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가 '업'인 허가받은 스파이경제사회의 필수영역된 마케팅 조사, 갈수록 전문화·세분화

[직업의 세계-22] 마케팅조사연구원 장현중
조사가 '업'인 허가받은 스파이
경제사회의 필수영역된 마케팅 조사, 갈수록 전문화·세분화


마케팅조사연구원 장현중(37)씨의 인생은 보고서로 시작돼 보고서로 끝난다. 제안서, 조사보고서 등을 합쳐 한달 평균 작성량이 최소 대 여섯 편. 한번에 약 50페이지에 이르는 빽빽한 보고서를 매주 한 두 편씩 만들어내며 산다. 프로젝트가 동시 다발로 몰려드는 상황이면 뇌가 서 너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날마다 일필휘지로 풀리면 오죽 좋으랴. ‘답’이 빨리 풀리지 않을 때면 종일 머리를 앓는다. “잘 안 써질 때는 정말 고통스러워요. 어떨 땐 시간만 더 있으면 더 잘 만들텐데도 워낙 일이 한꺼번에 몰려 할 수 없이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는 참 속 상하고 아쉬워요.”

혼자 쓸 수 있는 보고서도 아니다. 현장의 설문 조사와 전산화 작업 등 기본 작업을 거쳐 보고서 한 편을 작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한달 반. 기획과 지휘, 정리는 본인이 하지만, 현장과 보조 진행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씨는 현대리서치연구소 마케팅조사연구팀 부장을 맡고 있다. 올해로 경력 11년차를 맞는 베테랑이다. 마케팅 조사는 갈수록 전문, 세분화된 현대 경제사회가 낳은 또 하나의 전문영역이다. 의뢰받는 조사대상도 갈수록 다양해진다. 식품이나 자동차, 의약품, 이동통신상품 등 소모 주기가 빠른 소비재가 주류를 이루지만 굳이 이것이 아니라도 고객이 원하는 무엇이든 마케팅에 관한 한 비윤리적인 것만 아니면 모든 대상을 다룬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언지하에 사양이다. “기술적인 기밀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상대기업의 매출이나 설비, 인력 등 경쟁사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달라는 등의 의뢰를 받을 때도 있어요. 산업스파이나 다름없는 일이라서 그런 건 거절하지요.”

산업스파이 일 빼곤 다 조사

가장 흔한 유형은 의뢰 기업에서 자사의 특정 제품이 시장에서 현재 제대로 판매되고 있는지 실태를 조사, 분석해달라는 것. 음료나 과자 등 신상품에 대한 반응을 미리 알아보거나 브랜드의 이미지를 점검하는 조사도 적지 않다.

업무의 첫 단계는 제안서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날 해당 기업이 마케팅 조사업체 실무자들을 불러모아 자신들이 원하는 조사의 내용과 목적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공개경쟁 형식으로 제안서를 공모한다. 급할 땐 얘기를 꺼낸 지 사흘 만에 제안서를 제출하라고 주문하는 기업도 있다.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사흘밤을 새야된다는 소리다.

신문과 인터넷 등 관련 정보를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뒤져 기본자료를 파악한 뒤, 속전속결로 조사 기획안을 만든다. 며칠 뒤 의뢰기업으로 들어서는 조사 연구원의 손에는 두툼한 제안서가 들려져 있다. 이미 그 안에는 시장조사 방법과 설문내용 등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반드시 채택된다는 보장도 없는, 어찌보면 무모한 전력투구다.

실제로 제안서 10건에 2,3건 성공시키면 다행이다. 10번 중 평균 7,8번은 탈락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업체라도 예 닐곱 번은 보통 미끌어진다. 아무리 각오한 바라 해도, 며칠 낮밤을 매달려 만들어 간 제안서가 헛수고로 돌아갈 때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허탈하고 속상할 수 밖에 없지요. 요즘은 달라졌지만, 옛날엔 그 때문에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았어요.”

제안서가 선정되면 선정된 대로 더 바쁘고 예민해진다. 계약 후 수시로 의뢰기업과 협의를 하며 기업이 원하는 바를 빨리, 정확하게 스스로 읽어내야 한다. 마케팅 조사는 단지 판매 량만이 아니라 제품 전략에서부터 유통, 가격, 프로모션 전?등등 마케팅 현황에 대한 전반을 점검하고 분석하는 작업이다. 조사의 핵심은 특히 설문조사에 있다.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확인하는가에 따라 조사의 결과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설문내용이 치밀할수록 조사 결과도 정교해진다. 예를 들면, 음료의 경우 맛에서부터 포장, 상품명, 용량, 용량 대비 가격 등 최대한 꼼꼼하고 철저하게 체크한다. 설문내용이 완성되면 고민의 절반은 끝난 셈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현장에 면접원들이 투입된다. 거리든, 가정 방문이든 일대일의 인터뷰를 통해 실태파악이 이뤄진다. 이러한 일만 전담하는 프리랜서 형식의 면접원들이 수 백 명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변비라든?개인 소득수준 같은, 사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조사하기가 가장 어려워요. 그래도 면접원들 가운데엔 탁월한 전문가들도 있어요. 언젠가 발기부전 환자들을 찾아 심층 조사를 해야하는 일이 있었는데, 같은 남자 면접원이라도 쉽지 않은 일을 여성 면접원이 일을 성공시켰더라구요.”

중요한 사안이거나 그 외 필요한 경우 연구원들이 직접 현장을 뛰는 경우도 있다. 마케팅 조사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예전보다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문전박대의 낭패는 여전히 도처에서 나타난다. 장씨 역시 씁쓸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무리 공손히 이야기를 건네도 설문지를 받자마자 보란 듯이 찢어버리는 사람, 언젠가는 책 외판원으로 오해를 받아 당사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 아파트 관리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다. 부동산 관련 조사차 찾아간 부동산 중개업소에서는 아예 가게 안에 들어서보지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직접 해당상품을 사용해 보는 경우도 있다. 한때 담배 관련 조사프로젝트에 투입됐던 동료 여성 연구원은 직접 담배를 피워보며 제품을 조사하는 열의까지 보였다. 장씨에게는 더 남다른 경험도 있다. 여성 생리대 제품을 맡았던 때다. “생리대를 박스째 샀더니 매장의 직원이 이상하게 쳐다보다더라구요. 그리고는 착용감 등을 알아보기 위해 제 자신이 하루종일 직접 착용하고 다녀보기도 했어요. 집 사람이요? 집에는 전혀 말하지 않았지요.(웃음) ”

기업매출 오를 땐 큰 보람

마케팅 조사의 묘미 중 하나는 사전의 예측이 뒤집어질 때다. 한때 모 아파트의 TV광고 효과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한 여성탤런트가 전면유리창 앞에서 주위 마천루를 배경으로 런닝머신을 달리는 광고였는데, 기업측에서는 ‘커리어우먼의 자기관리까지 도와주는 아파트’라는 개념으로 제작한 이 광고가 제대로 먹혀들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런데 조사결과, 전연 엉뚱한 답이 발견됐다. 그 광고를 본 시청자들은 ‘실내에서 뛰어도 방음이 잘 되나보다!’라고 생각한 것. 결국 이 결과에 따라 광고사측에서 광고의 컨셉을 바꾸었다.

“힘들여 작업을 진행한 뒤, 저희 조사 결과를 반영한 덕에 기업의 매출이 많이 올랐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뿌듯합니다. 그럴 때 일에 대한 긍지를 느낍니다.” 장씨는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 93년 모 대기업의 제약사업부 마케팅영업분야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모 외국계 조사전문기업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마케팅조사연구원 생활을 맞았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게 내 길이구나 싶을 만큼 적성에 잘 맞고 재미있었어요. 현장과 함께 아주 다양한 분야를 고루 접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일의 매력이지요. “

마케팅 조사업계는 특히 연구원들의 유동성이 높다. 한 회사에 머무르는 기간이 평균 3년. 인기있는 연구원일수록 이력서가 빽빽하다. 자기 발전과 자극을 위해 조사업체 사이를 옮겨다니는 베테랑도 많고, 기업체 소속 마케터로 채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조사업계는 ‘마케터 양성소’로 불리기도 한다. 장씨만 해도 메이저급 조사업체에서 출발해 스카웃과 스카웃으로 건너뛰어 다닌 지 벌써 네 번째 자리다.

그가 출발하던 90년대 초반만 떠올려봐도 마케팅 조사업계는 현재 상당히 변모한 상태다. 처음엔 ‘조사가 왜 필요해?’, ‘조사 한번 하는데 뭐 그리 비싸?’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듯 황량한 시장이 이제는 영세업체까지 합치면 수백명의 마케팅 조사연구원들이 전국을 누빌 만큼 성장했다.

강도 높은 정신노동에다 때로는 현장의 허드렛 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항상 바쁜 것은 아니다. 매년 2,3월과 7,8월은 이 분야의 비수기. 게다가 아주 오래 전부터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어 왔다. 한가할 때면, 1년에 몇 번씩은 공무원처럼 정시에 출,퇴근하는 ‘꿈 같은 날’들도 누린다. 물론, 일이 밀릴 땐 주말도, 휴일도 없다.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가장 큰 고통

그도 한때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무감각해질 만큼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에 치여 갈등을 느낀 때가 있다. 이따금 불손하고 까다로운 고객 등쌀에 인간적으로 심?모멸감을 느낄 때, 그만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이 일을 하자면 누구든 넘어야 할 산이다. “다른 직장도 그렇겠지만, 특히 이 분야는 상대 기업뿐 아니라 현장 조사 때 일반인들을 상대하면서 겪는 고충 등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아요. 심지어, 단지 조사업체라는 관계 때문에 40대의 이사급 임원이 상대 기업의 20대의 새파란 직원으로부터 함부로 사람들 앞에서 삿대질까지 당하며 모욕을 당한 일도 있어요. 결국 그 기업과 업무관계를 끊기는 했지만, 참 씁쓸하지요.”

내내 일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사무실 밖에서도 은연중 ‘표본’이니 ‘샘플링’이니 하는 특유의 용어를 쓰다가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구박을 받기도 한다. 집에서 TV채널을 돌리다가도 낯선 광고만 봤다 하면 가족의 원성도 불사하고 기어이 되돌려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채널을 놓아준다. 일상에서도 조금만 답이 막히면 무조건 ‘조사해보자!’를 외치기 일쑤. 매사 말보다 조사가 앞선다.

그에게도 또 한 해가 밝았다. 앞으로 금융, 통신분야의 전문 조사연구원으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장씨. 시간과 경험이 더 쌓인 뒤 마케팅 조사연구원 겸 컨설턴트가 되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다. 시장 조사와 분석, 전략 파악에는 이력이 나 있을 그의 자기 미래 분석 결과이니 별 오차가 없을 것 같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1-09 15:31


정영주 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