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10여 명 노숙인 극단 '징검다리' 18일 대학로서 공연"관객들이 마음의 문 열었으면… 다음엔 삶의 무대 당당히 설 것"

“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인생~”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12월 7일 오후 서울 숙대입구 지하철 역 부근 ‘노숙인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 지하 1층. 식당 옆에 붙은 5평 남짓한 작은 공간 안에서 우렁찬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원 10여 명이 모두 노숙인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노숙인 극단 ‘징검다리’의 연습 현장이다. 18일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에 여념이 없었다.

신고식을 치르는 신병들처럼 단원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노숙 생활의 좌절과 아픔을 딛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서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준비한 연극은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가족 – 사랑 – 희망이라는 3가지 에피소드를 묶어서 노숙인들의 삶과 사랑과 꿈을 투영해 내는 작품이다.

▦ 이젠 당당 주인공으로 서고 싶다

촬영을 하는 카메라 플래시가 쉴새 없이 번쩍해도 단원들은 눈 깜짝 하지 않는다. “오른쪽, 왼쪽, 이거 너무 안 맞는다. 연습 좀 해야겠어.” 단원 이홍렬 씨의 제안에 맞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할 춤을 모두가 따라 한다. “별빛 미소 출렁이면 마음의 창문을 열어라~.” 한 번 두 번 반복되며 그렇게 차츰 호흡은 맞아 들어간다.

단원들의 연기 지도를 맡고 있는 한국치료연구소의 연구원 조은영 씨는 “처음엔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서로 눈조차 안 마주치던 단원들이 이렇게 카메라가 돌아가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춤을 춘다”고 그간의 변화에 대해 놀라워 했다.

극단 ‘징검다리’는 지난해 12월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마련한 연극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숙인들이 의기 투합하여 아예 정식 극단으로 일어섰다. 올 4월께부터 본격적인 연습을 진행해왔다.

사실 이들에겐 연극 연습 과정 하나하나가 도전이다. 서로 일정이 불규칙해 연습을 위해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고, 실컷 호흡을 맞춰도 예고 없이 단원들이 사라져 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손발을 맞춰가야 했다.

연습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현재 연습 공간으로 사용 중인 식당 옆의 자그마한 공간도 센터의 다른 프로그램 진행이 없을 때만 이용이 가능하다. 또 그 공간이 비워 있더라도 에피소드별로 팀별 연습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한 팀은 식당 한 켠에서 오가는 식당 이용자들의 눈치를 봐가며 연습해야 했다.

이렇게 불안정한 환경에서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다 보니 처음에 서먹하기만 했던 단원들은 마치 형제ㆍ자매처럼 살가워졌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없다 생각해”

첫 번째 에피소드 ‘사랑’의 남자 주인공 정인수 씨가 솔로로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떨려서 음정을 잡는데 애를 먹자 동료들이 기운을 북돋운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안 올지 몰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결/ 그런 때가 왔다는 건 삶이 가끔 주는 선물…” 작고 낮은 음성에 점점 힘이 붙는다.

▦ 사랑을 기다린다

김혜복(47) 씨는 극단의 유일한 홍일점. 남자들에게도 힘든 노숙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마는 “몰랐던 세계를 새로 배운 것 같다”며 웃는다. 서울 가리봉동에서 자취생활을 하다 실직으로 방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나온 지 딱 1년이 됐다.

“노숙인 하면 머리가 이상하고 옷도 지저분하고, 밥은 밖에서 다 줄 서서 먹고 그런 줄 알았어요. 속으로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걱정했는데 선입견일 뿐이었죠.”

서울시가 추산하는 노숙인은 현재 3,000여 명. 이 중 가장 열악환 환경에 노출돼 있는 거리 노숙인은 600~700명에 불과하다. 쉼터나 상담보호센터를 이용하거나 쪽방이나 고시원, 사우나 등의 불안정 주거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김 씨는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쉼터에 왔는데, 오히려 노숙 생활에서 얻은 것도 많다”며 “이 나이 되도록 연극 한 번 보지 못하고, 대학로 마로니에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노숙인이 되고 나서 공연도 보고 무대에도 서게 됐다”고 말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미스 김’ 역할을 맡았다. 공장에서 만난 작업 반장과 반대하는 결혼을 해 가족들에게 외면당하지만, 인내하고 인내하여 마침내 진심으로 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내용.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살면 빛이 있을 거야.” 극중 대사는 바로 그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극처럼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이 되고 말았지만.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에 반대하는 결혼으로 아픔을 겪었어요. 이후로 혼자 지내다가 여기까지 왔죠. 하지만 이젠 정말 당당하게 일어설 거예요. 돈을 많이 벌어 잘 되는 게 아니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부모님께도 자랑스런 딸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 꿈을 찾아간다

공연의 대미는 배우들이 그동안 마음속 깊이 간직해왔던 꿈을 펼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영화감독, 배우, 기자, 사업가, 대학 교수 등 그 꿈은 제각기 다양하다.

단원 이홍렬(53) 씨는 관광통역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공대를 나와 항공업계에 20년간 종사했던 그는 97년 사업을 벌이기 위해 미국에 갔다 실패하며 삶의 쓴맛을 보게 됐다. 그렇게 사업 실패로 그간 중산층의 삶을 누리던 가족들에게 커다란 현실적 고통을 안기게 되자 홀연히 집을 나온 것이 2000년께. 공원 청소 일을 하며, 관광통역 시험 공부를 병행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에도 연극 연습에 열심이다.

“그저 순탄하게만 살았으면 어떻게 이 나이에 연극 무대에 서겠어요. 경제적인 게 문제지,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도 해보고 좋아요.” 연극으로 인생의 활력을 되찾았다는 그는 외국인 관광 안내 자원봉사도 겸하는 등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우주공학을 공부해보고 싶었다는 안영환(42) 씨는 “늦었지만, 수능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몸이 약하고, 성격이 내성적이었지만, 연극을 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했다.

이번 공연에 자원 봉사로 연출을 맡은 극단 ‘신명나게’ 류영길(35) 씨는 “노숙인들과 함께 극을 만들어가면서 단순히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꿈을 되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며 “비록 연기는 서툴러도, 이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연기의 살아 있는 힘이 강점”이라고 공연에 대해 자랑했다. 작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 하나하나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들 단원들은 이번 공연의 수익금(후원금)을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료 노숙인들을 위한 기금으로 전달할 예정이다. ‘서울역 노숙인 진료센터 건립’을 위한 기금이다.

프로 연기자 같은 노련한 연기가 돋보이는 단원 이재영(40) 씨가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관객들이 마음을 열고 1%라도 좋게 받아들여주고 환영해 주면 좋겠어요.” 이들이 준비한 따뜻한 무대는 18일 오후 7시 30분 대학로 아리랑 소극장에서 펼쳐진다.

서울역 노숙인 진료센터 건립을 위한 후원 계좌는 우리은행 1005 – 401 – 089892 (재)대한성공회유지재단, 문의는 (02) 777-5217.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