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뭉개는 재개발 땐 나도 가슴아파"부동산의 재산적 가치 환산, 사람빼곤 다 평가

[직업의 세계-29] 감정평가사 공민달
"텃밭 뭉개는 재개발 땐 나도 가슴아파"
부동산의 재산적 가치 환산, 사람빼곤 다 평가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안 가는 곳이 없다. 구청으로, 거리로, 산으로, 섬으로 쉼 없이 내달린다. 어쩌다 사무실을 지킬 때도 한가해서가 아니다. “그건 사무실에서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못 나가는 상황이지요.”

감정평가사 공민달(38. 삼일감정평가법인 대표)씨는 걸핏하면 부재중이다. 휴대폰이 없으면 추적도 잘 안 된다. 감정평가사는 ‘사람만 빼고는 다 평가’한다. 주로 토지 등 부동산의 재산적 가치로 환산하는 일을 맡는다. 현장에 살고 현장에 죽는다.

크게 나눠 공시지가 조사나 공원 또는 댐을 만드는 등 각종 개발 사업과 관련된 보상 평가, 법원의 경매나 은행 대출 또는 국가나 지자체의 재산 매각 때 매물 또는 담보에 대해 평가하는 일이 기본 일거리다. 가끔은 부부의 이혼시 재산분할 문제에도 관여한다. 부동산이 얽힌 다양한 현장에서 감정평가사는 국민의 재산권에 대한 사실상 판사 역할을 맡는다.

- 재산권에 대한 사실상의 판사 역할

공시지가 조사작업은 거의 국토 행군에 가깝다. 지도와의 씨름에서 출발해 땀 흐르는 현장 순례로 이어진다. 공시지가는 모든 토지 평가의 기준이다. 동시에 국민 개개인의 세금문제로도 직결된다. 자칫 실수하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억울한 손해를 볼 수 있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국가 또는 지자체의 의뢰를 받으면 벌집처럼 빽빽한 지번도를 펼쳐놓고 사전조사를 시작한다. 해당지역 전체를 골목골목까지 해부해 용도, 입지조건 등을 바탕으로 일정수의 샘플지역을 추려낸다. 이것이 ‘표준지’다. 예를 들면, 서울 종로구의 총 4만 필지가 유형별로 최종 1,200필지로 압축되는 것이다. 각 표준지마다 저당권 설정 여부 등 관련 사항을 빠짐없이 확인하고 나면 바로 현장으로 직행한다.

몇 해전 종로구 공시지가 조사 때 공씨는 종로 전역을 걸어다녔다. 하도 힘들어 나중엔 자전거까지 동원했지만 오르막에 내리막, 꼬불꼬불한 길을 누비느라 여전히 진땀을 흘렸다. 조사중엔 ‘생리현상’을 해결할 곳도 마땅치 않다. 가까운 주유소를 찾아 신세를 지곤 했다. 도심은 그나마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동거리라도 짧지만,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인가가 나오는 시골 오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언젠가 다음 장소를 찾아가느라 추위 속에 1시간이나 시골길을 걸어간 적도 있다. 밥을 사먹을 곳이 보이지 않아 쫄쫄 굶을 때도 많다. 행정선을 타고 섬을 돌아다닐 땐 배멀미에 녹초가 되는 경우도 있다. 시간도 촉박하다. 이 일이 시행되는 것이 매년 10월이다. 곧 겨울이 들어선다. 행여 눈이라도 들이닥치면 큰 낭패다. 토지가 눈에 덮이면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조사가 끝나는 12월까지 마음도 발길도 급하다.

“그래도 공시지가와 같은 공공 사업을 맡을 때가 마음은 제일 편합니다.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있구요.”

보상과 경매 때에는 태풍의 눈과 같다. 민감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는 상황. 감정평가사들의 평가 결과가 맨 중심에 들어 있다. 개발사업 시행자측과 해당 지역 주민들, 또는 은행과 채무자의 사이에서 스스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감정평가의 공정성은 의무이기 전에 평가사자신들의 자존심이다.

보상액에 대한 불만은 둘째 치고, 아예 개발사업 자체를 거부하는 이도 있다. 돈을 얼마나 주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경우다. 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협조를 받으려면 몇 배나 어렵다. 한때 사업시행자측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그 같은 어떤 주민을 함께 찾아갔다가 난데없는 ‘무단 주거 침입’ 소동을 겪으며 파출소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그래도 그 다음날 결국 이해를 하고 협조해주셨습니다. 제가 항상 느끼는 건, 우리 국민들이 공공사업에 대해 다들 긍정적인 생각들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다소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일이 있지만, 전체를 위하는 일이라는 걸 말씀드리면 나중에는 다들 조금씩 양보하고 협조해 주시더라구요.”

- 공정성은 의무이자 자존심

법원의 경매 건으로 당사자를 찾을 땐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아침에 방문하지 않는다. 빚더미로 집이나 땅을 넘기게 된 당사자의 심정이 마음에 걸려서다. 은행의 담보 평가 때엔 정말 시간이 빠듯하다. 기업의 자금 대출이 걸린 만큼 늦어도 사나흘안에 평가작업이 끝나야 한다. 평가가 잘못되면 기업에 피해가 가거나 은행이 막대한 손해를 纛?수 있다. 문제가 클 경우 손해배상감이다. 그 틈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근사치를 찾자니 중간에서 감정평가사들의 머리가 무겁다. 감정평가사들 중에 때이른 흰 머리를 가진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연유다.

공씨네 법인의 경우, 기본 업무 외에 나름대로 차별화 사업의 하나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업무도 맡는다. 금융권의 의뢰에 따라 각종 투자형 개발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는 일이다. 이것만도 1인당 한 달에 최소 6건씩 돌아온다. 이 때문에 지방출장이 더 잦다. 어느 낯선 지역에 던져지든, 대상지 탐색은 물론, 인근 주민들도 만나보고 근처 부동산 소개소 문도 두드려본다. 관련 부서 공무원도 만나는 등 최대한 정보를 모은다. 수시로 찾아 드는 출장으로 한달씩 집에 못 들어간 때도 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본의아니게 주말부부가 될 때도 많다.

공씨가 감정평가사가 된 지 올해로 10년째다. 동국대 법학과 재학 중 행정법을 가르치던 교수를 통해 처음 이 분야에 대해 알게 되었다. 4학년 때 자격시험 1차에 합격, 이듬해에 2차에 합격하면서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쥐었다. 졸업 무렵 잠시 은행원 생활을 한 뒤 95년 정부재투자기관인 한국감정원에 입사해 ‘감정평가사 공민달’의 길에 들어섰다.

처음엔 선임 평가사의 보조역으로 실무를 익혔다. 재개발구역의 건물 약 2,500개를 직접 조사한 적이 있다. 발이 부르트도록 쫓아 다닌지 한 달반만에 조사가 끝났다. 신고있던 구두가 다 떨어져 있었다.

원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못 배기는 성격에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해 업무는 자연스레 친해졌다. 보다 자유롭게 마음껏 현장을 누비고 싶은 생각에 1년 뒤 일반 법인으로 적을 옮겼다. 5년후인 2002년, 지금의 법인을 만들어 독립했다.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는 감정평가사가 약 2,000명. 감정평가 법인으로는 약 30개가 있다. 공씨네 팀은 그중 가장 나이가 젊으면서도 업계 안팎에서 실력과 성실함으로 인정받고 있는 법인 중 하나다.

“제 생각에 불과 5,6년 전부터인 것 같습니다. 이 분야에 컴퓨터가 급격히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예전엔 공시지가 조사 전 표준지를 선정할 때도 손으로 종이를 풀 칠 해 붙이곤 했다. 분류 때도 일일이 스탬프로 찍어 표시했다. 한 눈에 들어오는 칼라형 지번도를 만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공문서를 뗄 때도 일일이 민원 서류를 복사해 받느라 시간이 더디던 것이 이젠 컴퓨터 클릭 한번에 자유자재로 조회된다.

- 경매로 세입자 내쫓길 땐 일에 회의

소신껏 일하고도 항의를 받을 때 마음이 씁쓸하다. 보상 평가 때 특히 그런 일이 많다. 대규모 사안인 경우, 평가결과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찾아와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의무가 아닌, 선택의 자리다.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부딪혀 풀어가는 것이 공씨의 방식이다. 2년 전 여름, 서울 성북구의 한 재개발지역 상가 영업주 30여명이 그를 부른 것도 같은 상황이었다. 정면돌파를 택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쟎아요. 솔직히 저도 그런 자리에 가고 싶을 리야 없지만, 뭣보다 제 자신이 떳떳하게 일했으니까 차라리 직접 얘기하고 이해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분들 입장과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구요. 실제로 그 자리 이후론 더 이상 제게 항의를 하지 않으셨어요.”

경매 건을 다룰 땐 마음 애처로운 일도 많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확정신고 제도를 몰라 주인의 부채 때문에 애꿎게도 전세금 한푼 못 건진 채 거리에 나앉은 세입자들이 아주 많았다. 언젠가 경매 처분된 집을 조사하러 방문한 그의 주위에서 아기를 업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젊은 주부의 기억이 지금도 아프게 남아있다.

보상 문제도 마찬가지. 재개발 사업은 특히 해당지역 주민이 가난한 이들인 경우가 많다. 생활은 어렵지만, 그 나름의 질서와 문화 속에 오순도순 살아가는 풍경을 자주 보았다. 언젠가 재개발지역으로 발표된 서울 봉천동 달동네도 그랬다. 산꼭대기 허름한 동네, 빈한한 사람들. 그러나 그 틈에서도 텃밭에 채소가 자라고 꽃이 피고 있었다. 그때 가장 회의를 느꼈다.

“꼭 재개발을 해야 되나, 저 사람들을 쫓아내면서까지 꼭 해야 되는 사업인가, 그 사업 안에 제가 함께 포함된 입장이라는 게 씁쓸했어요. 떠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IMF 위기 시절엔 전국에 걸쳐 자리해 있던 ‘짓다 만 아파트나 상가’등도 많이 살려내기도 했다. 금융권의 의뢰를 받아 그 같은 건물들에 대한 건축 재개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는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저 완공된 건물들이 상당수다. 길을 지나다가 자신이 평가를 맡았던 건물이 다시 쑥쑥 올라가는 걸 봤을 때, 분양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을 봤을 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작으나마 지역경제를 함께 거들었다는 보람이 있었다.

94년에 시작한 동국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그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올해가 마지막 학기다. 감정평가사가 된 뒤 워낙 바쁘게 지낸 탓이 크다. 그는 ‘부동산 공시법’, ‘부동산 기본 법률’ 등 다수의 전문서를 펴낸 바 있고, 대학과 은행, 학원 등지에서 여러 해째 강의를 맡고 있다. 가능하다면 쉰 살이 되기 전 부동산 관련 분야를 총망라하는 전문가 조직을 일으켜 보는 것이 꿈이다. 실제로 같은 성격의 사업체를 3년 전에 출범시킨 뒤 현재 잠시 휴업상태로 숨고르기 중이다.

- 부동산 너무 많이 알아 돈 못 벌어

Q&A 두가지로 끝내자. 첫째. 돈을 잘 버는 직업인가? 공씨가 후배들에게 애용하는 멘트가 있다. ‘이것은 빌딩을 살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착실히 일하고 저축하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정도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이 일을 하면서 돈 벌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돈 벌 생각을 하면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둘째. 부동산 전문가이면서 왜 땅 투자로 돈 번 감정평가사 얘기는 별로 들리지 않는가? 이유는 ‘너무 많이 알아서’다. 너무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보니 ‘모험’이나 ‘도박’이 불가능하다. 공씨에겐 더더욱 먼 얘기다. ‘재미 없는’ 고스톱은 팔이 아파서 안 치고, 카드는 치는 법도 모른다. 공무원보다 더 공무원 같은 사람이다.

입력시간 : 2004-03-0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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