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예술·정치의 중심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한 가장 오래된 보험사 '로이즈'

커피는 오늘날 전 세계인이 가장 즐기는 음료의 하나이다. ‘김치는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신다’는 우리나라에서 성인 한 사람의 커피 소비량은 하루 한 잔꼴이며, 이는 세계 평균 소비량의 약 2.7배 수준이다. 커피 원두의 품종은 크게 아라비카, 로부스타, 리베리카 등이 있는데, 현재 아라비카와 로부스타가 상업재배의 95%를 차지한다. 커피 생산량은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 인도네시아, 온두라스, 에티오피아 순으로 많다. 1650년경 영국의 커피 애호가였던 헨리 블런트 경이 커피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커피의 기원, 식민지 생산과 무역쟁패에 관련되어서는 커피향의 종류만큼 스토리가 많다.

커피의 원조를 두고서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간 자존심 대결이 치열하다. 에티오피아는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아라비아 소왕국의 시바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초대 황제가 됐다는 건국신화를 가진 그리스도 국가다. 에티오피아는 산악지대에서 기원한 3000여 종의 커피 종자를 보유하고 있다. 6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간 전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홍해를 통항하는 것을 선호하게 됐다. 덕분에 홍해 입구의 아덴만(우리에겐 소말리아 해적이 들끓는 해역으로 유명)에 위치한 예멘의 모카항은 커피를 비롯한 물자교역의 중심이 됐다. 커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예멘은 커피를 직접 재배하게 됐고, 예멘의 토질과 기후가 커피 경작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에 예멘은 최고급 커피를 생산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커피원조에 대한 오랜 논란에서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지만, 최초로 재배한 곳은 예멘”이라는 쪽으로 절충안이 나온 것 같다(출처,《신동아 2016년 6월호》,바리스타 박영순).

커피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9~10세기 경 페르시아 의사들의 약리효과 발표가 있었다. 첫 문헌은 이탈리아 로마대 교수인 안토니 파우스트 나이로니가 1671년에 쓴 《잠들지 않는 수도원》이다. 그 책 중 ‘에티오피아 목동 칼디의 전설’에서 커피가 비롯됐다는 내용이 윌리엄 유커스의 1922년 책 《커피의 모든 것》에 인용되면서 정설처럼 됐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목동인 칼디는 자신이 기르는 염소들이 들판에 있는 커피나무의 빨간 열매를 먹기만 하면 잠도 안 자고 밤새 흥분하여 뛰어 노는 걸 관찰했다. 칼디는 신기해서 자신도 먹어 보고는 커피열매가 각성효과가 있음을 발견해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인근의 이슬람 사원에 있는 사제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고, 커피 열매에 잠을 쫓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한 사제들에 의해 이후 여러 사원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피문화는 이슬람 세계가 유럽보다 앞선다. 커피가 유럽인들의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십자군 원정 이후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와인과 커피에 관한 유럽과 이슬람의 문화에 대해 마시즘의 책 《마시는 즐거움, 2019》은 흥미롭게 정의했다. “유럽은 언제나 취해 있기를 원한 반면, 이슬람은 깨어 있기를 원했다. 취한다는 것, 깨어있다는 것, 그것은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유럽은 와인을, 이슬람은 커피를 마셨다.” 이교도인 이슬람의 음료라는 이유로 종교 교리에 따라 유럽에서 금기되었던 커피였다. 16세기 말 커피가 터키에서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로 전해지자 로마의 사제들은 '이슬람교도의 와인'이라며 그리스도교도에게 커피금지령을 내려달라고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605년)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뛰어난 미식가였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악마의 음료라고 하는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것은 어찌 된 이유인가. 이러한 것을 이교도가 독점하게 두는 것은 안타깝다. 짐은 커피의 세례를 내려 그리스도교도가 마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고 하면서 커피를 기독교의 음료로 공인했다. 이후 유럽 사람들은 공공연히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나게 되었다.

17세기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네덜란드는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 등 4대 향신료 못지않게 커피에 관심을 가졌다. 커피는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졌지만 너무 비쌌고, 아랍은 부의 원천이자 독점적 위치에 있던 커피나무의 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또 커피나무 독점을 위해 모든 커피원두를 볶아서 수출하도록 규정했다. 볶은 커피로는 싹을 틔울 수 없어 커피 재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커피에 맛을 들인 유럽인들은 커피나무나 싹을 틔울 수 있는 커피원두를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아랍인들이 그토록 삼엄하게 지키던 커피묘목을 빼내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유럽인은 바로 네덜란드인이었다. 네덜란드 의류무역상인 피터 반 덴 브루케는 1616년 커피묘목 몇 그루를 암스테르담으로 밀반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온실재배에는 실패했다. 그 후 네덜란드는 100여년에 걸쳐 황금 알을 낳는 고수익 사업인 커피를 열대지방의 해외식민지에서 재배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자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실론에서 1658년 커피재배에 성공했고, 커피경작지를 인도네시아로 넓혀 나갔다. 마침내 1710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생산된 커피가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후 해외식민지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조성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80년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커피를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영국은 18세기와 19세기에 자유무역과 대식민지 지배를 통해 커피 생산에서 큰손으로 부상했다. 네덜란드가 커피를 지배했을 때 영국은 대체제인 중국 홍차를 유럽에 도입했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2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출범했고, 1650년대에는 영국 런던에 뿌리를 내렸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5세 시대에 커피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상징이 되었다. 커피하우스는 점차 유럽 문화와 예술과 정치와 혁명의 중심지가 됐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1700년경에는 수천 개가 개점할 정도로 급속히 유행을 탔으며 영국과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장소가 되었다. 17세기 런던에서 커피는 남성의 음료였다. 런던커피하우스는 남성들에게 문이 열려 있는 신사클럽(Gentlemen's Club)이었다. 커피 값 1페니만 있으면 누구나 커피하우스에 입장할 수 있었고,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페니 대학'이라 불리기도 했다. 런던커피하우스에서 신사들은 시사와 정치, 철학과 자연과학, 가십과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왕립학회’도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고, 왕립학회 초기 회원이었던 아이작 뉴턴과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 등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토론한 내용들은 근대과학의 토대가 됐다.

1674년 영국여성들의 커피 반대청원.micah.sparacio.org

커피하우스 문화의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커피하우스를 싫어한 두 계층이 있었다. 하나는 커피하우스가 정치적 불만과 비판여론 형성의 장이 되는 것을 싫어한 위정자 계층이었고, 또 하나는 커피하우스에 하루 종일 남편을 뺏긴 주부 계층이었다. 영국 찰스 2세는 이 때문에 1675년 12월 영국의 모든 커피하우스를 폐쇄하겠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영국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찰스 2세는 결국 칙령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676년 1월 초 이를 철회했다. 영국여성들은 남성전용의 커피문화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급기야 1674년 지나친 커피 음용이 성생활에 지장을 가져온다는 내용의 '커피하우스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서'를 만들어 남자들의 커피하우스 출입을 막아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면 프랑스 남성만큼 정력이 형편 없어진다”는 논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남성들의 논박이 뒤따랐다. 청원의 결과는 여성의 패배였고, 남성들은 더욱더 커피하우스를 찾게 되었다. 이후 커피하우스의 여성 출입 금지령이 해제돼 이 분야의 남녀평등이 성취됐다. 아울러 여성들이 다니던 커피하우스(토마스 트와이닝)가 1706년 영국의 대표적 홍차 브랜드인 ‘트와이닝’을 선보임으로써 남성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여성들은 명품의 도자기와 홍차의 효능이 더해진 홍차를 마시는 문화로 나뉘게 되었다.

해운과 커피하우스의 관계는 심오하다. 해운업 발달과 함께 해상보험이 중요한 사업으로 부상한 가운데 17세기 말부터 런던은 해상보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보험의 대명사인 영국 대형 보험사 로이즈의 효시가 바로 커피하우스다. 근대 산업혁명으로 사업상의 위험부담이 커지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가 바로 보험업인데, 영국의 에드워드 로이드(1648~1713년)는 그 선구자였다.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는 1688년부터 런던 타워스트리트에 문을 열었는데, 해운업계 사람들의 단골 커피 하우스로 자리했다. 로이드는 1696년부터 《로이즈 뉴스》를 발행해 선박매매, 선박입출항 일정, 해상보험 등에 관한 종합정보를 제공했다. 한때 휴간했다가 1726년 다시 《로이즈 리스트》라는 이름 아래 복간되어, 현재는 《런던 가제트》 다음으로 오래된 신문으로 유명하다. 주식거래도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17세기 영국의 해상무역이 절정을 달리던 시절, 로이드는 해운정보력의 집결체인 《로이즈 리스트》와 함께 점차 보험업계의 중심인물이 됐다.

로이즈는 큰 사고가 발생해도 보험금 지급거절이나 지급불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신력이 높았다. 로이즈의 모토는 라틴어로 신뢰·확신·용감을 뜻하는 ‘피덴티아(fidentia)’이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커피하우스라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로 성장하였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선박의 검사ㆍ등록ㆍ해상보험, 특히 배의 규격과 등록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정보를 세계 각지로부터 모아서, 세계보험의 중심 시장이 되고 있는 것이 ‘로이즈’이다.

임기택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해양수산부

로이드선급은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IMO)’의 임무와 미션을 정립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IMO는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선박의 안전과 보안, 해양오염 방지, 해운과 조선 등과 관련한 국제협약을 만들고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며, 본부는 런던에 있다. 현재 IMO 회원국 수는 174개국으로 특정 이슈가 생겼을 때 국가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IMO 수장인 사무총장의 주 업무다. 2016년 한국인 최초로 제9대 IMO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임기택은 해양수산부 공무원 출신으로 해양안전심판원장, 부산항만공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발군의 리더십과 외교능력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자랑스러운 해사전문가이다. 다양한 국제 분쟁을 매끄럽게 조율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당초 2019년까지인 임기가 2023년으로 연장됐다. 커피, 런던커피하우스, 로이즈, 한국인 최초의 IMO사무총장으로 이어진 역사에서 임 총장의 임무성공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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