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이 주목하는 문화공간으로 환골탈태… 화장실 환경개선 위한 국제기구 11월 설립

수원시의 한 공중화장실
‘이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초조해진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도저히 참지 못할 즈음이 되면 발을 동동 구르고 식은 땀을 흘리는 등 어쩔 줄 몰라 한다.

이것이 무엇일까. 바로 ‘배설’이다. 배설의 순간만큼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짜릿한 안도감을 느낄 때도 없을 것이다. 밥은 한두 끼 거를 수 있다지만 배설은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먹는’ 것보다 ‘누는’ 게 인간에게는 더 절실한 일인지 모른다.

이처럼 중요한 행위임에도 배설은 인류 역사 이래로 푸대접을 면치 못했다. 워낙 사적이며 은밀한 행위인 까닭에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항상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배설의 공간인 화장실도 물론 마찬가지 신세였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을까.

하지만 화장실은 문화와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삶의 질이 높을수록 화장실도 청결하고 위생적이며 편리하다. 한 사회가 선진적이냐 또는 후진적이냐는 그 사회의 화장실 문화와 대체로 정비례하는 편이다.

이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이켜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의 공중화장실은 이용하기 거북한 곳이었다. 낡고 지저분한 데다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가장 불결한 장소로 주저 없이 공중화장실을 꼽았다.

그랬던 한국의 공중화장실이 언제부터인가 확 달라지고 있다. 깨끗하고 산뜻한 시설에 청결과 위생 관리가 이뤄지면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고 있는 것. 여기에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투자와 격려, 시민단체의 자발적인 관심과 애정 등 민관협력이 큰몫을 했다.

주한 외교사절 15개국 대사 부부들이 수원시의 공중화장실을 둘러보고 있다.

■ 일 월드컵 계기로 '화장실 혁명' 한국 화장실이 불결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벗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부산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개최하면서부터다. 외국 손님 맞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화장실 환경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때부터 서서히 불 지펴진 화장실 문화 운동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정점을 이루게 된다. 모든 면에서 양국 간 비교가 불가피한 마당에 최고의 위생과 청결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 화장실에 뒤질 수 없다는 공감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특히 대회 개최 도시 중 수원시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미스터 토일릿’, ‘화장실 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심재덕 당시 시장(현 국회의원)이 앞장서 펼친 ‘아름다운 화장실 가꾸기’ 시책의 결실이 세계인의 시선을 모은 것.

당시 수원시는 월드컵에 대비해 기존 화장실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는 한편 50여 개의 화장실을 신축했다. 수원시가 지향한 공중화장실의 모습은 단순한 ‘배설 공간’이 아닌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었다.

실제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듣고 꽃 향기를 마실 수도 있는 공중화장실이 처음 등장하자 이용객들은 “세상에 이런 화장실도 있나”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한ㆍ일 월드컵을 계기로 세상의 관심을 모은 수원시 공중화장실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화장실 문화의 벤치마킹 사례로 주목하게 됐다.

지난해 11월 수원 화장실을 단체로 취재한 외신기자들은 “한국이 화장실 혁명을 주도한다(South Korean Leads Restroom Revolution)”는 기사를 타전하기도 했다.

■ 11월 세계화장실협회 창립 총회 불과 20년 만에 세계인이 주목하는 화장실 혁명을 이뤄낸 한국 화장실 문화는 지금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다. 1999년 한국화장실협회를 창립해 민간 차원의 화장실 문화 운동을 함께 이끌어온 심재덕 의원이 세계화장실협회(WTAㆍWorld Toilet Association) 창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

정부의 지원 아래 지난해 말 창립총회 조직위원회가 이미 발족했으며 심 의원이 조직위원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심재덕(오른쪽 두번재) 세계화장실협회 조직위원장이 터키대사관을 방문, WTA 창립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는 11월 서울서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할 예정인 WTA는 세계 각국의 화장실 환경 개선을 통해 인류 공영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원대한 사업 목표를 내걸었다.

각국 화장실 실태 조사를 통해 화장실 관련 정보 및 기술을 교류하고 후진국의 화장실 및 위생시설 개선 사업을 벌여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보건ㆍ위생 증진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현재 세계 인구의 40%에 달하는 26억 명이 적절한 개인위생시설(화장실) 없이 생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매년 약 200만 명이 전염성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UN은 지난 2000년 ‘세계 인권 및 환경 개선을 위한 8가지 주요 정책과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가운데 하나로 낙후된 화장실 시설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인다는 과제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WTA 창립총회 조직위 정미경 팀장은 “위생시설 부족으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 감염으로 죽는 사람들 중 80%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저개발 지역에 집중돼 있다”며 “전 세계 화장실 환경 개선을 위해 국제적인 협력과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WTA 창립 추진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5월 현재 WTA 창립총회 참가를 결정한 나라가 30개국을 넘어 당초 목표로 한 70개국 참가 유치는 그리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인데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 경제대국이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5월 말 서울서 개최된 창립총회 준비이사회에 참석한 리 샤오린 중국평화발전기금회 이사장은 “중국은 해마다 10%가 넘는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지만 깨끗하고 위생적인 화장실은 크게 부족한 형편”이라며 “이는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과제라는 점에서 WTA 활동에 적극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유엔 산하 전문기구 편입 계획도 WTA는 각국 정부기관, 지자체, 비정부기구(NGO) 등이 함께 참여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 화장실기구를 지향하고 있다. 나아가 공고한 국제 연대를 바탕으로 의결 및 집행력을 갖기 위해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편입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현재 화장실과 관련해서는 몇몇 국가의 화장실협회와 민간, 기업 등이 참여한 WTO(World Toilet Organization)라는 단체가 이미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WTO는 규모가 작은 데다 협의체 성격을 띠고 있어 국제 공조 활동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분석. WTA는 이 같은 한계를 넘어 명실상부한 국제 화장실기구로 위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정미경 팀장은 “사람들이 말하기 꺼리는 화장실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끌어올린 데 대해 외국 관계자들도 상당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며 “WTA는 우리나라가 인류 보편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앞장섬으로써 국제사회에 주도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WTA 조직위원회는 ‘세상의 근심을 함께 풀어갑니다’라는 공식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과연 한국이 ‘화장실 한류’를 내세워 인류의 원초적인 근심을 해결해 나가는 주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국민들도 함께 지켜볼 일이다.

● 우리나라의 화장실문화 운동 약사

▲한국화장실협회 창립(1999)

▲세계화장실대표자회의, 한ㆍ일화장실포럼, 국제화장실엑스포 개최(2002)

▲세계 최초 공중화장실법 제정(2004)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총회 개최 발의(한국화장실협회ㆍ행정자치부, 2005)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총회 조직위원회 발족(2006)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총회(2007. 11.21~25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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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