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 씻어준 아내와의 운명적 만남, 태어날 아기위해 한걸음 한걸음 혼신의 힘으로 올라

임재범 기자
“아버지~, 어머니~, 상금아(아내)~, 산이(아가의 태명)야…. 엉엉….”

지난 4월 26일 오후 1시께 네팔 히말라야 중앙부의 설산(雪山) 칸진리봉(해발 4,700m) 정상. 서른네 살 어른이 토해내는 울음이 눈 덮인 산을 울리며 메아리쳐 돌았다.

이날 37명의 일행 중 ‘꼴찌’로 정상을 밟은 정상민(34) 씨의 호곡이었다.

그는 오른쪽 무릎 아래 다리가 없다. 장애로 평지에서도 한 시간 이상 걷기가 힘들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 등정이라니. 버거운 도전이었다.

하루 9~10시간의 산행 5일째. 더 이상 단 한 발자국을 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불과 50m. 하지만 그에겐 천리 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지팡이를 던졌다.

그리곤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다. 마침내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성 속에 정상에 올랐을 때 그는 대한민국 방향을 향해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첫날 돌아갔을 거예요.” 9월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부정(父情)이 낳은 기적이었다.

이번 등정에 함께 한 ‘절단장애인’은 모두 7명. 이들은 장애 특성상 한계에 부딪히면 등정을 돕는 현지인 셰르파가 업고 가기도 했지만, 상민 씨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80kg이 넘는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안 보이고, 뒤에도 없고. 눈 내리는 길을 혼자서 울며 걸으며 생각했어요. 여길 못 넘어가면 아빠 될 자격이 없다. 서울에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쓰러지랴.” 의족이 닿는 무릎 부위는 짓이겨지고, 피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끝까지 내 힘으로 걸어서 오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지켜냈다.

“우리 산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게 될 아빠에게 다리가 없잖아요. 그것이 히말라야 등정의 가장 큰 이유였어요. 뱃속의 아기에게 듬직한 아빠가 되고 싶었거든요.”

네 살때 교통사고로 다리 잃어

상민 씨는 네 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악몽 같은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안 어르신의 상을 치르던 때였어요. 마지막 날이었죠. 어머니가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 과자 사 먹으러 구멍가게로 달려가다 그만 사고를 당했어요. 트럭이 제 다리 위로 지나간 거죠.”

우연의 일치였을까. 갓 태어난 애기 때부터 동네에 용하다는 점쟁이로부터 “이 애는 죽거나, 아니면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말을 듣고 자란 터였다. 시골의 순박한 아낙네였던 어머니는 그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 점쟁이의 얘기에 따라 아들 돌잔치조차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은 찾아왔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눈물은 하루도 마를 날이 없었다. 모두가 당신의 잘못이라며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들이 장성해 가정을 꾸린 지금도 어머니는 아들의 허전한 바지 한 쪽을 볼 때마다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어머니에게 상민 씨는 어린 시절 대들기도 했다. 다리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커서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엄마, 난 왜 두 다리가 모두 있는 사진이 없는 거야? 형은 돌사진이 있는데, 난 차남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아들은 이내 뉘우쳤다.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은 지금껏 하지 못했다. 상처를 다시 들출까봐. 하지만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나중에 건강한 가정을 꾸려 손주를 안겨드리는 일일 것이다.”

장애를 갖게 되면서 상민 씨는 남들보다 일찍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다. ‘이 다음에 고아원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해야지.’ 장애인에게 선뜻 딸을 내줄 집안이 없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짝은 뜻밖에도 매우 가까이 있었다. 직장인 ‘서울의지’의 후배 직원인 진상금(30) 씨가 ‘그녀’였다. 상민 씨는 초등학생 4학년 때부터 의족을 맞추려 이곳을 드나들다 고교 졸업 후 아예 이곳의 직원이 됐고, 상금 씨는 그로부터 4년 뒤 정식 입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별반 관심이 없던 5~6년 전부터 회사 사장은 상민 씨와 상금 씨만 보면 “너희 둘이 반드시 결혼해야 된다”를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였다.

“처음엔 터무니없는 얘기 같아 그 소리가 무척 싫었는데 어느 날 문득 잠자리에서 상금 씨 얼굴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루게 됐다”고 상민 씨는 사랑의 추억을 더듬는다.

아내 상금 씨도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해봤는데 자꾸 한 사람만 만나라는 사장님 말씀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상민 씨가 내심 싫진 않았다”고 수줍게 웃었다.

연애 수락은 상민 씨의 삼고초려 끝에 이뤄졌지만, 약 1년 6개월의 교제 뒤의 결혼은 아내 상금 씨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진행했다. “내 마음이 확실하니까 나만 믿어요.” 자꾸 움츠러드는 상민 씨의 용기를 상금 씨가 북돋웠다. 처음엔 “장애인 사위 싫다”며 극구 반대하던 상금 씨의 어머니도 그런 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태어날 아기에게 자랑스런 아빠될 것

지난해 양가의 축복 속에 웨딩마치를 울렸다. "본가는 아들만 둘이어서 썰렁하기 짝이 없었는데, 처가댁은 한번 모였다 하면 왁자지껄해서 너무 좋아요. 장모님도 지금은 저를 친아들처럼 이뻐해주시구요.

저도 결혼을 하고 이런 행복을 누리는구나 생각하면 새삼 뿌듯해져요."(상민 씨)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게 정말 큰 기쁨이죠."(상금 씨)

그야말로 천생연분인지, 그 흔한 부부싸움조차 아직은 해본 적이 없다는 이들. 지난 3월 임신으로 상금 씨가 퇴사하기 전까지 "직장생활이 힘든 것을 잘 알면서도 남편이 토닥거려주지 않을 때 서운했다"는 것이 아내 상금 씨의 투정 전부다.

이렇듯 한시도 떨어져 살 수 없을 것 같은 '잉꼬 부부'인데, 상민 씨는 히말라야 등정의 여독이 아직 채 풀리지도 않은 6월 초에 이라크로 떠날 준비 중이다.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현지 장애 아이들에게 '의수족' 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아내 상금 씨는 그런 남편의 발길을 붙들고 싶다. "자이툰 부대 첫 사망자 발생으로 가뜩이나 뒤숭숭한데 걱정되죠. 안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아내에게 상민 씨는 얘기한다.

"다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의족은 단순한 보조기구가 아니라 희망이잖아." 의족을 차고 히말라야를 오르고, 이라크에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팔다리를 잃은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런 아빠를 (앞으로 태어날) 우리 산이도 자랑스러워하겠죠!”

이렇게 용감한 아빠도 엄마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아기의 태동을 느끼면서는 경외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설레면서도 두려워요.

어린 시절 제가 어머니에게 그랬듯 우리 아이가 제게 '아빠는 왜 두 다리가 없어?' 그럴까봐 걱정돼요." 그런 아빠가 엄마 배 위에 손을 얹고 속삭인다. “사랑한다 아가야, 아빠 한번 믿어봐라. 좋은 아빠가 될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다. 그 중심엔 가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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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