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혼란·소외 등이 낳은 분노… 한국 교민 사회, 미 주류의 보복공격 우려도

버지니아공대생들이 17일 미식축구 구장에서 모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대학 교내에서 32명의 무고한 생명이 한 ‘미치광이’의 총탄에 허무하게 꺼져갔다는 놀라움과 분노도 잠시, 그가 바로 한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전 국민은 망연자실했다. 총기사고가 끊이지 않는 미국이지만, 32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총기문화에 익숙한 미국 사회조차 경악 속에 몰아 넣은 범인이 한국인이란 사실은 이 사건이 정신상태가 극도로 분열된 한 개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한국 교민, 유학생, 또 이들과 같은 민족감정을 공유하는 한국의 국민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미국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에 있는 버지니아공대에서 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사건이 시작된 것은 16일 오전 7시15분(현지시간)였다. 이 학교 영문학과 4학년인 조승희(23) 씨는 교내 남녀 공용 기숙사인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홀에 들어가 학생 2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다시 2시간여 뒤 교내 반대편 공학부건물인 노리스홀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과 교수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30명을 숨지게 했다. 자신도 범행 뒤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희생자의 숫자도 그렇지만 2시간여 이상의 시차를 두고 범행이 재차 자행됐다는 점, 냉혹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태연한 자세로 학생들을 마치 사냥하듯 사살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세상과 싸운 미치광이

조 씨는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한 순간의 충동이었을까, 오랜 시간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극이었을까. 기숙사에서 처음 살해된 학생이 여학생이었다는 점에서 여자문제가 직접적인 동기가 돼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사건 초기의 정황이었다. 그러나 이 여학생이 조 씨의 여자친구가 아니고 또 조 씨가 살해할 만한 특별한 관계에 있던 대상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조 씨의 범행동기는 다시 의문에 빠졌다. 8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이민 1.5세대가 흔히 겪는 소외와 갈등, 정체성의 혼란 등이 낳은 무차별적 분노의 폭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살육이었다.

이런 혼란은 이틀 뒤인 18일 조 씨가 NBC 방송국에 보낸 범행에 관한 동영상과 사진, 글 등이 공개되면서 상당 부분 해소됐다. 기숙사에서의 1차 범행과 노리스홀에서의 2차 범행 사이에 보낸 것으로 우편물의 소인 시간이 찍힌 것으로 미뤄 조 씨는 1차 범행 뒤 자신의 범행동기를 주장한 우편물을 제작, 발송하느라 이 같은 2시간여의 시차가 생겼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00여 자의 글과 자신이 직접 찍은 듯한 동영상, 사진이 담긴 우편물은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으로 가득했다. 특정 인물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부유층과 쾌락주의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 자신이 대의명분을 위해 순교를 택했다는 인상을 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 너희는 오늘을 피할 수천억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너희는 내 피를 흘리는 것을 선택했다. 너희가 나의 모든 것을 훔쳐가 내 인생을 파괴했다…”

미국 언론들이 ‘multimedia manifesto(다중매체 성명서)’라고 부른 이 글을 조 씨는 또박또박 읽어내려 가면서 사악하고 물질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강요했다고 해 오히려 세상을 원망했다. “그냥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 난 도망가지 않았다. 희생당한 나와 내 아이들과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해 거사를 치를 것이다. 너희는 내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

범행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명서’의 형식을 빌었다는 점에서 조 씨가 우편물 연쇄 폭탄테러범 ‘유나바머’를 흉내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첨단문명이 인류를 망친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미국의 천재수학자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별칭인 유나바머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1978년부터 17년간 미국 유수 과학자들에게 폭탄소포를 보내 이들을 살해했고 자신의 명분을 적은 글을 신문사로 보내 공개토록 했다. 조 씨가 유나바머와 자신을 동일시한 모방범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살육극을 벌이면서 떳떳함을 강변하는 글을 방송국에 보낸 조 씨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가 치를 떨며 말하는 ‘너희(You)’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범죄심리학자들은 조 씨가 자신을 사회악을 징벌하는 영웅으로 착각하는 ‘피해망상증 환자’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것으로 볼 때 이번 범죄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았다. 실제 우편물에 포함된 동영상 중 일부는 범행 6일 전인 10일 오전 자신의 기숙사에서, 글도 일부는 사흘 전인 13일 오후 최종 제작, 수정된 것으로 밝혀져 사건이 사전에 계획된 학살극임이 드러났다.

범행대상 등 여전히 미스터리

조 씨는 기숙사에서 1차 범행 뒤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질렀다’는 구절이 담긴 메모를 남겼다. 여학생을 지목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너희’라는 말은 이 여학생과의 별 무관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특정인이 아닌 자신이 불만을 품은 사회 전반을 가르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대두됐다. 그가 방송국에 보낸 글에 적은 것처럼 “벤츠와 금목걸이를 갖고 있고, 보드카와 코냑을 마시는,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구제불능’ 속물을 지칭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우편물을 통해 조 씨의 범행 동기와 당일 행적의 미스터리는 상당 부분 풀렸다. 그러나 범행 장소와 대상 등은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조 씨는 왜 아침 일찍 다른 기숙사로 찾아가 여학생을 첫 살해 대상으로 삼았을까. 1차 범행을 끝낸 뒤에 우편물을 보내 자신의 대의명분을 과시했는데도 다시 노리스홀로 가 더 끔찍한 2차 범행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다른 학살범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행동이다.

이번 사건의 자세한 경위는 당국의 수사로 곧 밝혀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갈갈이 찢어진 공동체 의식을 하루 빨리 되찾는 일이다. 특히 이번 참사로 미국의 한인사회는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보복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교정에 들어서기를 꺼려하고 일부는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민족 간, 인종 간, 계층 간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이번 비극이 주는 교훈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절실하다.


황유석 국제부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