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가치를 일깨워줘야" 제1회 대한민국 철학의 날 개최, 철학의 위기에 경종

[한국 초대석] 철학교육연구회 손동현 교수
"사유의 가치를 일깨워줘야" 제1회 대한민국 철학의 날 개최, 철학의 위기에 경종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버릇을 키워야 해요.” 철학교육연구회 손동현 회장(57ㆍ성균관대 철학과)은 사유(思惟) 없는 요즘 세대는 자유(自由)를 포기했다고 본다. “아직도 철학이라면 미아리 점 집을 연상하기 일쑤죠. 또 자식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면 결사 반대하는 분위기이니.” 사이버 문명이 판치는 현재는 더 하다.

21세기. 가상 현실이다, 매트릭스다, 끝 모르고 나아가는 과학 기술력은 인간만의 특질인생각하기를 말살시키기에 족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400년 전 데카르트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의 이성을 만개시키는 것 같더니, 마침내 그 종언을 선고한 듯한 형국이다.

그 같은 상황에서 뜻밖의 흥겨운 사유 마당이 펼쳐졌다. 2003년 11월 22일 이화여대 학관에서 열렸던 ‘제 1회 대한민국 철학의 날’은 우리 시대에 띄우는 계고장 같은 것이었다. 무거운 제목이었지만, 중ㆍ고생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참여해 모두 500여명이 함께 했던 것은 갈수록 발표와 논리력을 중시하는 교육 환경의 영향을 반영하는 대목이었다. 당신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하겠는가?

‘폴란드전과 포르투갈전에서 우리가 이긴 것은 거리 응원 덕이었으나, 미국전에서는 거리 응원이 부족해서 비겼다는 생각에 동의 하는가?’ ‘동화 ‘파랑새’에 나오는 파랑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일까?‘ 앞의 문제는 초중고생에게 주어진 논리적 사고에 관한 문제였고, 뒤엣것은 비판적 사고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은 표현과 이해 영역에 관한 문제다. 평등하게 대우받을 인간의 권리와 교육의 기회 균등, 부의 고른 분배가 정의로운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조목조목 따져가며 답을 끌어내는 어린 학생들의 실력은 웬만한 어른을 뺨친다.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보다 깊이 있다. ‘자살, 정당화될 수 있나?’, ‘과학 기술 문명, 행복의 길인가?’, ‘소크라테스의 죽음, 정당한가?’, ‘서양 철학, 한국 철학이 될 수 있는가?’ 등. 웬만한 기성인도 선뜻 답하기 힘든 문제다. 관련된 자투리 지식이야 인터넷에 주제 검색어 몇 자 쳐 넣으면 줄줄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정보를 선별하고 가치에 따라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인 것.

전문 소양을 갖춘 사회자들의 재치 있는 진행에 심사위원 교수가 두 명씩 들어 가 전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대학생 토론자에 대해 점수를 매겼다. 팀별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는 16개팀-8개팀-4개팀-2개팀 등으로 수를 줄여 가며 주장의 정합성을 따졌다. 이날 대회에서 명증한 논리로 호평 받은 참석자와 심도 있고 부드럽게 논의를 이끌어 간 사회자에게는 한국 유네스코 등의 지원으로 소정의 상금이 주어졌다.

사유와 풍류가 어우러진 잔치

15,000원의 참가비로 대회에 참석한 토로자들은 뒷풀이인 철학인 한마당에서 콘서트도 즐겼다. 인기 록 가수 신해철,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한 록 가수 정시로 등의 폭발적 음악에 고즈넉한 색소폰 연주가 따랐다. 연세대 동양 철학과 유인희 교수가 연주한 고 김광석 등의 록 음악이었다. 밤 10시에 모두 끝난 이 행사는 사유와 풍류가 함께 어우러져 사이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새로운 사유의 잔치로 또 다른 내년을 기약했다.

이화여대 철학과 이지애 교수가 행사 장소 마련 등 실무적 차원에서 애를 썼던 이 한국 초유의 행사는 손 교수에게 감회 깊은 것이었다. “이화여대가 아침부터 ‘자갈자갈’했어요.” 조용한 캠퍼스에 초등학생이 150여명 몰려 들었으니 당연지사. 그를 비롯한 주최자들 모두가 예기치 못 했던 일이었다. “아이들을 영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부작용이 있겠지만, 차근차근 따지고 들어 간다는 것은 이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아이들이 말싸움에서 안 지게 만들려는 요즘 부모들의 심정이 그대로 읽힌다”며 영악해져 가는 세태에 일침을 놓았다. 아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왔다.

초등학생들은 토론이 아니라 필기 시험 형식으로 대회를 치렀다. 하여간 대회 후 주최측은 “이 다음부터 철학회를 개최하면 초등학생들을 꼭 罐@汶구?우스개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철학교육연구회 등 관련 단체가 앞으로는 교육청 등 관련 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벼르는 이유다. 그러나 그날의 꽃은 국제 철학 올림피아드에 출전을 희망한 학생들이었다. 민족사관고, 대원ㆍ대일 외국어고 등 특목고 학생 80여명이 그들이다. 외국어(영어 95%,. 독어 5%)로 답안을 써 냈다. “일반 학생들보다 사고에 깊이가 있더군요.”

토론교육의 필요성 절감

그러나 그는 “병역 거부나 자살 등 충분히 공감이 갈 법한 주제였는데도, 대학생 토론자들이 보여 준 모습은 다소 실망스러웠다”며 인터넷 등 의 영향으로 감각적인 언어에 매몰돼 가는 청년들을 걱정했다. “토론 능력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못 따라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상대를 공격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조리를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즉흥적 언어만 쏟아 놓는 그들 세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토론 교육이라는 생각이 저로 들었죠.”

국내 초유의 이 행사는 세계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외국어 구사력이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행사일인 11월 22일은 유네스코가 철학의 날로 정한 날로, `국제 철학 올림피아드(International Philosophy OlympiadㆍIPO)’로 정례화돼 있다. 1988년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의 제의로 시작돼 1990년도 들어서는 국제적 규모의 연례 행사로 현대 지성사의 독특한 풍경으로 자리잡은 ‘사유(思惟)의 콘테스트’다. 매년 5월 회원 국가에서 각각 한두명씩의 학생을 선발, 파견해 4시간안에 장문의 답안을 완성하는 시합이다. 지금껏 출제됐던 문제(더 정확히는 화두)를 보면 이 대회의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은 골동품이다’(바슐라르의 말-1993년 불가리아), ‘언어의 제한성은 곧 세계의 제한성이다’(비트겐슈타인의 말-1996년 터키), ‘모듬 인간은 태생적으로 지식을 갈구한다’(아리스트텔레스의 말-200년 독일),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라면 선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하다’(루소의 말-2001년 미국), ‘정의와 인간의 변증법적 조건’(2002년 일본 대회에서의 문제) 등이 출제돼 인간만이 내릴 수 있는 정답을 요구했다.

인간답게, 생각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도 흥미 있는 사유거리를 제공하는 자리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카페가 철학 논의의 장이 되는 프랑스를 모델로 해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럽 지성의 풍경을 되돌아 보게 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그것은 동시에, 지금 한국은 지나치게 미국의 모델만을 좇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 21세기, 지구촌을 닦달하고 있는 세계화란 문제에 대해서도. 이번의 첫 행사는 5월 서울에서 개최될 IPO 한국 예선 출전자를 가리는 것이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 철학의 역할 중요

이 대회가 빛을 보기까지는, 책상머리에서 연구와 집필에만 익숙하던 철학과 교수들의 행동이 선행돼야 했다. “생쑈 했던 셈이지요.” 2000년 여름, 철학 교수들끼리 모임을 갖고 철학이 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으로 철학자들이 가졌던 첫 가두 시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학회를 가진 후, 금화터널-사직공원 코스로 벌였던 행진이었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없이 치러졌던 이날 행사는 1년 뒤,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에서의 번듯한 무대 ‘도덕성 장례식’으로 이어졌다. 한신대 철학과 김광수 교수의 희곡 ‘돈조아’에 의거한 무대에 손 교수는 ‘박정치’란 정상배로 출연하는 등 적극 참가했다. “교육부 관리들이 서울대 사대 인맥에 휘둘려 아무 것도 제대로 못 하는 현실을 비꼰거였죠.” 이 같은 일련의 행위가 단행본 ‘중등 도덕 교육의 현실과 문제’로 집약됐다(2003ㆍ집문당 刊).

여기까지가 ‘제 1회 철학의 날’의 전사(前史)다. 다른 말로는, 3년째 철학교육연구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데 대한 그의 내력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우리 교육 현장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즉, 입시에 의해 뒷전으로 내몰렸던 철학이 논술 고사라는 예기치 못 한 계기를 만나 부각되는 상황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점수를 따기 위한 논술이었으므로 사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현실적으로는 철학과 대학원생들이 전공은 제쳐 두고 논술 시험에 주목한 입시학원에 가서 생계를 잇는 현상을 지켜 보는 손 교수 등의 위기 의식이 한몫 단단히 했던 셈이다.

더욱이 현재 지구를 사로잡고 있는 세계화란 문제에서, 철학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손 교수는 “철학자는 인류가 지녀야 할 보편적 가치를 공유求?것으로, 정치ㆍ경제학자들은 미제국주의의 확산으로 세계화를 본다”며 국내 학계에 따라 상이한 의미에 대해 먼저 환기를 요청했다. 세계화란 말이 필연적으로 이중성을 내포하지만, 정보 통신의 발달과 시장의 통합에 의해 보편의 가치가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도외시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인류라는 종(種)이 하나의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바람직한 과정이죠. 현실적으로 그렇게 돼 가고 있잖아요?” 가깝게는 혈연ㆍ지연의 고리를 벗어나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그 증거라는 것. 그는 세계화를 단계와 정도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눈다. “맨 먼저 경제 생활에서의 보편화가 이뤄지죠. 산업ㆍ기술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학문까지도 보편화돼요.” 그러나 세계화에 저항하는 몸짓은 엄존한다. “그 다음, 정치 제도나 사회적 기구 등에서 어느 정도 세계화가 이뤄진다고 보죠. 그러나 세계화가 침투하지 못 하는 부분이 있어요.” 가족ㆍ언어ㆍ전통ㆍ관습 등의 수준에 세계화란 것이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예술ㆍ종교의 차원에서 세계화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는 확언이다. 이와 함께, 경제 질서를 미국식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손 교수는 “초ㆍ중ㆍ고는 홍보 작업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다”며 “앞으로 교육청에 협조 공문을 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본격 토론 대회 전에 여름방학때 지방별로 워크숍을 개최하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송석헌(松石軒). 같은 대학 유학과 서경요 교수가 써 준 글이 높다랗게 내걸려, 겨울의 연구실을 맑게 비추고 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1-09 14:18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