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디자인, 기계적이고 정형화된 활자체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와

두산 소주 ‘처음처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그리고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패션’.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제목이나 상품명에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쓴 글씨를 활용해 성공했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인쇄체 글자인‘폰트(font)’로 규격화되는 디지털 시대에 이를 거스르는 아날로그적 손글씨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최근 각광받고 있다.

▲글자에 감성을 입힌다.

글자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이라는 별다를 것 없는 글자 하나가 붓의 굵기를 어떻게 하느냐, 획 모양은 어떻게 꺾느냐에 따라 소박한 풀꽃이 되기도 하고, 꽃잎을 활짝 펼친 봄꽃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그 표정만 해도 천변만화다. 글자에 감정과 표정을 불어넣는 게 캘리그래피다.

‘글자를 아름답게 꾸미는 기술’을 뜻하는 캘리그래피는 그러나 단순히 ‘글자를 잘 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 한 글자를 쓰더라도 그 글자가 갖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나아가 그 글자가 쓰여지는 상황과 꼭 맞는 글꼴을 찾아내는 것이 캘리그래피의 핵심이다.

‘폰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을 글꼴에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인 셈이다.

“예전에‘문근영 글씨체’, ‘동방신기 글씨체’ 등 사람이 직접 쓴 글씨가 폰트로 개발된 사례는 있었지만 이 또한 엄격히 말해 캘리그래피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각각의 폰트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담을 순 있겠지만, 이미 규격화된 글꼴에 각각의 상황에 따른 감정을 불어넣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까요

. ‘문근영 글씨체’가 동글동글한 느낌은 있지만, ‘꽃’이라는 글자만이 갖고 있는 싱그러움을 불러내는 덴 한계가 있죠.” 캘리그래퍼 강병인 술통 대표(www.sooltong.co.kr)의 설명이다.

형식이 없는 자유로움. 원광대 여태명 교수(한국 캘리그래피협회 회장)는 조선 시대 서민들이 사용하던 자유로운 글씨체인 ‘민체’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개화기 이전 한글 소설의 유행과 더불어 필사가들이 쓴 민체 작품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궁체나 판본체처럼 서체가 정해진 글자들과는 다분히 대조적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소설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필사가들은 자연스럽게 글자에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 얘기를 할 땐 글자도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고 싸움 장면을 묘사할 때 글꼴의 끝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집니다. 그 당시의 ‘민체’가 한국적 캘리그래피의 원류인 셈이죠.”

▲단 하나뿐인 글자, 제품에 표정을 입혀라.

그러나 과거의 필사가들과는 달리 오늘의 캘리그래퍼들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과거의 ‘민체’가 필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이라면, 오늘의 캘리그래피는 디자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강병인 대표는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포스터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잘 쓴 글씨가 아니다”며 “단지 이 영화를 위해 쓰여지고,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의 글꼴이다. 글자에서 피를 흘리는 것 같은 느낌, 영화가 갖고 있는 치열하고 잔인한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는 ‘디자인’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예라는 옛 방식을 감성 마케팅의 수단이 되는 디자인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디자인으로서 캘리그래피가 적용되는 분야는 다양하다. 2000년 영화 <복수는 나의 것> 포스터를 시작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캘리그래피는, 7년여의 세월 동안 그 영역을 전방위로 넓혀왔다.

특히 강세를 보이는 곳은 캘리그래피를 처음 각인시켜준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 분야. 공지영의 유명한 소설 <봉순이 언니>(2004년 김종건 필묵 대표 글씨 )부터 심리학을 다룬 교양서적 <불안의 심리학>(2007년 궁리 출판사 이현정 표지 디자이너 글씨)이 제목 서체로 모두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책들이다.

최근에는 제품의 상표나 로고 디자인 주문도 부쩍 늘었다. 주로 소주 등 감성 마케팅이 더욱 필요한 먹거리 제품을 중심으로 하던 것이 이동통신 등 IT 영역에까지 진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생활 속에 글자가 쓰이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만큼 캘리그래피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거죠. 최근에는 서예가인 국당 조성주 선생이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패션’에 서체를 쓰며 캘리그래피의 영역을 한층 넓혔습니다.

이제는 제품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입고 다니는 옷에서도 한글의 아름다움과 손글씨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거죠.”

캘리그래퍼 김종건 필묵 대표(www.philmuk.co.kr)는 최근 캘리그래피가 많은 각광을 받고 있는 데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캘리그래피가 디자이너의 한 분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먼저 이론적 체계가 확실해야 합니다.

지금은 ‘캘리그래피’, ‘손글씨’ 등 용어 자체도 혼선이 많아요. 올 10월 한글 캘리그래피협회가 창립되면 이런 것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겠죠. 저 개인적으로도 캘리그래피를 접목한 다양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는 한글날 비보이들과 합동 공연을 준비 중이에요. 비보이들의 춤사위와 한글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고리타분하게만 여겨졌던 ‘서예’를 인간적인 느낌의 ‘디자인’으로 되살려낸 캘리그래피. 앞으로 우리 생활 곳곳에서 캘리그래피를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 같다.

● [인터뷰] 강병인 캘리크래퍼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가 글자의 생명"

책 표지 <천년학>, 진로 소주 <참이슬>은 물론 최근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까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났던 바로 그 글씨체의 주인공인 캘리그래퍼 강병인 술통 대표를 만났다. 젊음의 거리 신촌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먹향이 풍겨온다.

-그동안 쓰신 작품이 많다. 지난해 출간된 베스트셀러 <행복한 이기주의자>나 (주)배상면주가의 '산사춘'이 눈에 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뭔가.

“진로의 ‘참이슬’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제품이 술인데도 20대 젊은 여성을 타깃을 했기 때문에 처음 콘셉트를 잡을 때부터 유난히 고민이 많은 작품이었다.

제일 처음 진로에 보냈던 시안만 해도 100~200장을 넘는다. 제일 처음 보낸 시안이 ‘술’이라는 상품에 맞게 술에 취한 듯 흘려 쓴 글씨체였는데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신선한 느낌이 약하다는 말이 있어서 끝내 밀리긴 했지만 아까운 글꼴이다(웃음).”

- 글자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보통의 디자인 작업과는 과정이 많이 다를 것 같다. 캘리그래피 작업 과정을 소개한다면.

“어떤 작품이든 제작 과정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분야는 그 제품의 콘셉트를 파악하는 일이다. 제품의 분위기가 어떤지, 어떤 이미지를 글자에 담길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그에 맞는 글씨체가 나온다.

먼저 붓으로 종이에 글자를 직접 써보면서 느낌을 잡아나간다. 물론 붓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할 때도 많다. 그렇게 글꼴이 나오면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통해 디자인의 세세한 부분을 완성한다.”

- 최근 신영복 선생이 영화 <황진이>의 포스터 글씨를 써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외에도 박원규 서예가가 영화 <취화선>과 <천년학>의 글씨를 쓰는 등 명사들의 캘리그래피 참여도 활발하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캘리그래피도 상업적인 디자인이기에 앞서 사람을 드러내는 ‘글’이기 때문에 학문적 깊이와 예술성이 자연스레 깃들어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전문 캘리그래퍼들이 지향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의 예술성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작품의 분위기나 콘셉트가 묻힐 수 있다.”

- 캘리그래피 작품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도 부쩍 늘고 있다. 캘리그래피를 배우려면.

“캘리그래피의 발전을 위해서도 능력있는 신진 디자이너의 양성은 중요하지만, 일반인들도 생활 속에 캘리그래피를 활용하면 더욱 감각적으로 꾸밀 수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캘리그래피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필묵에서 운영하는 필묵 아트센터나 술통의 캘리그래피 일반강좌를 통해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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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흔 객원기자 lunallena99@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