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장 다니며 기자 사칭… 식사대접 받고 선물 챙기고매체 수 워낙 많아 확인 어려워… 홍보실 직원들 골머리

최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외국 IT 기업의 소프트웨어 신제품 발표회장. 행사가 끝날 즈음 입구 카운터에서 승강이가 벌어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 기자야! 왜 선물 2개를 못 준다는 거야?”

“글쎄, 잠깐만 기다리시면 저희 부장님이 오셔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꾸 이러면 대표한테 직접 항의할 거야!”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금방 담당자가 오실 거예요.”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과 방문 손님 사이에 오고 간 격한 대화는 담당 부서장이 와서야 정리가 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냥 가시죠!” ‘자칭’ 이 회사담당 기자와 홍보 담당자 간에 벌어진 마찰이다.

기업체의 각종 신제품 발표회나 기자간담회, 행사장 등을 전문적으로 찾아 다니는 ‘신 사이비 기자’들 때문에 홍보 담당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거 사이비 기자라면 업체들의 약점을 잡아 개별적으로 돌아 다니며 공갈이나 협박 등으로 금품 등을 뜯어 내던 것이 일반적인 행태. 요즘 그런 사례는 많이 사라졌지만 행사장에서 ‘기자 행세’를 하는 ‘기자 아닌 기자’들이 적잖이 눈에 띄고 있다고 홍보맨들은 증언한다.

또 다른 사례 하나. 국내 대형 주류 회사의 임원 A모씨는 얼마 전 특이한 경험을 했다.

주요 고객들만을 초청해 벌인 사은 행사였는데 웬 기자 한 명이 찾아 와 인사를 해 반갑게 맞이한 것. 평소 기자를 접할 일이 많지 않던 그는 급하게 회사와 제품, 행사 등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해 주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회사의 대표까지 인사시켜 주며 최대한의 정성도 보였다.

하지만 이 임원은 다음 날 황당했다. 기자의 신원이 미심쩍어 확인을 해 보니 그런 기자가 없었던 것. 받았던 명함의 연락처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얘기 도중 자꾸 ‘선물은 없냐’며 선물 얘기를 계속 하더라고요.” 물론 이 기자는 선물을 한아름 싸 들고는 사라졌다.

각종 행사만을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알바형 사이비 기자’들로 홍보맨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없음).
각종 행사만을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알바형 사이비 기자'들로 홍보맨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없음).

이들 ‘가짜 기자’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식사나 서비스를 제공받고 기념품을 반드시 챙겨간다는 것. 보통 기업체들이 행사장에서 배포하는 선물이라야 적게는 몇 천원, 많게는 몇 만원 수준의 간단한 기념품들이 거의 대부분. 예전의 ‘사이비 기자’들이 ‘크게’(?) 챙겨 갔던 것과 동등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알바형 사이비 기자’ 정도로도 불린다.

한 홍보맨은 “최근 열리는 행사에는 이런 ‘사칭 기자’들이 최소 3~4명은 왔다 가는 것 같다”고 전한다. 한 사람이 파악하는 숫자만 그 정도라 여러 사람이 정확하게 파악하면 더 될 수 있다는 것. 이들은 ‘진짜 기자’ 보다 더 기자 행세를 워낙 여유 있게 잘 하기 때문에 ‘챙길 것은 잘 챙겨 간다’고 홍보맨들은 지적한다.

최근 ‘알바형 사이비 기자’들이 새롭게 눈에 띄고 있는 것은 언론이 처한 다매체 환경과도 밀접하다.

즉 매체의 종류가 다양화하는 가운데 처음 보거나 이름도 모르는 신설 언론사들이 크게 늘어났고, 또 계속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터넷으로만 기사를 송고하는 인터넷 웹진 등 인터넷 매체가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매체의 절대 숫자가 늘어나면서 홍보담당직원과 기자들의 접촉 농도(?)가 예전만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자 수가 워낙 많아져 수시로 일일이 대면 접촉하기도 어려운데다 기자들까지 담당분야가 수시로 바뀌니 홍보실로서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고 한 홍보 담당자는 고충을 토로한다.

언론에 대한 기업의 홍보 방식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예전에는 소위 ‘출입 기자’들만을 중심으로 ‘특별한 발표와 대접’이 관행이었다면 최근에는 매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괄적으로 홍보를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어서다. 특히 ‘접대’라든가 ‘출입 기자’ 개념이 전혀 없는 외국계 기업들이 1990년대 위환위기 이후 늘어나고 이들 업체의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런 틈새를 파고 드는 ‘알바형 사이비 기자’들은 최근 더욱 대담한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언론사의 한 기자는 “최근 확인된 가짜 기자와 얼마 전 기자 간담회장에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까지 같이 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들로 인한 부작용도 심해지고 있다. 한 부동산 사업자는 “평소 알고 지낸 기자로부터 ‘교통 사고가 나 급하게 돈을 빌려 달라’는 전화를 받고 입금까지 해 줬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말한다.

금액이 크지 않아 그냥 잊고 말았다고 그는 불만을 토로한다. 건축사인 또 다른 B씨는 “명함까지 받고 수년 째 기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기자가 아니라니 믿어지지 않는다”며 “지금도 그 사람을 말 할 때는 OO기자라고 부른다”고 털어 놓는다.

알바형 사칭 기자들을 적발하기는 쉽지 않다. 행사장에서 바쁠 때 왔다가 바쁠 때 사라지기 때문. 또 의심이 가더라도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고 따지기에는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 있는 홍보 맨으로서는 간단치 않은 일이다. 홍보대행사의 한 부장은 “현장에서는 몇 명을 솎아 내기 위해 투자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고 어려움을 전한다.

최근 이들 ‘사칭 기자’들은 서로 ‘연대’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어 홍보 담당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미리 명함에서 파악해 이들에게 연락도 안 했는데 모두 다 찾아 오는 거예요.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야 찾아 오기 쉽다지만 갤러리나 일반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간담회까지 찾아 오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 말한다. 서로 네트워크가 있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실제 몇몇 ‘사칭 기자’들은 서울 시내 주요 호텔만을 돌며 거의 매일 행사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희로서는 행사만 무사히 치르면 그만입니다. 굳이 시끄러운 상황을 만드느니 행사 진행만 잘 되면 크게 탓할 것도 없지요.” 홍보 대행사를 쓰는 대부분의 행사 비용은 대행사가 아닌 고객사가 지불하기 때문에 홍보 대행사가 굳이 나설 일이 아니란 상황도 ‘사칭 기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다.

한 홍보대행사 팀장은 “이들 알바형 사이비 기자들로 인한 손실이 돈으로 따지면 별로 큰 액수가 아니라 그냥 넘어가는 것 같다”며 “예전 결혼식장을 찾아 다니며 공짜 점심을 먹던 ‘단골 불청객’들이 많았던 것처럼 ‘알바형 사이비 기자’도 최근 경제 상황이 쉽지 않은 만큼 새롭게 생겨난 풍속도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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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