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 기념 '헌정등반대' 이끌고 히말라야행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코리안 루트' 기념비적 등반에 도전

그가 다시 길을 나섰다. 세계 최고봉에 국내 최초로 태극기를 꽂았던 ‘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영광을 되살리고 기리는 기념비적 헌정 등반을 선두에서 이끌 원정대장으로서다.

박영석(44). 이름 석 자만으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8,000m 이상 14좌 최단기간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남극점 및 북극점 정복을 잇달아 해내며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래서 국가대표급 산악인이자 탐험가로 통한다. 세계 산악계도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주시한다.

박영석은 이번에 에베레스트산에서도 가장 험준하다는 남서벽 코스를 정상 공격 루트로 삼았다. 히말라야 8,000m 이상 봉우리에는 아직 한국인이 개척한 등반길이 없다. 때문에 이번 원정에 성공한다면 세계의 지붕에 ‘코리안 루트’를 최초로 아로새기는 위업을 쌓는 셈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후원함으로써 ‘등산강국 코리아’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던 한국일보가 이번의 뜻 깊은 도전에 또다시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대한산악연맹과 SBS도 함께 후원한다.

3월 31일 네팔 카트만두로 떠난 박영석 원정대는 4월 10일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뒤 늦어도 5월 말까지는 신루트를 개척해 정상에 오른다는 목표다. 장도에 오르기 전 3월 27일 박영석의 세계탐험협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남서벽 등정은 15년 동안 벼르고 별렀던 일입니다. 14좌 완등, 그랜드슬램 달성 등의 목표 때문에 미뤄왔던 가슴 속의 한을 이제야 풀게 된 거죠. 에베레스트 초등(初登) 30주년 기념 등반을 겸하게 돼 더욱 가슴이 부풀어 있습니다.”

두세 평 남짓한 사무실은 이번 원정에 가져갈 장비로 빼곡했다. 박영석 대장은 스케줄 확인, 진행상황 점검 등 막판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코리안 루트’ 개척에 대한 기대감 탓인지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고 고상돈 대원 모습에 매료, 산악인의 길로

성공한 산악인인 박영석이 걸어온 길에는 실패의 쓰라림도 없지 않다. 오히려 그 좌절감이 더욱 그를 강하게 담금질했을지도 모른다.

1991년 첫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을 때 그는 용감하게 남서벽 루트를 택했다. 하지만 6,500m 지점에서 그만 실족해 150m나 굴러 떨어졌다. 안면부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천만다행으로 근처 미국인 등반대 의료진의 응급수술을 받아 큰 화를 면했다.

그때를 회상하던 그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죠. 다행히 뇌를 다치지 않아 살 수 있었어요. 지금 얼굴은 멀쩡해 보이지만 당시 조각난 뼈를 짜맞춘 겁니다”라며 태연하게 미소를 짓는다. 진짜 ‘산사나이’란 이런 걸까.

박영석은 93년 마침내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 성공한다. 그것도 아시아 최초의 무(無)산소 등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다만 개인적으로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당초 남서벽으로 정상 공격을 시도했지만 8,500m 지점에서 거센 눈폭풍을 맞아 발걸음을 되돌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 원정은 2전3기의 도전인 셈이다.

그가 탐험 인생을 걷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크다. 우리 강산 곳곳을 즐겨 누볐던 부친을 따라다니며 어릴 적부터 대자연의 숨결에 매료됐다. 그러다 중학생 시절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던 고(故) 고상돈 대원의 모습을 보며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고상돈 선배는 그 시절 국민적 영웅이었죠. 어린 학생들이 쓰는 책받침, 노트, 필통 등 학용품에는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선 고 선배의 사진이 도배되다시피 했으니까요. 제 인생은 바로 그때 정해졌습니다.”

어린 박영석 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고상돈 대원이 79년 미국 알래스카주 매킨리산 원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지 꼭 10년이 되던 89년. 그는 랑시샤리(6,427m)봉 등정에 나서며 히말라야 도전의 첫걸음을 뗐다.

그때 스물여섯 살의 대학생이었던 그는 세계 최연소 원정대장이라는 타이틀도 덤으로 얻었다. 이후 그는 불과 두어 차례를 빼놓고는 항상 대장으로 원정대를 직접 꾸려왔다. ‘영원한 대장’이라는 호칭이 과분하지 않은 것도 이런 경력 덕분일 게다.

하지만 대원들의 생명과 안위를 보살펴야 하는 대장은 무한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원정에 성공했더라도 그 과정에 대원이 희생됐을 때는 왜 이 길을 택했을까 하는 회한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전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길이자 동료의 넋을 진정 위로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도 돌이키기조차 싫은 고난의 기억이 있다. 북극점 원정 때였다. “지구상에 지옥이 있다면 아마 그곳일 겁니다. 영하 40~50도의 혹한에 모든 사물이 얼어붙어버리죠. 참았던 ‘볼일’을 보느라 몇 초 동안 옷을 내렸다 입었는데도 동상에 걸려 거즈를 차고 행군해야만 했죠. 정말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에베레스트 다녀와서 베링해협 횡단에 재도전

박영석은 첫 번째 북극점 정복에 실패한 탓에 결국 그 끔찍한 지옥에 두 번 가야만 했다. 그리고 2005년 5월 마침내 지옥을 정복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뤄냈다. ‘고진감래’라는 말 그대로였다. 그는 그랜드슬램 달성으로 산악인이자 탐험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움켜쥐었다. 게다가 더 이상 높이 오를 곳도, 더 이상 멀리 갈 곳도 없어졌다. 하지만 산사나이는 결코 멈춰서지 않았다.

“남들은 다 이뤄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할 게 무지 많아요. 사실 대표적인 곳만 도전해 성공했을 뿐이잖아요.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도전해보지 않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천생 탐험가의 답변이다. 그는 40대 중반에 들어서 체력이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앞으로 10년은 끄떡없다고 자부한다. 하긴 97년 단 6개월 만에 히말라야 6좌를 정복하기도 했던 그의 배짱과 호기로움이 어디 쉽사리 꺾일 성질의 것인가.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죠. 마찬가지로 산악인이 도시에 머물면 산악인이 아닙니다. 내 삶은 곧 도전이기 때문에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끝없이 도전하며 살 겁니다.”

박영석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뚫고 돌아오면 곧장 또 다른 원정 준비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 3월 닷새 동안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던 베링해협 횡단에 재도전하는 것이 그 일이다.

실패는 해도 좌절은 하지 않는 박영석의 도전, 그 끝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5월 중순 남서벽 루트로 정상 도전

박영석 원정대는 4월 3일 네팔 카트만두를 떠나면서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다. 루크라(2,827m), 남체(3,446m), 탕보체(3,860m) 등을 잇달아 거쳐 10일쯤 5,7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이어 한 달 동안 전진 캠프 5개소를 차례대로 설치한 뒤 5월 중순께 정상 공격을 시도한다. 남서벽은 정상 인근에서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암벽이 2,000m 이상 이어져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곳이다.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눈도 쌓이지 않는 지대다. 남서벽에는 1975년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원정대가 뚫은 두 개의 루트만 존재한다.


코리안루트 신기원 열 '박영석 사단'

개척의 신기원에 도전하는 박영석 원정대는 일명 '박영석 사단'으로 불리는 젊고 유능한 정예 산악인들로 구성돼 있다.

오희준(37) 부대장은 히말라야 14좌 중 10개를 정복했고 박 대장과 함께 북극점 및 남극점 원정, 베링해협 횡단 등에 나섰던 베테랑이다.

8,000m급 암벽등반 경험을 가진 이현조(35) 대원과 아시안 X-게임 3연패 등 기록을 가진 특급 클라이머(암벽등반가) 이재용(36) 대원의 경험은 남서벽의 수직 절벽을 오르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형모(29) 대원은 지난해 에베레스트에 올랐고, 정찬일(27) 대원은 로체샤르 등반 경험이 있다. 유일한 여성인 김영미(27) 대원은 7대륙 최고봉 가운데 5개를 등정한 녹록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이들 정예 원정대의 정상 공격에는 영화감독 김석우(36) 씨, 프리랜서 사진기자 이한구(39) 씨 등이 생생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동행한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