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에 대한 과학적 접근 필요"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추진, 보수진영 반발에 "이미 예견" 의연

[한국 초대석] 연세대 오세철 교수
"맑시즘에 대한 과학적 접근 필요"
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추진, 보수진영 반발에 "이미 예견" 의연


연세대 경영학과 오세철(60) 교수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불확실성의 시대, 마지막 안전판으로 직장에 조금이라도 적을 얹어 두려는 요즘 세태를 거슬렀다. 선생의 표현에 다르면 “5년 남고 34년 봉직은 기록”인데도, 그는 명예 퇴직을 결행했다.

그의 뚝심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 더 하는 말이 있다. “오세철은 꼴통이다.”

삼팔선이다, 오륙도다 하는 말이 멀쩡한 사람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버젓이 횡행하는 팍팍한 세상이다. IMF 외한 위기 이후 빈부격차는 날로 첨예해 져 지금은 이른바 8020 사회다. 우리 사회의 8할은 못 가진 자들이라는 시쳇말이다. 4월 총선은 그 심판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 아래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을 길러낼 ‘사회과학대학원’이라니.

”좌파, 춥고 배고프죠. 지금 상태라면 앞으로 더 고달파 질 가능성이 높아요.” 겨울이 희끗희끗 내려 앉은 연세대 교정의 경영학과 건물에 자리 잡은 연구실의 곰팡내 풍기는 낡은 책들은 선생의 말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내고 있었다. 이른바 이념 서적이 즐비한 그의 연구실 풍경은 교수라기 보다는 현장 이론가의 처소라 해야 어울릴 법 하다. .

2003년 9월부터 여러 차례 비공식 논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 바로 그 ‘ 꼴통’ 행위의 절정이었다. “ 이화여대 교육학과 이규환 명예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김진균 교수 등 학자 10여명과 종교계 지도자 등이 힘을 보탰어요.” 문정현(가톨릭), 홍근우(개신교), 진관(불교) 등 강단 있는 행동으로 우리 사회에 발언해 왔던 지도적 인사들이 동참했던 것은 물론, 소장파 학자 20여명도 뜻을 함께 해 왔다. 외국에서 진보적 입장의 학문을 연마해 귀국해 보니, 학문적 성향을 빌미로 제도권 교단에서 밀려난 학자들이다. 이들 모두가 함께 꾸려 오던 '진보적 지성과 양심의 소리'가 따지고 보면 시발점이다.

우리 시대의 대안을 위하여

2003년 11월 이화여대에서 3일 동안 펼쳤던 '맑스 코뮤날레'는 하판 해원굿 마당이었다.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 등 쟁점 토론회는 물론, 도서전과 그림전 등 관련 행사가 여러 언론의 높은 관심속에서 펼쳐졌던 일이 엊그제 같다. 지금 사회과학대학원은 3월중으로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4월부터 대중적 운동에 들어 간다는 계획이다. “공동토론회 등을 거쳐 빠르면 2005년 9월 대학원을 설립한다는 구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안적 대학원 만들기다. 선생의 초안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혁파하는 혁신적 교과 과정을 수립한다는 것이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 있다. 교수ㆍ학생ㆍ변혁 운동 진영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해 간다는 목표가 설정돼 있다. 이것은 갈수록 집단이기주의가 득세해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인식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하다. 예상했던 바, 딴죽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보수 언론들은 십자포화로 응수했다. 체제 논쟁과 이념 갈등이라는 이미 퇴색한 문제들을 끄집어 내 긁어 부스럼 내자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마르크스의 부활을 꿈꾸는가'라는 제하의 12월 30일자 조선일보 칼럼이 대표적이다. 박용성 대한상의 의장이 펼친 그 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계산해 둔 바였다. 이에 대해 선생은 말한다. “만의 하나, 인허가를 안 내줘도 좋다. 학교를 만드는 것 자체가 운동이다. 그 과정 자체가 투쟁 아닌가.” 역전의 노장다운 이력이 언뜻 비친다.

“ 뭔많萱?살아 있는데, 빨갱이 양성소를 공식적으로 만들자는 거냐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마르크시趾?대해 과학적 접근을 할 때가 됐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는 설명이다. 충북대 서관모 교수 등을 상대로 제기됐던 일련의 이적표현물 금지 위반 관련 재판들이 무죄로 결정된 사실은 이제 우리 사회도 성숙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는 것.

그럼에도 앞서의 시론과 같은 견해는 엄존함을 잘 안다. 그런 식으로 “걸려면 걸릴 수도 있다”는 현실이다. 선생은 "세상에 진보적 학문이 대학에서 연구되지 않는 나라는 극소수"라며 “한국의 상황은 이래저래 극히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욕이나 당위론만 가지고도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당장 현실적으로 김진균 교수 등 대부분의 1세대 연구자들은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하려는 학생도 현격히 줄어 들었다. 이 같은 현실은 마르크시즘으로 대변되는 진보적 학문과 현재 한국 사회의 위상을 웅변해 준다.

“ 우리 시대에 들어 마르크시즘은 인간 해방의 학문으로서 더 더욱 소중해 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구조적 모순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유일의 실천적 학문입니다." 인간 해방을 이야기하는 선생의 안광은 더욱 예리하다.

신자유주의의 위선을 공격하라

“ 이제 신자유주의하의 자본주의는 공황이나 과학기술 혁명 같은 전통적 자기 쇄신운동만으로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는 단계에 왔어요.” 자본주의는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전쟁입니다. 궤멸적 파괴, 그리고 군수 산업을 수단으로 이뤄지는 부흥이라는 프로세스만이 유효해 진 체제죠.”그는 “이 같은 야만의 시대에 봉착하고만 자본주의의 부끄러움을 규명할 수 있는 건 마르크시즘뿐"이라고 확언한다.그 밖의 갖가지 부르주아 이론들은 현상황을 낱개로 분절화시켜 총체성을 흐릴 뿐이라는 지적이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새로운 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역시 마르크시즘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좌우 대립의 긴장이 깨지고 난 뒤의 체제인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한경쟁과 사유화의 길 뿐"이라며 "종래 자본주의가 쌓아 왔던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파괴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라크 반전 운동이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의 본질은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된 빈부 격차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파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젊은 학생들이 마르크시즘을 파고 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존하는 현실이다. 선생의 말. "마르크시즘을 제대로 공부하던 사람들은 1970년대말~1987학번(6월항쟁 당시의 대학생)까지죠. 이땅에서는 90년대 이후로는 완전히 단절됐다고 봅니다." 현실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래로 변절, 포스트 마르크시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등 포스트 담론으로 학문 풍토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 “ 아무리 모가지

잡고 당겨도 안 오는 데 어떡합니까? 취직이 안 된다며.” 그 같은 상황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위기감으로 이어졌다는 것.

“내가 깃대를 짊어질 사람으로 낙착된 거죠.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만 있었다, 이래 갖고서는 역사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데 동료 연구자들이 인식을 함께 한 결과이기도 하구요." 한국의 마르크시즘 연구는 그 동안 수공업적ㆍ종파적이어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감당해 낼 수 없다는 반성이다. “학자들의 친소 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활용돼 온 면도 있습니다. 자위 행위로 치닫게 될 지도 모를 국내 마르크시즘 연구는 이제 대공업적 재생산구조에로의 변화를 요구 받고 있어요.”

늦깎이는 변하지 않는다

연세대 상학과 61학번으로 서류상으로는 캠퍼스를 떠난 적이 없는 선생. 1972~75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선생은 심리, 사회, 조직 등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경영학에서 보았다. 그 때가 경영대 전임강사(당시는 교수 대우)를 맡고 나서 2년 뒤였다. “경영대를 택한 것은 외국에서 처럼 사회ㆍ심리ㆍ경영 등 여러 과목을 겸해 보려는 심산이었죠.”

공교롭게도 유신의 정점에서 한국을 떠나 있었던 선생은 먼저 학내민주화 운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예고했다. 그러다 자신의 ‘조직론’ 강의를 듣고 “유신철폐”를 외치다 끌려간 제자에 의해 거의 극적이라할 만할 변화를 겪는다. “80년 봄, 연대 교수평의회를 조직해 놓고 보니, 광주라는 거대한 폭력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자신을 보게 됐죠.” 그렇게 자신의 표현대로 “ 늦깎이 운동가”가 된 것이다. 결정적 계기가 1987년, 과 학생이었던 이한열의 죽음이다. “ 장례식에서 교수 대표로 조사를 낭독했죠. 한열이를 죽인 구조ㆍ제도와 싸우지 않고서는 안 된다?결심으로.”

1990년,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등 훗날 정치 거물이 된 사람들과 만든 민중당에서 그는 좌파 강령을 기초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탈당하고 만다. “민중민주주의, 개량주의 등으로 찢겨 가는 양상, 91년 지자체 선거 국면에서 노선 차이 등으로 민중정치연합이 깨지는 걸 보면서 좌파의 이합집산을 똑독히 체험했죠.”거기를 뜬 선생은 19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정치연대 대표로서 권영길 등 노동 운동가들과 노선 차이를 확인하고 1999년 ‘노동자의 힘’을 만들어 대선 국면을 준비했다. 그러나 좌파 내부의 입장 차이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여기까지가 사회과학대학원의 전사인 셈이다.

그리운 어머니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독특한 이력을 모르고서는 얼른 이해가 와 닿지 않는 대목이다. 선생은 마르크스 연구자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반주류 학문에서 이론과 실천의 공유자라는 점에서 드문 존재이다. 대학내에 있으면서 노동 운동과 민중 정치 운동을 함께 해 왔다. 나아가 경영학과라는 소속과 선생의 반자본주의적 성향이 조화되는 것 같지도 않다. 흔히들 자본의 학문이라고 알고 있는 경영학을 선생은 자본의 첨병이라 부른다. 자본의 논리를 가장 명쾌하게 알 수 있으며, 학생들이 그것을 깨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균형 감각이죠.”그 같은 현장 감각에는 두주불사의 미덕(?)도 한몫 단단히 한다. “운동 뒷풀이 때, 분위기 잡는 게 도 내몫이죠.”

현장 이론가의 열정을 뺨치던 선생이 처음으로 미소를 띠는 대목이 있었다. 작고한 부모를 떠올릴 때였다. “아버님(오화석)과 어머님(박노경)은 각각 연대와 이대 영문과 교수셨는데, 신념이 투철하셨던 분 같아요.” 해방후 좌파 연극운동을 펼치던 어머니는 선생이 7살이던 전쟁 중 숨졌는데,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된 건 10대에서야 였다.

현재 선생은 마르크스주의 과학 철학론인 ‘연구방법론’, 한국에서 자본과 민중의 대립을 주제로 한 ‘한국 사회 변동과 조직’ 등을 대학원과 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과제만으로도 바쁠 터에, 틈이 나면 그리움으로만 남은 어머니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소망도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1-28 16:01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