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특목고’는 무엇인가 외고, 과학고, 민사고 열풍이 영재 육성과 교육기회 균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충돌을 빚어내면서, 사회는 갑론을박의 거대 담론을 벌이지만 정작 교육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당장 내 자신과 내 자녀의 진학을 위한 현실적 선택의 문제로 다가온다.

수월성ㆍ 특성화 교육의 실험적 성격에서 출발해 어느덧 ‘입시명문고’로 변질된 특목고의 허실과 전망 등을 파고 들어가 본다.

"일반고 전학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지요."

서울의 한 외고 국내반에 다니는 딸을 둔 어머니가 털어놓은 말이다. 지난해 말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외고에 합격한 딸을 부둥켜안고 기뻐했는데 한 학기를 마치고 나서부터 심경이 복잡해졌다.

■ 성적은 바닥, 명문 입시 기관 손가락질

우선 1학기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딸 표현 그대로 '바닥'이다.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 본 일이 없는 딸과 함께 엄마는 충격을 받았다. 상위권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각오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접하니 막막했다.

내신 성적뿐 아니다. 전국 고교생이 치르는 연합학력평가 결과도 기대에 못 미쳤다. 전공인 제2외국어를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수학 과학 사회 과목에서 뒤쳐졌다.

학업은 그나마 노력으로 따라 잡을 수 있다지만 못 견디게 서러운 건 교육 당국의 태도다. '명문 입시교육 기관으로 변질됐다'며 외고를 비난하고 있다. '외고가 어학 영재 육성이라는 설립 취지와 무관해졌다'며 특성화고 전환을 고려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혔다.

힘들었던 외고 입시 준비 기간

딸이 외고 입시 준비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 입시에서 내신 비중이 높아져 대학 진학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매력에 외고 진학을 결정했다.

고등학교 3년간 눈높이 교육을 알차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명문 대학 진학 가능성 보다 더 크게 보였다. '일반고 가면 서울대 진학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속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외고 가서도 우리 아이는 잘 할거야' 라는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외교 진학을 목표로 학교 공부에 열중하느라 해외 연수는커녕 해외 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은 딸은 영어 리스닝 실력을 높이기 위해 식사 시간에도 MP3를 끼고 안간힘을 썼다.

입시 직전 몇 달은 학원에서 새벽 2시까지 창의 사고력 문제를 풀었다. 새벽 공기에 혹 감기라도 들까, 혹 새벽에 험한 꼴이라도 당할까 불안해 정규 강의만 듣고 일찍 귀가하도록 종용했지만 딸은 또래들과의 경쟁 심리 때문인지 새벽 2시를 꼬박 채우고 돌아왔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데 너무 일찍 혹독한 경험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합격 유무를 떠나 지금 공부하는 건 피와 살이 될 거다'라며 위안을 삼았다.

"학교 수업시간에 잠이 쏟아져"라는 딸의 하소연에 "선생님도 특목고 준비생들은 이해 하실거야. 잠이 오면 자라"라고 부모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반장이 어떻게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라며 반문하는 딸에게 부끄러웠다.

중학교 교과 과정 범위에서 벗어난 입시 문제를 내는 외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학 교과 과정과는 접근 방식이 다른 '창의 사고력'으로 IQ 테스트나 영재성 판별을 하겠다는 의도인지, '스태그플레이션' '엔트로피' 같이 웬만한 대학생도 모를 문제를 출제해야만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경쟁의 룰은 룰. 주어진 룰에 따라 힘겨웠던 준비 과정을 거쳐 입시 관문을 뚫었고 나름대로 부푼 꿈을 안고 외고에 입학했는데 교육 당국은 그 노력과 의지를 평가절하 시키고 외고와 외고생 죽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만 같아 원망스럽다.

친구들의 힘

"외고의 장점은 훌륭한 교사와 학교라기보다는 우수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딸 아이의 성적을 바닥으로 밀어 낸 그 친구들 덕택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사고의 폭도 넓어지는 거 같아요."

이 외고생 어머니는 딸의 가장 좋은 스승으로 학업에 충실하고 성실한 친구들을 꼽으며 아직도 외고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또래의 우수한 학생끼리 '보이지 않는 손'으로 격려하며 자극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고생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재난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목사로 분한 진 핵크만의 마지막 기도가 떠오른다. 거대한 해일로 초호화 유람선이 침수되기 직전 승객의 탈출을 이끌던 진 핵크만이 죽기 직전 하늘을 향해 외치는 대사다.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부디 방해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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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기 교육컬럼리스트 beaba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