨울에 수리를 시작하면 내년 추석에 가야 마칠 수 있다고 들어 걱정입니다. 연어헌 정자도 정비를 해야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어려움이 많아요.” 선친이 평생을 부심했던 송암 종택 유지와 보존에 대해 종손의 고심도 역력하다.

퇴계가 직접 작명한 '관물당'

송암의 평생 공부는 ‘관물(觀物)’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물이란 인간 내면의 수양이며 동양철학의 전형적인 수양 과정이자 숙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관물당이란 스승인 퇴계가 직접 지어준 것이다. 이후 자신의 당호로, 후대에는 송암 종가의 명예로운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관물당 종가’ 하면, 영남에서는 서애 종가인 충효당(忠孝堂), 학봉 종가인 풍뢰헌(風雷軒), 오천 군자리의 후조당(後凋堂) 종가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존경을 받아온 집이다.

청성서원 전경
그러나 근자에는 관물당 종가가 세상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그것은 후손이 번창하지 못했고 종손이 종택을 떠나 수도권에서 우거했으며, 또 기념사업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물당 종가는 고색창연한 관물당이라는 별당형 건물과 그리고 입구자형 와가로 이루어진 웅장한 규모다. 그리고 송암이 평생을 기거하며 관물에 힘을 모았던 한서재(寒棲齋) 건물이 종가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그의 학문 연구와 문학 창작의 산실인 연어헌이라는 정자 건물도 남아 있다. 연어헌이 있는 청성산 지역은 학봉 김성일과의 관계로 더욱 알려져 있다.

그곳은 본래 송암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공간이었다. 송암은 이웃 마을 친구며 퇴계 선생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6년 후배 학봉 김성일에게 그 터전의 절반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송암과 학봉의 교유는 그야말로 정신적인 사귐 즉 신교(神交)였다. 학봉은 할애 받은 그 절반의 터에 석문정사라는 강학 공간을 만들었다. 그 기문에 보면 “송암 권호문 선생이 지은 연어헌이 이 정사의 아래에 있다. 권 선생이 이미 이곳의 주인으로 있다가 선생께 이 산의 반쪽을 나누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 라고 쓰여 있다. 이 글은 밀암 이재가 썼는데,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해줄 확실한 증거다.

종가의 역대 종손 중에는 5대손인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 1672-1760)가 유명하다. 그는 안동의 의성 김씨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금옹 김학배의 사위요, 하당 권두인의 제자며, 대산 이상정의 선배 학자로 사림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 권호문 1532년(중종27)-1587년(선조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송암 권호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세 단어가 있다. 하나는 ‘처사(處士)’며, 다음은 관물(觀物), 그리고 마지막이 ‘허주(虛舟)’다.

영남 남인 후예들은 ‘처사’에 대한 집착과 자긍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백면서생이라 할지라도 제사로 모실 때는 지방에 ‘처사(處士)’를 쓰고 있다. 처사란 아주 품격 높은 경지에 오른 이를 일컫는다. 산림처사라고 하면 최고의 존경을 표한 것. 퇴계 문하의 기라성 인재 중 대표적인 처사를 손꼽으라면 후조당 김부필, 매암 이숙량, 송암 권호문을 들 수 있다.

'獨樂八曲'등 경기체가 남겨

후조당 김부필은 광산 김씨로 퇴계와 이웃한 안동 오천이라는 동리에 살았다. 그곳의 퇴계 문하 7인이 훌륭해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추앙 받았다. 그 중심에 후조당 김부필이 있다. 매암 이숙량은 퇴계가 존경했던 인물인 영천 이씨 농암 이현보의 아들이며 친구인 벽오 이문량의 아우로 70노구를 이끌고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했던 이다. 송암 권호문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유명 작가로 독락팔곡(獨樂八曲)과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등 연시조를 남겼다.

진작부터 국문학계에서는 송암의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에 주목하여 유명한 강호가도(江湖歌道)니 진락(眞樂)이니 의미를 부여하고 연구했다. 그렇게 보면 강호의 한정을 유감없이 노래한 송암이야말로 처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더구나 송암은 퇴계의 외종손자로 겸암 류운룡,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간재 이덕홍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문에 진력해 사우간(師友間)에 인정을 받은 실천 학자였다. 스승인 퇴계는 참 공부에 빠진 제자에게 시를 남겼다. ‘성산에 깃는 권장중에게 보낸 시’라는 제목이다. 장중(章仲)은 송암의 호이며 성산(城山)은 송암의 강학 공간인 청성산(靑城山)을 말한다.

“소년 시절 노닌 곳이라 성산이 기억나니/ 산천은 가물가물 경치도 빼어나지/ 그대 깃든 소식 듣고 먼저 반가워/ 책 끼고 얼른 가려다 다시금 서성이네.” 퇴계는 제자가 공부방을 꾸미면 축하 시나 현판을 손수 써서 내렸으며, 상당부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연어헌 역시 그중의 하나다. 시 전반에 넘치는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시공을 뛰어넘어 읽는 이에게 희열을 느끼게 한다. 시는 한마디로 ‘너무 반가워 얼른 달려가 서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노닐고 싶다’로 압축할 수 있다. 퇴계가 송암을 평하기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한 것이 압권이다.

다음은 ‘관물(觀物)’이다. ‘사물을 본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떻게 본다는 것이냐가 문제다. 유가에서는 관물을 통해 구현된 이(理)를 읽어낸다.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여기에서 한 단계 넘어서 이(理)로써 사물을 보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가르치고 있는데, 권호문은 관물당이란 당호를 스승으로부터 받았다.

많고 많은 저 사물들 어디서 왔나 芸芸庶物從何有

아득한 저 근원은 허망치 않네 漠漠源頭不是虛

전현의 흥감처를 알고 싶은가 欲識前賢興感處

뜰의 풀과 어항 고기를 자세히 보게 請看庭草與盆魚

퇴계의 관물시(觀物詩)다. 마지막 구절은 중국의 정명도가 뜰의 풀을 베지 않고 어항의 물고기를 기르며 그 생의를 관찰하며 존심양성의 공부를 했던 일을 원용한 내용이다. 송암은 스승의 이런 공부 모습을 올곧게 따르고 있다.

맑은 새벽 자리 쓸고 앉으니 티끌 사라져 淸晨掃座靜無塵

마음일랑 얼음 같아 절로 참 경지라네 心地如氷自有眞

이로써 호연하게 지극한 도를 통하면 若使浩然通至妙

마침내 성현의 경지까지 이르지 않을까?不知終是聖何人

즉사(卽事)라는 권호문의 시다.

마지막으로 송암을 상징하는 게 ‘빈 배’ 즉 ‘허주(虛舟)’다. 허주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익숙한 호일 것이다. 작고한 정치인 허주 김윤환이 이 호를 사용했다. 영남 인사들은 안동의 명문 고성 이씨 임청각 종손 허주 이종악(李宗岳)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임청각 주손인 허주는 조선 후기에 전형적인 선비로서의 삶을 살았다. 화조월석(花朝月夕)이면 벗을 모아 조각배를 타고 시주(詩酒)로 즐겼던 이다.

학봉 김성일이 ‘송암은 허주다’라고 단정했다. 학봉은 동문 대선배인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암이 어제 죽었는 바 몹시 상심하면서 애도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이 벗은 행실에 하자가 없어서 이 세상에 하나의 텅빈 배(虛舟)가 되었습니다. 이에 그를 볼 적마다 탐욕스럽고 거짓된 마음이 흩어져 없어졌는데, 지금 그가 떠났습니다” 라고 썼다. 학봉이 운문을 길게 쓴 제문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진정한 우도(友道)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명문이다.

허주란 도대체 무엇일까? 허주는 세상일에 담박한 마음으로 대해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 산목편(山木篇)에 보면,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적에 만약 빈 배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쳤을 때 아무리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배 위에 있다면 곧바로 소리쳐서 저리 가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관물당에서 지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보면 당시의 핍진한 교유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저녁에 오천(烏川, 외내) 후조당에 도착하니 주인(金富弼)이 문 밖으로 나와 맞아들였다. 그 동생 신중(愼仲, 富儀), 돈서(惇敍, 富倫) 및 류응현(柳應見, 雲龍)이 먼저 와 있어서 만났다. 서로 이끌며 방으로 들어가 술잔을 돌리며 마셨다. 밤이 깊어서 달빛을 맞으며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해 또 술잔을 들면서 지필을 펼쳐 각자 떠오르는 감상을 하나씩 시로 읊도록 했다. 후조형(後彫兄)이 운을 부르며 시를 재촉했다. 내가 먼저 몇 구절로 고풍 한 수를 지으니 모든 사람들이 더러는 화답하고 더러는 하지 못했다. 닭이 올 때서야 각자 돌아가 잠을 청했다.”

송암은 많은 수의 시와 가사체 독락팔곡을, 그리고 연시인 한거십팔곡을 남겼다. 독락팔곡은 현존하는 마지막 경기체가 작품으로 제목은 모두 8곡이지만 문집에는 7곡만 수록되어 있다. 작품 전반에 은일하는 선비의 격조 있는 품격이 담겨 있다. 퇴계 문하에는 수많은 학자와 문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송암을 최고의 문학 계승자로 손꼽는 이유는 그가 스승을 이어 매화시 100편을 따라 지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손수 이 시편들을 독특한 필치로 써서 편집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작고한 저명 학자의 것으로는 최고의 자료라고 판단된다.

생전에는 30세에 진사에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후진 양성과 학자로서의 업적을 평가받아 사후에 안동의 청성서원에 제향되었다.

학자로서의 면모는 그가 퇴계의 유문을 수습하고 문집을 교정해 간행하는 일에 중추적으로 관여한 것과, 여강서원과 병산서당(병산서원 전신)을 중심으로 펼친 강학활동, 화담 서경덕 문집 교정, 야은 길재 문집 교정 등의 중책을 맡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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