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기와 21년째 기싸움, 사기범 입장에서 사건에 접근

[직업의 세계-21] 보험사기조사관 박윤일
보험사기와 21년째 기싸움, 사기범 입장에서 사건에 접근

박윤일(47)씨의 이메일 주소는 ‘콜롬보 박’으로 시작된다. 보험업계에서 오래 전부터 따라다닌 그의 별명이다. 실력은 물론, 형사 콜롬보가 어쩐지 형사 행색답지 않은 것까지 꼭 닮았다. 선하고 순한 웃음이 얼굴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 험지에서 일할 수 있을까. “ 외투를 벗기는 건 태풍이 아니라 태양이잖아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깁니다. ”

실제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험사기클레임 전문가다. 2000년 금융분야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바 있고, 금융감독위원장 표창, 서울대 총장상 등을 수여한 이력이 있다. 보험사기범죄만 쫓은 지 올해로 21년째. 현재 보험 조사 전문회사인 (주)SIS의 조사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 분야의 최고참이다. 지난 세월동안 그가 보험사기범들로부터 지킨 돈을 합치면 몇 백, 몇 천억이 될지, 아예 계산도 안 된다. 조사관들이 없었으면 일사천리로 사기범들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갔을 선량한 보험가입자들의 재산이다. 각종 사고와 재해, 질병을 망라해 보험금 지급에 관한 모든 사안이 박 씨를 비롯한 이들 보험조사관들에 의해 걸러진다.

보험사기범은 꼬리가 꼭 있다

최근에 있었던 얘기를 해보자. 경기도 용인의 한 여성이 목욕탕에서 넘어져 욕조에 코를 부딪쳐 뼈가 부서졌다며 보험금 지급을 청구했다. 지극히 공교롭게도, 서류에 의하면 이 여성은 가입한 당일, 채 몇 시간도 지나지않아 사고를 당했다. 의심이 갈 만한, 전형적인 보험사기범죄의 유형 중 하나였다.

의구심을 갖게 된 박 씨, 당사자의 집을 찾아가 욕조며 목욕탕 등 현장의 사진을 찍고 확인하면서 점점 더 의심이 짙어졌다. 누구든 넘어지면 반사적으로 손으로 바닥을 짚기 마련. 그 상황에서 아무리 욕조에 코를 찧더라도 코뼈가 부러질 정도의 사고가 나기란 쉽지 않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콜롬보 박, 갑자기 엉뚱하게도 일대의 병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일이 찾아 다니며 ‘얼마 전 아무개가 코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가’를 확인했다.

얼마 뒤 보험사에 신고된 사고 발생 시점과는 달리 가입자가 이미 3일 전에 코뼈 수술을 받고 간 기록이 한 정형외과에서 튀어나왔다. 다친 이유도 폭행때문이라는 사실이 당시 의사의 진료,상담 기록에 나와있었다. 이 증거들을 내밀자, 그 여성은 비로소 사실을 실토하고 물러섰다.

“ 답이 막힐 땐 항상 내가 만약 사기범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 과정을 거꾸로 추적해 뒤져보면, 실제 사기인 경우 어디선가 꼬리가 잡히거든요. 이 사람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서 증거를 잡아야 하나, 항상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보험사기범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레파토리는 ‘허리 디스크’. 정확히 ‘추간판탈출증’이라 불리는 질환이다. 마음먹고 속이려 들면 이처럼 편리한 메뉴가 없다. X레이 촬영때 고의적으로 자세를 뒤틀어 찍기만 해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굽히기’등의 진단검사도 무조건 ‘안 굽혀진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심지어 의학계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환과 혼동돼 오진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보고가 나와있다. 현대의학조차도 속는 판에 의사도 아닌 조사관들이 ‘꾀병’의 물증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척추관련 사기범 “꼼짝마”

박 씨의 특기가 바로 여기에서 빛난다. 그는 고려대 의료법학연구과정을 수료한 것을 비롯해 보험업계 내에서는 준 척추장애 전문가로 통한다. 기본적인 의학상식은 물론, 진단서를 발부한 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철저하게 환자의 진료기록을 점검, 일단 의심점이 잡히면 증거를 찾는데 빈틈이 없다.

당사자의 집이나 사고현장, 병원기록 확인은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집 주변의 골목을 돌아다니며 구멍가게나 이웃들을 통해 탐문조사를 벌인다. 필요한 경우 잠복근무도 수시로 벌인다.

등산 중 추락했다며 하반신 마비환자로 위장한 사기범의 덜미를 잡은 기억은 지금도 실소를 자아낸다. 청구된 보험금이 5억원 대. 특히 지명도 높은 모 유명병원의 진단서까지 제출한 터라 웬만하면 무사통과 될 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문제의 사기범이 가입해있던 여러 타 보험사들 중 상당수가 이미 별 이의없이 거액의 보험금을 지급한 상태였다. 박 씨를 만나기 전까지의 행운이었다.

“ 이따금 병원에서 외출할 때 무비카메라를 들고 한번 미행을 해봤어요. 평소처럼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어렵게 승합차로 옮겨 타더니 얼마 뒤 한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으로 차가 들어가더라구요. 그런데 잠시 후 나오는데 보니까 조금 전까지 하반신을 못쓰던 사람이 휠체어를 손에 든 채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거예요(웃음). 다 속은거죠. 카메라로 모두 촬영이 돼서, 결국 보험금이 취소됐어요. ”

이 무비카메라 추적법은 박 씨가 처음으로 시도한 묘안이었다. 현재는 보험조사관들에게 널리 애용되는 기법 중 하나다. 내친 김에 박 씨의 노하우 하나 더. “ 디스크 환자의 경우, 집이 방배동이라 치면 미리 그 주변에 잠복해 지켜보면서 당사자에게 전화를 겁니다.

‘지금 서초동에 있는데 잠깐 뵈었으면 좋겠다’구요. 그리고 얼마 뒤 상대가 집에서 나와 걸어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진실 여부를 알 수 있죠. 더 확실히 알고 싶을 땐 그 집 앞에 천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놔 보기도 합니다. 허리를 전혀 굽힐 수 없어 세수도 힘들다던 사람이 아주 자연스레 돈을 집어드는 것이 촬영돼 가짜 환자인게 밝혀진 경우도 있지요. 다소 치사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치밀하지 않으면 현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보험금은 결코 눈먼 돈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때로 불편한 시선을 받을 때도 있다. “ 보험금을 안 주려고 갖은 수를 다 쓴다”는 식의 오해다. 심각한 경제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보험사의 돈은 ‘눈 먼 돈’’먼저 먹는게 임자’라는 의식이 온 사회에 퍼져있는 탓이 크다.

선량한 시민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자긍심의 박 씨를 가장 한숨나게 하는 부분이다. “ 이 일은 단지 재벌기업의 재정을 지켜주는 차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사회 정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엉뚱한 사기꾼들에게 땀 흘려 번 돈으로 꼬박꼬박 정직하게 보험료를 낸 다른 가입자들이 희생을 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박 씨는 단국대 법학과를 졸업, 82년 삼성생명 법률조사팀으로 첫 걸음을 시작했다. 일은 처음부터 그에게 흥미롭고 즐거웠다. 과거 법전으로 익혔던 지식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하나하나 확인해나가는, 살아있는 공부였다.

그렇지않아도 타고난 학구파 기질인데다, 부지런히 현장을 뛰는 한편 관련 법조항이며 판례, 의료지식 등 가능한 한 다양한 자료들을 탐독하며 조금씩 노하우를 쌓아나갔다. 동료나 선후배들까지도 문제가 막힐 때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박 씨였다.

입사 1년 후면 관례처럼 실시하는 영업부서 순환발령 때 박 씨는 이례적으로 제외됐다. ‘ 이 부서엔 당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회사의 뜻이었다. 6년 뒤 미국계 생명보험사인 라이나로 옮긴 그는 이곳에서 14년간 근무, 2002년 현재의 회사로 적을 옮겼다.

총ㆍ칼로 협박 당하는 일도

성과도 많았지만, 이면엔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한 건에 최소한 몇 천만원, 많으면 억대의 거액이 걸린 일. 사기범에 동조한 외부의 압력은 물론 사기범에게 ‘인생을 똑바로 살라’고 한마디 했다가 그 말이 명예훼손이라며 되려 고소를 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차마 글로 옮기기도 끔찍한 폭언의 협박은 물론, 직접 칼이나 총을 들고 찾아와 들이대는 경우도 있었다.

5년 전, 본인은 물론, 동생, 동서 등 무려 30여명에 이르는 가족과 친지를 동원해 보험사들로부터 10억여원의 보험금을 타냈던 한 사기범은 타 보험사 때와는 달리 유독 박 씨에게서만 제동이 걸려 돈을 받지 못하자 험상궂은 폭력배를 대동하고 나타나 재크나이프를 번뜩였다.

“ 솔직히 저도 그럴 땐 겁이 나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법조계나 경찰 등에서 일하고 있는 제 친구들을 떠올려보곤 했어요. 그들도 지금의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일할 텐데, 만약 협박이 무서워서 소신을 저버린다면 과연 그 일이 제대로 될까. 그 생각으로 저도 버텼어요.”

박 씨는 매일 아침 8시면 출근, 보고서를 쓸 때를 빼고는 거의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없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현장을 찾아 종일을 바깥에서 보낸다. 평소 신문 사회면의 사건사고 기사만 봐도 덤덤히 지나치지 못한다. 이유가 뭘까, 어디서 어떤 식으로 범행이 이뤄졌을까, 머리 속에 온갖 추리가 꿈틀댄다. 보험범죄연구 이십여년에 따라붙은 직업병이다.

수사권이 없어 오로지 ‘협조’와 ‘동의’하에서만 뛸 수 있는 고독한 신분.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4년 전 교통사고로 가입자가 사망, 몇 년간의 소송 뒤 결국 유족이 80억원대의 보험금을 받아 낸 사건이 있다. 타 보험사의 사례이긴 하지만, 보험업계 전체의 논란이 되었던 문제였다.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가입자의 직업은 그 자신이 보험의 생리를 잘 알고 있을 금융회사 직원, 더구나 사고 얼마 전 자발적으로 보험사들을 찾아다니며 집중적으로 가입을 한 점이나, 본인의 봉급이 월 200만원에 불과한 반면 매달 납입할 보험료가 월 500만원 선에 이르는 등 보험사기범죄의 특징을 정석처럼 총망라한 케이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보험사가 패소하고 말았다.

“솔직히 저는 지금도 가입자 본인이 정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험범죄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이 아주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절대 자기 목숨을 희생할 만큼 헌신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 때도 주로 가족들을 범행대상으로 삼는 등 범죄 중에서도 가장 비윤리적이고 패륜에 가까운 범죄입니다. 이 때문에라도 보험사만의 문제로 방관할 것이 아니라 온 사회가 관심을 갖고 풀어나가야 합니다. ”

보험법률조사연구소 설립이 꿈

그의 꿈은 언젠가 보험법률조사연구소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예비해 요즘도 부지런히 자료를 비축해나가고 있다. 갈수록 돈 앞에 무력해지는 현대인의 뒤틀린 비극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보험사기조사관.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늘만 찾아드는 것도 아니다.

“ 정말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족들에게 많은 보험금을 지급해드릴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어떤 분은 큰 절까지 하고 가세요. 이래서 보험이 필요한거구나 저까지 뭉클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분들을 위해서라도 ‘천사의 치마폭에 숨은 악마’, 사기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정영주


입력시간 : 2004-01-02 16:45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