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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의 해양책략] 팍스 브리태니카를 만든 빅토리아 여왕

해양책략 #25 《팍스 브리태니카를 만든 빅토리아 여왕》
  • 빅토리아 여왕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팍스 브리태니카’는 라틴어로 ‘영국에 의한 평화’라는 뜻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상징한다. 대영제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주요 해로와 해상권을 장악했고,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확보해 경영했다. 대략 1815∼1914년 사이를 가리키는데,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재위 1837∼1901년, 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의 재위기간과 거의 중첩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국왕이자 인도의 황제이며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2015년 9월 9일부로 현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통치한 여왕이었다. 19세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그녀의 재위 기간 64년은 ‘빅토리아 시대’로 통칭되며,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만으로도 영국의 국가위상은 다른 나라가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동 트기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이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영국의 국내외 정치외교와 경제상황은 위험과 불확실성이 가득 찬 상황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조부인 조지 3세(재위 1760~1820년)는 프랑스와의 7년 전쟁(1756∼1763년)에서는 승리했지만, 프레데릭 노스 수상 시절 보스턴 차사건으로 미국을 잃었다.

난세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숙적인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결전을 벌였다. 당시 정황을 요약하자면, 유럽 대륙은 막강한 육군의 프랑스가 지배했고, 해양은 막강한 해군의 영국이 장악했다. 섬나라 영국에 상륙하려던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1805년 스페인 남서부 앞바다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 대패했고, 1815년 6월 벨기에 지역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 의해 재기의 기회마저 완전 상실했다. 그 후 빅토리아 여왕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던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못지않게 빅토리아 여왕도 탄생에서 왕관을 쓰기까지 드라마틱한 곡절을 겪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장자도 아닌 4번째 아들 켄트공의 딸로 태어났다. 확률 제로에 가까운 영국 왕위 순위에서 기적적으로 후계자가 됐다. 아버지 켄트공은 빅토리아 여왕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고,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인 존 콘로이에 의해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신뢰한 사람은 외삼촌으로 훗날 벨기에의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였다.

  • 영국이 지난 1월 31일(현지시간) 오후 11시(그리니치표준시·GMT)를 기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했다. 런던 의회광장에 모인 이들이 1973년 이후 47년 만에 EU를 탈퇴하는 순간을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빅토리아 여왕은 나이 20세 때 외삼촌 레오폴드의 주선으로 독일 색스 코버그 고타가의 왕자 앨버트 대공과 결혼했다. 결혼생활이 안정되면서 앨버트 공의 지적이고 사려 깊은 태도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국무회의 때면 언제나 앨버트 대공을 대동하였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20년 결혼생활 동안 명목상 영국의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이었지만 실제적인 군주는 앨버트 대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빅토리아 여왕, 김정미). 빅토리아 여왕은 영민한 남편 앨버트 대공과 노련한 수상들의 경륜을 빌어 자신과 왕실, 더 나아가 영국의 안정을 꾀했다. 대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엘리자베스 1세와는 달리 빅토리아 여왕은 대학을 ‘늙은 땡 중들의 소굴’로 인식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남편인 앨버트 대공이 1847년 간발의 차이로 케임브리지 대학총장으로 선출됐을 때, 빅토리아여왕은 남편 앨버트 대공에게 “마침내 일거리가 생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기쁨과 애정을 표시했다(출처. Peter Sager 지음/ 박규호 옮김,《Oxford & Cambridge》,갑인공방, 2003).

독일 출신의 앨버트 대공은 대부분의 영국학자들보다 독일과 영국의 교육문제에 관해서 지식이 더 넓었고, 더 소통을 잘했다. 케임브리지대의 전통을 존중했던 부드러운 성품의 앨버트 대공은 무리한 개혁정책을 펴지 않으면서도 1858년에 정관과 조례를 만들고, 이에 따라 학칙과 규범을 개정하였다.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과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다. 한편 그녀는 혈우병 보인자였고, 이 유전자가 유럽의 왕가로 퍼져 러시아 왕가의 몰락을 초래하는데 한 몫 했다.

19세기 영국은 노련하고 전략적인 빅토리아 여왕의 지혜와 리더십에 힘입어 대영제국의 전설을 완성했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해 크게 판세를 그릴 줄 알았던,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는 절대 놓쳐버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은 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국과의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과 1898년 이후 99년 간 조차한 홍콩문제,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육법, 크림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함으로써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은 입헌군주였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빅토리아가 입헌군주의 역할에 충실하여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영국 국왕은 내각에 대부분 권한을 내어주는 대신 왕은 군주로서의 위엄과 권위, 즉 카리스마만 가진다. 빅토리아 여왕이 국왕의 위치를 이렇게 만들었다. 유럽의 많은 왕들이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우둔하게 붙잡고 있다가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렇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통치 권력을 일부 내놓은 대신 전 국민의 지지와 사랑, 수상들의 전폭적인 신뢰, 그리고 영국과 영국 왕실의 안녕, 더불어 자기 자손들의 입지까지도 확고히 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국정에서 짐짓 물러나 있는 듯하나 사실은 정치인과 관료들을 조정하며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난 알렉산더 대왕처럼 빅토리아 여왕은 재위 중 탁월한 수상들을 만났다. 존 러셀, 벤저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글래드스턴, 파머스턴 자작과 같은 수상 열 명은 빅토리아 여왕의 신임에 부응하여 팍스 브리태니카를 건설했고, ‘의원내각제’의 모범 사례를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자유당과 보수당의 양당 의회정치로 정착됐다. 역설적이지만 빅토리아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유능한 군주가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 불릴 만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제왕의 조건을 다음처럼 규정했다.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군주로써 성공하려면 먼저 좋은 법과 좋은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 힘없는 나라는 결코 상대방의 실질적인 협력을 얻어내지 못한다” “정치와 행정, 외교 등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지도자의 3가지 조건인 ▲비루투 Virtu(재능), ▲포르투나 Fortuna(행운), 그리고 ▲네세시타 Necessita(시대의 요구에 필요한 것)를 갖추어야 한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과정에서 무슨 짓을 했든 칭송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빅토리아여왕은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인 ‘국가의 존재이유’와 ‘현실정치론’을 명확히 한 바탕 위에서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지혜롭게 통치한 위대한 리더로 평가된다.

“그녀는 영국 그 자체이다.” 전기 작가 스탠리 웨인트럽의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요약 평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영토 확장에 전력을 쏟았다. 이로 인해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영국에서 해가 지더라도 식민지 어디에서는 해가 떠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20세기 초를 기준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국가는 무려 60개국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을 추정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의 영토는 세계 전 대륙의 4분의 1이었고, 인구는 4억 명에 달했다. 대영 제국이 5대양 6대주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해군력과 함께 산업혁명에 기인한 경제력 덕분이었다. 대영 제국은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앞서 제1차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산업 혁명’이란 용어는 아널드 토인비가 그의 책 《영국의 18세기 산업혁명에 관한 강의, 1894》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18세기에 들어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개량해 대량 생산을 시작하면서 산업 혁명이 출발했다. 증기기관은 선박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크기를 키울 수 있게 함으로써 해양 진출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빅토리아 시대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수반했다. 대표적인 문인들만 보더라도 월터 스코트 경, 바이런 경,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토머스 칼라일, 앨프레드 테니슨, 존 러스킨 등이 배출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겨 스포츠에 관심이 증가되자 여왕 말기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자전거 타기가 유행했으며, 귀족층에서는 폴로 경기 크리켓 테니스 경마 등이 널리 보급되었다. 과학의 발전도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오늘날 영화의 전신인 활동 사진기가 나왔으며, 자동차나 비행기도 심심찮게 국민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수송 수단이 되었다. 1851년 영국이 런던에 유리 수정궁을 짓고 개최한 박람회가 실질적인 '세계박람회'의 효시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시작 시점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영국군이 미국 독립군에 의해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에서 물러난 1781년 이후부터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전까지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유럽의 여러 제국과 각축전을 벌이던 단계였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을 잃고 난 후부터 영국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길을 갔다. 이전까지 영국은 ‘동인도 회사’ ‘허드슨 만 회사’ 등 식민 회사를 통해 해외 식민 사업에 주력했다. 영국의 하류층이 이주한 해외 식민지역을 물리적으로 통치하려 하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대신 영국은 미국 동부 13개 주를 잃고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왕립해군’를 강화했다. 영국왕립해군은 해외 상선들과 자본을 보호하는 막강한 방패막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영국의 해양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1890년대 조선업에서 영국의 비중은 80%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세계 등록선박의 50%가 영국 선박이었다. 1914년 통계에서는 영국 본토와 영국 영토 사이 무역의 90% 이상, 영국 영토와 제3국 사이 무역의 60%, 그리고 제3국과 제3국 사이 무역의 30%가 영국 선박에 의한 것이었다. 세계 해로의 60% 이상을 영국이 장악했다.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영국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110년간 세계 최강이었다. 빅토리아여왕 재위 시 조지 해밀턴 영국 초대 해군장관(재임 1885~1892년)의 1899년 『해군개혁』을 기본책략으로 삼았던 덕분이다. 『해군개혁』은 첫째, 영국의 해군은 세계 순위에서 영국 해군력 다음 순위와 다다음 순위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친 이상의 해군력을 보유할 것, 둘째, 영국은 함선건조를 계속할 것’을 주창했다(출처.《Wikipedia》,Lord George F. Hamilton).

해밀턴 경 외에도 영국의 해군장관 출신의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다. 훗날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도 해군장관 출신의 윈스턴 처칠(수상재임 제1차 1940~1945년 그리고 제2차 1951~1955년)이다.

대영 제국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보다 먼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획득하였으며, 효율적으로 제국을 경영했다. 당시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통치방식은 달랐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방식을 선호했으며, 스페인은 신분제를 이용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 원주민 중 우호 세력을 전면에 세웠다. 원주민 통치자 뒤에서 이들을 지휘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선호했다. 식민지인 중에 우수한 인력을 영국에서 교육시켜 고위 관직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영국군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차 세계 대전과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 때에도 30만 명을 넘지 않았다. 해외주둔 군대는 4만 명에 불과했다. 그 정도만 갖고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현재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과 한국주둔 미군병력 사이의 규모다. 그 비결은 《점령과 지배의 최소화 책략》이다. 영국은 상선 보호를 위해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운하, 포클랜드, 사이프러스, 싱가포르, 홍콩, 케이프타운 등 급소에 작은 해군 주둔지를 조성했지만,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점령과 지배는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이 필요하고, 로마가 망한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과거 일등강국들이 직면했던 공통적인 딜레마는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동안에도 자국의 지위에 대한 외부 도전의 증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많은 자원을 군사력 부문에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생산적인 투자가 위축되어 시간이 갈수록 성장 속도가 떨어졌고 세금이 늘어났으며 지출 우선순위를 둘러싼 국내적 분열이 심해지면서 군사비 부담 능력이 약해졌다”고 갈파한 바 있다.

보어 전쟁은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침몰을 알리는 전쟁이었다.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의 지배계급은 해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햇살을 만끽하며 부를 축적했지만, 해가 들지 않는 곳에 사는 서민들은 가난을 견디지 못해 미국 호주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떠나야 했다. 영국은 보어전쟁의 승리로 남아공을 정복했지만 전 세계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됐다. 보어전쟁의 종군기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던 처칠이 20세기 세계 제2차 전쟁의 영웅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바로 ‘보어전쟁의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이 취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대정책은 《3C정책》이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이집트의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를 연결하는 정책이다. 인도에 이르는 해로확보를 위해 1875년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하여 이집트의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의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으나 서아프리카 식민 지배를 강화하던 프랑스의 횡단정책과 충돌했다. 3C정책은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남진을 꾀하는 러시아의 남진정책과도 충돌하였으며, 뒤이어 근동 진출을 꾀한 독일의 《3B 정책》(3B는 베를린, 비잔틴, 바그다드)과 충돌,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주도했던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 이후 세계는 '격동의 세기' '세계대전의 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1914년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이 발단이 되는 '인류 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영국의 번영에는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고 황금의 시대는 황혼의 시대로 변화해 갔다(출처,《제왕열기》, F.E.A.R. 지음/ 허윤정 번역, 들녘, 2002).

팍스 브리태니카에 대한 영국인의 향수는 역사 속에서 진행형이다. 영국은 대륙 끝에 있는 섬나라이며 항상 해양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1963년 1월 해럴드 맥밀런 당시 영국총리가 추진했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막게 된 이유로 "영국은 섬나라이며 교역과 시장, 식료품 공급을 통해 가장 다양하고 가장 멀리 있는 국가들과 묶여 있다”며 유럽대륙과 영국의 차별성을 지적했다. 역사학자 버논 보그대너는 BBC에서 "영국의 사고방식은, 영국은 명령을 내리지 받는 곳이 아니라는 과거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결합돼 있다”고 진단했다.

섬나라 영국은 역사적으로 유럽대륙의 어느 국가와도 일방적인 동맹관계를 맺지 않았다. 특정 국가가 강해질 때마다 영국은 오히려 그 상대편 국가를 지원하는 세력균형정책을 추구해왔다. 영국외교의 정책용어로 ‘위대한 고립’이다. 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는 영국이 EEC에 가입한지 47년만인 2020년 1월 31일 공식 처리되었다. 국내외 위험상황을 기회로 활용하면서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를 건설했던 영국이 스스로 ‘위대한 고립주의 책략’을 선택했다.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한 영국의 미래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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