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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석] '이프' 발행인 엄을순
"반여성주의는 반드시 깬다"
"여성운동과 경영 접목, 성공한 페미니즘 보여줄 것"


이하의 기록은 한국에서 맨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나온 계간지 ‘ 이프(if)’에 관한 객관적 진술에 접근하고자 한다. 또 그 잡지의 신임 편집장으로 뽑힌 한 여성이 걸어 오고 있는 독특한 삶의 궤적을 제대로 추적하고자 한다. 발랄했고 솔직했던 어떤 여성에게 적절한 계기가 생겨 재구성해 본 중간 결산서이다. 가능하다면 한국적 페미니즘의 현재는 물론, 그 미래까지 육화(肉化)해 내 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이란 담론이 아니라, 삶의 시간들이라는 사실을 위해. 페미니즘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당위를 위해. 그렇게 본다면 그가 걸어 온 인생 여정은 가장 구체적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가장 모범적인 사례인 셈이다. 알고 보니 그는 이화여대 메이퀸 대회 폐지에 불을 당긴 장본인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가.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청개구리 삼신이었다. 분식집에 가면 혼난다고 선생님은 그렇게 일렀건만, 그는 분식집은 물론 극장까지 진출하다 들킨 적이 한 두 번 아니었다. 어린이들에게는 해롭다고 말리는 델 왜 기를 쓰고 갔는가? “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을 분식집에서는 마음대로 틀어 줬거든요.” 서울 마포구 마포동 ㈜도서출판 이프(if)의 발행인실에서 엄을순(48)씨는 경기도 용인에서의 비인습적 어린 시절을 회상해 갔다.

“ 저, 순한 거 제일 싫어 하는데, 순하길 바라셨던 모양이예요.” 운수업에 종사하는 평균치의 한국 남성이었던 아버지 엄기원씨와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던 어머니 박필배씨는 슬하 3남 1녀의 자식 중에서도 특히나 이뻤던 딸이 순(順)하게 커주기만을 바랬고 그 염원을 이름에 각인시켜 두었다. 천방지축으로 나다니는 외딸을 앉혀 두고 여자 아이는 왜 인형과 놀아야 하는 지를, 모친이 설득까지 했을 정도다.

-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에 일탈로 대응

우연찮게도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명문고(진명여고)라는 데로 진학해 보니, 이제 그것은 억압 장치로 변해 갔다. 귀밑을 넘겨서는 안 되는 커트 머리, 새파랗도록 싹싹 면도를 해야 하는 목덜미 등 당시 여학생들에게 가해진 시시콜콜한 규제를 가리켜 그는 “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표본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일탈로 대응했다.

“ 문제아라기보단, 농땡이 좀 쳤죠.” 공부도 곧잘 했건만, 노는 애들과 정신 없이 쏘아 다니다 보니 성적은 들쑥날쑥 제멋대로였다. 지켜 보던 고 2때 담임이 방과 후 그를 조용히 불러 이야기를 했다. 너는 많은 걸 놓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있다며. “ 제게 공부의 이유를 가르쳐 준 유일한 분이죠.”

그 말에 감동돼 하루에 2시간만 잘 정도로 독하게 공부한 그는 이화여대에는 너끈히 갈 수 있을만큼 올랐다. “ 만의 하나, 성적이 오르고 있던 저한테 ‘거 봐라. 공부하니까 돼잖아’라는 식으로 누군가 이야기 했더라면 당장 때려 치웠을 거예요.” 주위의 ‘ 무관심’ 덕에 원형탈모증에 걸릴 정도로 공부에 매달린 그는 1974년 이대 과학교육과에 입학하게 됐다. 어디로 튈 지 모를 그의 대학 시절이 순탄했을까?

당시 이대의 메이퀸 대회란 지덕체를 겸비한 여자를 가린다는 명분 아래, 재벌의 며느리가 되는 현실적 통과의례였다. 곱상하게 생긴 데다 지도력까 있었던 그는 과학생들의 투표에 따라 4학년때 펼쳐진 대회에서 과대표로 뽑혔다. 1978년, 검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등 규격화된 차림을 하고 경연을 치러 최종 후보 3인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는 순서대로 심사위원 교수단과 단상에서 대화를 가졌다. “ 이 대회에 참석한 소감은? "막상 해 보니 흠 없는 상품을 뽑는 듯 했어요." 참 지적(知的)인 대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어느 교수가 던진 질문에 대해 그가 내놓았던 답을 아직도 그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여타 출연자들은 “키워 준 부모님께 감사…”하던 때였다. 당시 그의 답변은 이듬해 그 대회가 폐지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한 획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두달 뒤 결혼했고(23세), 이듬해 1월 첫 출산을 했다. 허니문 베이비의 공동 제작자인 그의 남편 서윤석(현재 이화여대 경영대 학장)씨는 당시 서울대의 보컬 그룹 피닉스의 멤버였다. 메이퀸 축제때 그룹 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던 대학 1년생 엄씨를 발견한 뒤로는 줄곧 끈질기게 구애했다. 1년 뒤 그녀의 부친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는 엄씨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녀의 집에 찾아 가 상가집을 들쑤셔 놓았다. “난리가 났죠. 초상집에 어울리지 않는 용모를 한 청년이 딸을 달라고 와 있었으니.” 그러나 당시 엄씨의 확고한 태도는 모든 소란을 일거에 잠재웠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허락을 얻고 일을 저질렀던 일이었다.

- 일과 공부 장악하기



두 사람은 큰 아이의 생후 6개월이던 1979년 미국으로 건너 갔다. 아이 하나를 돌보며 텍사스의 오스틴대에서 공부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던 중에 1년 뒤에는 둘째까지 갖게 되니, 자신의 삶은 흔적조차 사라져 갔다. “유치원 갈 때(5살)쯤 되면 그 때는 진짜 내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아이를 키우며 갖는 즐거움도 크지만, 잘 따져보면 그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던 것이다.

남편이 UCLA 교수로 옮기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 볼 시간이 생긴 그는 일과 공부라는 두 가지를 장악해 가는 법을 스스로 체득해 갔다. 우선 인테리어 전문 과정을 1년 반째 공부해 나가던 그는 자신에게 내재해 있던 또 다른 억척을 발견했다. “ 부동산 브로커가 한 건을 성사시키고는 4,000불 받는 것을 보고는 그 길로 부동산 컨설턴트 공부에 뛰어 들었어요. 죽도록 공부했죠.”

만만찮은 실력이 알려지자 교포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그를 모셔 ‘ 속지 않고 집사는 법’ 등의 코너를 맡았다. 컨설턴트 노릇 3년만에 제법 큰 돈도 만져 보고 ‘ 표범 부인(Jaguar Lady)’으로도 제법 명성을 날렸다. 재규어라는 차를 타고 다닌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었으나, 계약금 떼이는 걸 막아 주는 등 억척스런 활약 이력이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이다.

미국 생활 16년은 남녀 평등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기간이기도 했다. 시댁과 친정에 모두 똑같이 매달 200달러씩 부친다거나 선물은 양쪽 똑같이 한다는 식의 원칙이었다. 아이들의 교육과 집안일을 같이 나눠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중 남편이 교수로 초빙 받아 간 일리노이에서의 생활이 그를 거듭나게 했다. “ 옥수수밭밖에 없던 그 곳의 자연에 압도당했어요. 지역 대학에 입학해 한 학기 동안 사진 공부를 죽어라 하다, 서울 온 거예요.”

- 마흔에 시작한 사진공부, 그리고 취업

돌아 와 보니 그는 이미 마흔이라는 만만찮은 나이였지만, 그는 집이 있는 분당과 가까운 신구사진전문대에 입학했다. 40살 늦깎이로 입학 당시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그는 시험때면 고시원에 가서 달달 외다시피 공부하면서도, ‘푸근한 왕언니’로 조카뻘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나는 결국 나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녔고 2년만에 수료했어요.”

졸업 후 기업 홍보지, 지방지 등에서 경력을 쌓아 가고 있던 그는 여성신문에 전화를 걸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구직자 신분인 그가 꺼낸 말은 “ 거기서 사진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구직자로서는 상당히 분에 넘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결코 분에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데에야 별달리 토를 달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슷한 과정을 통해, 1997년 페미니즘 계간지 ‘이프(IF)’와 인연이 닿았다. 맨 처음은 사진 기자로서였다. 다시 한 번 스무살 아래 동료들과의 생활이었다. 2002년 봄호의 표지 인물이었던 작가 이경자씨의 사진 등 그의 렌즈에 포착된 여인네의 얼굴은 곧 페미니즘의 권화(權化)로 거듭났다.

지난 2월 6일, 국장으로 있던 그는 이프 이사회에서 새 발행인으로 선출됐다. 1997년 5월 ‘ 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를 선언하며 빛을 본 이래, 성희롱, 오르가즘, 제사 문제 등 이땅에 엄존하는 성차별적 코드들을 도마에 올려 온 유서 깊은 잡지의 선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윤성남, 김민숙, 박옥희 등 전임자에 이은 제 4대 발행인. 그 같은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그가 2003년 아주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는 점도 참작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제 여성운동을 경영과 접목시켜야 한다”며 “ 성공한 페미니즘을 보여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선 의사협회나 주요 은행 등 큰 기관들과 ‘ 이프’지를 장기적으로 비치하는 문제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막 내디딘 발길에 큰 힘을 실어 준다. 3월 7일부터는 여타 여성지들의 동참으로 여성 비만과 노화 방지 프로그램도 실시하게 돼 있다.

그는 젊은 기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그대로 밀려드는 편집장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방 한쪽벽에는 ‘자화상’이란 사진이 취임 축하 난화분들 속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그는 없고 엄청나게 확대된 꽃 한송이가 있다. 가로×세로 120㎝ 가득 활짝 핀 국화의 이미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 16년이나 외국에 있다 온 어린 아이에게 큰 옷을 입힌 느낌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죠.” 편집장 업무가 손에 익으면 ‘FlowersⅡ’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숙미를 보여 줄 또 다른 전시회를 갖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역차별 논하는 남자들은 ‘엄살’



도대체 이 한국땅에서 페미니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비유를 든다.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다시 펴려면 거꾸로 말아서 잘 펴야 하잖아요? 이제 거꾸로 말아 가는 작업을 하자는 건데, 역차별이라뇨. 남자들, 엄살은 되게 많아 갖고서는….” 그렇다면 여성의 여의도 입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남자가 이용해 먹든 말든 여자 국회위원은 일단 더 늘어야 해요. 여성에 대한 자격미달론을 들먹거리기 전에, 기회미달론을 논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정말 자던 개도 놀라 일어나 짖을 미스 코리아 대회’ 등 이땅에 엄존하는 반여성주의적 시각과의 싸움이 제대로 매듭지워 지는 날, 진정한 인간해방은 도래한다는 지론이다.

여하튼 그의 말을 들으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남녀(이 말은 ‘여남’으로 바꾼다) 공존이라는 새 단계로 접어 들 모양이다. 이제 밖에서 일한은 남자들의 짐을 더는 것이 곧 여자들의 짐을 더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자의 괴로움을 더는 것이 곧 남자의 괴로움을 더는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제 남자라면 무조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포용하는 페미니즘이 돼야 해요. 적어도 한풀이는 않겠어요.”

페미니스트로서, 이승연의 정신대 사진건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 사죄한다해 놓고 변명을 단 것은 (이승연의) 잘못이예요. 아이디어는 남자들이 내놓고, 욕은 여자가 먹는 현실이 슬픈거죠.” 열혈남아를 만나 일찍 시집 간 덕에 두 딸은 장성하다. 큰딸 원경(23)은 스탠퍼드대에서 회계학 박사 과정에, 작은딸 원주는 보스턴 웨슬리대 치대에 재학중이다. 각각 미국서는 줄리, 캐롤라인으로 통한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4-02-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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