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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이강숙
[한국초대석] 신인소설가된 노음악가 "목적이 없으면 죽은삶"
고희를 넘겨서도 깊어가는 소설병… 서랍 속엔 장편초고만 두어 편 대기 중
'구걸 피아노'로 연주 공부 "교수는 꿈에도 생각 못해"
미국대학 재직시 처음 악기 구입 "눈물로 밤샘 연주"





선생의 ‘병’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진지했다. ‘속이 썩는다’고 했다. 선생은 칩거 아닌 칩거중이다. 부득이 거절하기 어려운 몇몇 음악 관련 초청강연만 빼고는 거의 외부 세계와 접촉을 끊고 지낸 지 오래. 오로지 소설 생각만 하며 지낸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초대 총장이자 음악원 석좌교수인 이강숙(71) 교수. 지난해 ‘현대문학’을 통해 음악평론이 아닌 단편소설 ‘빈 병 교향곡’으로 등단, 소설가로 공식 등재했다.

학교내 선생의 연구실, 아니 집필실에 들어섰을 때 선생은 두개나 걸쳐 쓴 안경중 하나를 벗었다. 눈이 몹시 충혈돼 있었다. “녹내장이라는군요.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어요. 글을 시작하고부터 눈이 가장 문제예요.” 이 고령의 신인 소설가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글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 소설가 이강숙

선생을 찾기 전, 먼저 그의 소설집 ‘빈 병 교향곡’을 읽었다. 이미 그의 필력을 알고 있거나 이번 소설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대개 은퇴 전후로 내는 학자들의 ‘기념문집’성 저서와는 달리, 선생의 글은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선생의 곁에는 부인 문희자 여사가 있다.

글로 치면 선생보다 선배다. 문 여사는 시집 ‘동회로 가는 길’을 발표한 시인이다.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혹시 여사의 코치가 있지 않았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그 반대예요. 출판 전까지도 아내는 전혀 몰랐어요. 제가 일부러 전혀 내색 않다가 아무래도 양심에 걸려서 할 수 없이 발행 1주일 전 쯤에 실토를 했죠. 그런데 제 말을 전혀 믿지 않더라고요.”

책이 나온 뒤에서야 문 여사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차례 읽고 난 뒤 부인의 첫 마디는 “곧잘 썼네요”였다.

선생의 필력은 사실 ‘은퇴 후 소일용 수준’이 아니다. 음악가이면서도 평생에 걸쳐 글과 더불어 살아왔다. 88년부터 ‘낭만음악’이란 계간지를 발행, 지금까지도 20년째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0년대 초 무렵부터 일찍 컴퓨터 작업에 적응, 당시 유행한 ‘보석글’ 시절부터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어 왔다.

미국 유학전인 1965년 무렵에는 한국일보에 약 1년반에 걸쳐 음악평론 칼럼을 연재한 인연이 있다. 한창 때는 17군데 매체에 글을 쓰며 지냈다. 음악가의 길에 평생을 바친 것도 오롯이 자신의 의지만은 아니다.

선생은 대학시절부터 시작해 거의 매년 신춘문예를 비롯, 문학공모전이라는 공모전은 숱하게 도전하고 고배의 쓴 맛을 보았던 열혈 문학청년이었다.

“공초 오상순 선생을 찾아가 시를 평가 받아본 적도 있고, 1965년 ‘사상계’에서 이청준씨가 소설 ‘퇴원’으로 등단했을 때에도 저는 소설을 냈다가 떨어진 사람 중 하나였어요. 아무리 공모에 도전해도 자꾸 떨어지니까, 결국 원래의 제 자리인 음악에 전념하기로 한 거예요.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다르쟎아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차라리 내가 잘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옳겠다는 판단을 한거죠. ”

■ 음악가 이강숙

은퇴 전 선생의 일과는 오로지 학교와 학생, 강의로 꽉 차 있었다. 퇴근 후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으며 ‘나 내일 아침에 강의 있어’라고 첫 인사를 건네기 일쑤였다.

부인 문 여사에게 ‘저녁 식사를 서재로 갖다 주면 좋겠다’는 암묵적인 신호이기도 했다. 항상 서재에 파묻혀 살았다. 예능과 교수들에게는 흔한 개인 레슨조차 한번도 해 본 일이 없다. 우직하리만큼 박봉의 월급만으로 검약하게 저축하며 살았다.

책만 들여다보던 아버지 이 교수의 등을 보며 자녀 3남매가 자랐다. 선생과 나란히, 자녀들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장녀와 장남은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고, ‘공부만 잘 하면 뭘 해, 돈을 많이 벌어야지’하던 차남은 미국의 한 대기업에서 사업분석가로 일하고 있다. 항상 공부하는 모습 외에는 자녀들에게 남겨준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아이들과 마주칠 때면 하나씩 품에 꼭 안으며 ‘아빠는 너희를 참 사랑한단다’라고 말해주곤 했죠. 그것도 아이들이 좀 크자 징그럽다며 피하더군요(웃음). 아이들을 크게 나무란 일도 없었고, 나무랄 일도 사실 없었어요.”

공부에 대해서도 닦달해 본 기억이 없다. 단지 선생이 용납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었다.

“선택은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해라. 대신, 그것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 선택을 바꾸지 마라. 즉, 함부로 목적을 세우지 말라는 얘기죠. 실제로 아이들 대학 선택 때도 그랬고,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시작해놓고 도중에 그만두면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았어요.”

■ 가난, 아무 것도 아니다.

선생은 어린 시절 노래를 곧잘 불렀다. 피아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형편은 정반대로 기울고 있었다.

“아주 가난했어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저희 4형제를 키우셨죠. 피아노 레슨 같은 건 엄두도 못 낼 일이고, 기본 학비나 생활비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콩나물을 길러 팔기도 하고 삯바느질도 하셨어요. 결국 저 혼자 뒹굴면서 음악 공부를 한 셈이에요.”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교회 등을 찾아 다니며 ‘구걸’ 피아노로 연주 공부를 이어갔다. 운 좋게도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우연히 무료로 ‘바이엘’을 배운 게 타인으로부터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음대에 진학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를 비롯,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 음악으로는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수가 되리라곤 더더욱 꿈도 꾸지 않았어요. 교수는 하느님이나 되는 줄 알았지요.”

선생의 자택 거실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슈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다. 1975년 미국 버지니어 커먼웰쓰 대학 교수로 부임한 당시, 그가 월부로나마 처음 장만한 피아노다. 명색이 한국 명문대 출신의 피아니스트로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이름으로 갖게 된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처음 집에 들여놓던 날, 선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혼자 밤새도록 그 피아노를 치며 눈물을 쏟았다.

■ 한국의 고집쟁이 이강숙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2년, 선생은 한예종 설립에 참여했다. 초대 총장이 되어 한예종의 기반을 세우기까지 얽힌 비화들은 유명하다. 한국의 고집쟁이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된 배경도 이때에 있다.

당시 한예종 설립 사업을 담당했던 문화관광부 소속 공무원들은 선생이 문에 들어서는 모습만 보여도 슬쩍 자리를 피하곤 했다. 부서 내부에선 ‘이 교수가 오면 그냥 그 분이 하자는 대로 해라. 어차피 싸워봐야 물러나는 분이 아니다. 차라리 일찍 항복하는 게 상책이다’라는 조언 아닌 조언까지 떠돌았다.

“한예종 설립 때 공무원들과 많이 싸우셨다면서요? (웃음)”

“하하하. 그땐 그랬죠. 저는 Yes면 Yes, No면 No거든요. 한번 얘기했는데 상대가 안 된다고, 곤란하다고 하더라도 제가 요구하는 확답을 얻어낼 때까지는 무조건 계속 찾아가는 거예요. 나중엔 상대가 지쳐서 두 손을 들지요. 하지만 당시 그렇게 힘들게 함께 일했던 공무원들이나 관계자들이 지금까지도 저와 많이 친합니다. 사심 때문이 아니란 걸 다들 아니까.”

애초에 총장직을 맡는 일부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맡아달라, 안 맡겠다는 실랑이만으로도 거의 반년을 보냈다.

“나중엔 당시 문광부 장관 내외분께서 직접 제 집까지 찾아와 설득하신 일도 있고, 그래도 제가 자꾸 거절하니까 나중엔 저더러 ‘비굴하다’고까지 하시더군요.”

“그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 ‘네, 비굴합니다. 사람이 비굴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죠(웃음).”

“그 말에 혹시 넘어가신 건가요?”

“네, 결국 그렇게 된 셈이에요. 비굴하다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한편 약도 오르고, 두고두고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결국 제가 졌죠. 하지만 막상 수락을 하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부지도, 예산도, 교수도, 그 아무것도 없이 달랑 ‘설치령’ 문서 하나만 건네주고 학교를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힘들여 직접 기초를 세운 학교이니만큼 한예종에 대한 애정이나 감회가 각별하실 수 밖에 없으시겠군요.”

“그렇죠. 원래 설립 취지가, 굳이 외국 유학을 보내지 않고도 국내에서 우리 손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국제적 인재로 양성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미 많은 학생들이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는 등 성과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황지우 총장을 비롯해 그간 유능한 분들이 총장을 맡아 잘 가꾼 덕에 이미 훌륭하게 자리잡았다고 봅니다. 대단히 뿌듯한 일입니다.”



■ 이강숙, 그리고 황혼.

선생은 2002년에 정년 퇴임. 석좌교수이긴 하지만, 은퇴 후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아침에 눈 뜨면 가방을 챙겨 학교에 나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음날 강의 준비에 골몰하던 기계적인 리듬이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이미 은퇴 1,2년 전부터 소설 작업을 준비했다. 청년기부터 유보했던 꿈이라도 따로 있으니 행복한 사람. 그러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전과 다른 시간표가 굳어졌다.

부쩍 새벽 2,3시에 깨는 일이 잦다. 한 새벽에 혼자 깨어 일어나 그때부터 동 틀 녘까지 내내 글을 쓴다. 글이 잘 안 풀릴 땐 단 한 줄도 진도가 나가지 못한 채 멍하니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자판 앞에 앉은 채 아침을 맞을 때도 있다. 외로울 땐 새벽에 혼자 술을 홀짝거리기도 한다. 선생의 소설 속에는 선생의 자화상이 반쯤 섞여 들어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은퇴 전까지 인생을 헛 산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걸 봤어요. 진심이신가요?”

“네, 은퇴 후에 돌아보니 이제껏 내가 헛 살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지금껏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생각, 저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듯한 느낌 같은.”

“적적함이나 허탈감 같은 의미인가요?”

“아뇨. 뭔가를 아직도 빠뜨린 듯한, 뭘 덜한 듯한 기분같은 거예요. 특히 소설을 쓸 때는, 쓸 때마다 황무지에 가 있는 기분이에요. 아주 고통스러워요.”

“그럼 안 하시면 되잖아요.(웃음)”

“그럼 또 삶의 의미가 없어지죠. 희망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에요. 관심의 대상도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제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고 싶어졌어요.”

선생의 ‘소설 병’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지금도 선생의 서랍엔 개작을 기다리는 장편 소설만 쳐도 약 1,000매짜리 초고 두어편이 대기 중이다. 단지 나이만 많은, 고뇌의 신인 소설가. 그대로 계속 글 이야기를 나누다간 날밤을 꼬박 새고도 모자랄 판이었다.

■ 이강숙 교수 약력

서울대 음대 졸업, 미국 미시간대에서 음악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대학 조교수, 서울대 음대 교수, KBS교향악단 총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임.

1988년부터 음악학술계간지 <낭만음악>을 발간 중.

2001년 <현대문학>에 단편 <빈 병 교향곡>으로 정식 등단. 저서 <음악의 이해>, <한국음악학> 등. 산문집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 장편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등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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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11/06 11:47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
사진=김지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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