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하는 야한 언행에 여직원이 '성적 모멸감' 느껴 문제 제기하면 '성희롱'

중소기업 A사에 다니는 40대 후반의 S상무는 술자리를 자주 갖는 애주가다. 그는 평소 농담을 즐기는 편인데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에서는 그 ‘농도’가 제법 짙어진다.

2차 정도에 이르면 얼큰하게 취해 젊은 부하 여직원들에게 “나 오늘 밤 시간 많아” 등과 같은 다소 듣기 민망한 말로 ‘주책’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사람 좋은 상사로 평이 나 있어 참석자들은 대부분 웃어 넘기곤 한다.

S상무의 술자리 습관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하면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 별생각 없이 여직원들에게 툭툭 던지는 몇 마디가 그동안 사회생활에서 어렵사리 쌓아올린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직장 내 성희롱꾼’이라는 달갑지 않은 주홍글씨다.

그와 함께 일하는 20대 후반의 여직원 B씨는 “S상무가 성격이 좋은 분이어서 다소 야한 농담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가끔 언짢을 때도 있다”며 “특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 여직원은 상무의 언행을 몹시 불쾌해 한다”고 말했다.

만약 A사의 여직원 중 누군가가 S상무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며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S상무는 꼼짝없이 걸릴 확률이 높다. 나쁜 뜻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 여직원이 불쾌하게 받아들였다면 성희롱의 낙인을 피할 수 없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인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그 밖의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쉽게 풀면 직장 내의 수직적 역학관계에서 주로 상급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하급자로 하여금 심한 모욕과 불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성적인 말과 행동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를 성희롱으로 보느냐 하는 판단 기준이다. 이는 성희롱 판정에서 무척 애매한 대목이기도 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사안을 놓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S상무의 경우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성희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편적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즉 가해자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피해자가 성적 모멸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성희롱 예방과 대처요령’이라는 최근 간행물에 따르면 성희롱 여부를 결정할 때는 성적 언동에 대한 반응이 개인 혹은 남녀 간에 다른 경우가 많은 점을 감안, ‘합리적인 사람’이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문제의 언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점을 고려한다고 돼 있다.

이와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성차별팀 이수연 팀장도 “매우 다양하고 종합적인 기준에 의거해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피해자의 관점’, ‘합리적 여성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는 남성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가령 직장 동료로서 친근감을 표현했다거나, 딸이나 동생처럼 여겨 편하게 대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자신의 성적 언행을 변명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C차장은 대다수 남녀 동료와 허물없이 지내는 호인(好人)이다. 평소 매너도 좋아 괜찮은 평판을 가진 그는 다만 주변 사람들의 외모에 대해 농담을 곧잘 던지는 습관이 있다. 물론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 악의 없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간혹 여성 동료들은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C차장은 이에 대해 “나는 나쁜 뜻 없이 재미삼아 한 말인데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 정도 농담도 못하면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한다.

그런데 직장 내 성희롱에는 의외로 C차장과 같은 사례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골적이거나 의도적인 성적 언행이 아님에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의 상처가 깊이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성희롱의 범위를 좀 더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인 까닭에 직장인들은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직장 상사들이 퇴폐적인 쇼를 하는 술집에서 회식을 가져 성적 모멸감을 받았다며 20대 여성 D씨가 낸 진정사건에서 성희롱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직접적인 성적 언동 이외에도 ‘부적절한 장소’에서의 회식으로 인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기존 성희롱의 개념을 보다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결정이라는 평가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회식이나 야유회 등 업무 연장선상의 직장 내 활동이 음란, 퇴폐적인 남성중심 직장 문화를 조장하거나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장소에서 이뤄지는 것은 여성 근로자의 근무 여건에 악영향을 주는 ‘환경형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1월에도 인권위의 진보적인 유권해석이 이어졌다. 남성 직원들끼리 동료 여직원을 놓고 “음료에 약을 타서 어떻게 해보지 그랬느냐”며 쑥덕거린 성적 발언을 해당 여직원이 전해 들은 것에 대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인권위가 이 사건에서 주목한 것은 성희롱의 ‘간접성’이다. 전형적인 성희롱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성적 언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성희롱 발언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업무관계가 이뤄지는 직장에서는 직접 들은 것과 마찬가지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본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은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이후 성희롱 예방교육이 강화되고 직장인들의 의식이 개선되면서 많이 줄어든 것으로 추측되지만 근절은 아직 요원하다.

이와 관련, 노동부 여성고용팀 김광석 사무관은 “체계적인 성희롱 예방교육이 이뤄지는 대기업은 그나마 형편이 낫지만 영세사업장, 특히 종업원 수십 명 이하의 직장에서는 여전히 성희롱이 빈발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여성단체 일각에서는 성희롱이 줄어들기는커녕 여전히 만연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한국여성민우회가 내놓은 ‘2006년 여성노동상담경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상담 건수는 전체 상담의 36%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커졌고 절대적인 상담량에서도 증가 추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선 점점 더 개방적이고 대담해져 가는 우리 사회의 성 풍조가 직장인들의 성희롱 인식 제고 효과를 상쇄시키기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즉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은연중에 직장 생활에서도 배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사(公私)가 분명한 직장에서 개인의 성적 태도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와 관련, 인권위 성차별팀 최형묵 사무관은 “요즘 이성 동료 간에도 성적 담론이 개방적으로 이뤄지는 직장을 종종 볼 수 있다”며 “그렇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수위를 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직장에서는 성적 발언을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 성희롱의 대표적 유형

▲육체적 행위

(1) 입맞춤이나 포옹, 뒤에서 껴안는 등의 신체적 접촉행위
(2) 가슴,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만지는 행위
(3) 안마나 애무를 강요하는 행위

▲언어적 행위

(1) 음란한 농담을 하거나 음탕하고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행위(전화통화 포함)
(2)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나 평가
(3) 성적인 사실관계를 묻거나 성적인 내용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포하는 행위
(4) 성적인 관계를 강요하거나 회유하는 행위
(5) 회식자리 등에서 무리하게 옆에 앉혀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

▲시각적 행위

(1) 음란한 사진, 그림, 낙서, 출판물 등을 게시하거나 보여주는 행위(컴퓨터나 팩시밀리 등을 이용하는 경우도 포함)
(2) 성과 관련된 자신의 특정 신체부위를 고의적으로 노출하거나 만지는 행위

▲그밖에 사회 통념상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언어나 행동

(자료=여성가족부)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