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고 흐르는 정보 "꼼짝마"도청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 산업스파이 뒤쫓는 '고스트 버스터'

[직업의 세계-30] 통신보안전문가 조성룡
새고 흐르는 정보 "꼼짝마"
도청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 산업스파이 뒤쫓는 '고스트 버스터'


알려서도 안되고, 알아서도 안된다. 직원들이 다 빠져나간 밤 9시 무렵, 회사 한켠에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도착한다. 안내를 받아 말없이 비상 통로로 이동하는 이들 손에는 묵직한 철제가방이 들려있다. 걸음이 멈추는 곳은 임원실 앞이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철제가방이 열리고 최첨단 탐지장비들이 드러난다.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집무실을 샅샅이 훑어간다. 전화기, 회의용 탁자, 벽에 걸린 그림이나 컴퓨터, 콘센트, 가구의 미세한 틈새, 장식용 화분의 물빠짐 구멍까지 탐지기가 모두 휩쓸고 지나간다. 얼마 뒤 요원들이 장비를 거둬넣고 들어왔던 비상통로로 다시 소리없이 빠져나간다. 다녀간 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다. 도청 탐지팀이 지나간 자리다.

“ 지난 5년간 총 1,300회 가까이 출동했습니다. 거의 매일 나간 셈입니다. 단기간에 이만한 현장투입 횟수는 외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례입니다.” 경제전쟁이 가열되면서 산업스파이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기업의 정보가 통신망의 틈새로 위태롭게 새나간다. 통신보안 전문가는 이들을 뒤쫓는 정보통신계의 ‘고스트 버스터’다. 국내 전문가들의 대열 맨 앞에 조성룡(48)씨가 서 있다. (주) 에스원의 특수사업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올해로 경력 25년째를 맞는 고수다.

이 비밀작전은 ‘도청당하는 것 같다’는 전화가 찾아들면서부터 시작된다. 주로 기업들의 문제다. 의뢰한 당사자를 접촉하는 일부터가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도청 가능성에 대비해 공중전화나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별도의 장소에서 비밀리에 만난다.

이때 해당 장소의 설계도면 등 관련 자료들을 건네받은 조씨와 요원들은 현장투입을 위해 사전 작전회의를 편다. 기본 탐지 포인트만 최소 30군데. 유선, 무선 전문가 등 요원 저마다의 특기에 따라 구역을 나누고 동선을 계산한다. 출동하기만 하면 곧바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다. 회의는 30분 정도면 끝난다. 천 여번의 출동경험이 가져다 준 결과다.

-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정보 지킴이

출동 사실도, 시간도 기업측 보안담당자와 극소수 관계자 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현장투입 시간이 임박하면 출동차량에 장비가 실린다. 기본 탐지장비만 약 10종에 이른다. 현재는 물론 과거에 설치됐다가 ‘죽어있는’ 도청기까지 찾아내는 은닉 도청 탐지기에서부터 통신선로에 신호를 쏘아보냄으로써 반경 수 미터 안의 이상신호를 잡아내는 선로도청 분석기, 어떤 집기류든 손바닥처럼 그 내부를 투시해 보여주는 휴대용 엑스레이 투시기 등이다. 대당 3,000~ 4,000만원을 호가하는 첨단장비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차량에도 자사의 로고 하나 붙이지 않는다. 복장도 검은 양복 차림으로 통일돼 있다. 탐지 장소는 주로 중역실이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요원들이 민첩하게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최대한 빨리 작업하고 빨리 철수해야 한다. 조금만 시간을 오래 끌면 누구의 눈에 띌지 모른다. 회사측 보안담당자의 입회 아래 요원들의 소리없는 전투가 진행된다. 이미 계획해 둔 동선대로 치밀하게 움직인다. 누군가 이상신호를 발견하더라도 소리치지 않는다. 철저히 정적이 유지된다. 모든 대화는 약속된 수신호 아니면 필담으로 이뤄진다. 탐지작업이 이어지는 약 30분 동안 온 신경이 바늘 끝처럼 선다.

한 사람은 천장의 보드 일부를 뜯고 점검구를 타고 올라가 그 안의 선로를 조사한다. 먼지뭉치가 사방에 풀썩거려도 기침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어떨 땐 쥐와 마주칠 때도 있다. 다른 한쪽에선 닥트를 뜯어내고 한 요원이 그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 저희 팀은 각자 관련 분야에서 최소 3년, 길게는 7년씩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발해 훈련시킨, 고도로 숙련된 요원들입니다. 그냥 눈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현장의 1차적인 이상 여부는 바로 잡아냅니다. 유선 전문 요원의 경우, 전화기 모델마다 구조나 디자인을 다 꿰고 있습니다. 본래의 모델 외에 뭐가 더 붙었는지 아닌지 금새 압니다. 도청기 무게가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닌데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보기만 해도 ‘이거 뭔가 이상하다’ 바로 알아챕니다. 그럴 땐 전화기를 즉석에서 완전분해해 확인합니다. ”

- 도청 당해봐야 중요성 깨달아

더 치밀한 확인법도 있다. 한번 탐지작업을 끝낼 때마다 도청기가 설치될 우려가 있는 위치나 시설물 요소요소에 일일이 특수펜으로 표시를 해둔다. 그 다음에 현장에 투입될 때는 이 표시를 통해 나사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 있어도 바로 침입자 파악에 들어4?

작업 후 간이 보고서를 건네주는 것으로 현장상황이 일단락된다. 철수 후 1주일 안에 정식 보고서가 작성된다. 세부적인 탐지내용은 물론, 보안상 취약점과 처방까지 제시되어 있다.

요청 건수에 비해 실제로 도청기가 발견되는 사례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걸렸다하면 기업의 명예와 재정이 흔들거린다. 2년 전, 조씨는 한 증권사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내부 정보가 새는 것 같다. 이상하게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만 계속 무너지고 있다. 반복적으로 거액을 손해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조씨팀이 출동한 얼마 뒤 싱거우리만큼 간단히 도청의 덜미가 잡혔다. 빌딩 내 통신운영실(MDF)에서 녹음기와 녹취록을 찾아냈다. 증권사가 우려한 사태 그대로였다.

“ 그 지역의 ‘큰 손’들이 빌딩의 통신업자를 매수해 이 증권사의 지점장과 그 주요 거래처 한 곳을 집중적으로 도청하고 녹취해 정보를 빼낸 겁니다. 이 사건 이후 그 증권사는 주기적으로 점검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끼리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해 본 뒤에야 중요성을 안다’는 겁니다.”

사주받은 비서가 사장의 비리를 캐기 위해 회의나 전화내용을 도청하기도 하고, 영세업자들이 밀집한 한 빌딩에서는 빌딩의 통신시설을 보수하는 업자를 매수해 도청을 시도, 타 업체의 비리를 포착한 뒤 이를 미끼로 협박해 자사의 제품을 강매하다 걸린 경우도 있다. 한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비슷한 방법으로 아파트 주민들의 약점을 잡아 돈을 갈취한 사례도 있었다.

엉뚱한 요인이 탐지팀에게 혼선을 가져오는 일도 있다. 어떤 경영상 문제로 지레 불안에 떨던 모 VIP 기업인의 요청을 받아 급히 그 집에 출동한 적이 있다. 기업인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탐지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어느 방에선가 도청 신호가 잡혔다. “ 다들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정말 엄청난 긴장 속에서 도청 신호가 나오는 곳을 찾아 한 발 한 발 따라가는데, 알고보니 ‘베이비 모니터’라고, 도청기가 아니라 도청기 원리를 응용한 생활용품이었습니다. 그때 너무 놀랐습니다.”

조씨가 이 분야에 들어선 것은 1979년 일이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군복무와 함께 이후 약 20년간 국가기관에서 통신보안 전문가로 뛰었다. 현재의 업무보다도 더 민감하고 강도 높은 실전을 거쳤다. 현재의 회사로부터 제의를 받은 것이 1998년. 당초 삼성그룹에서는 자체 계열사들을 산업스파이로부터 지키겠다는 자구적인 목적으로 통신보안팀을 만들고자 했다.

창설 당시 경험자라고는 실전가 조씨뿐이었다. 요원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것도, 장비를 구입하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신참 요원들에 대한 조씨의 교육은 매서웠다. 선발된 소수 요원들을 연수원에 ‘가둬’놓고 90일 동안 외출 한번 시키지 않은 채 ‘특수부대’처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모의 도청기를 장치해놓고 요원들에게 제한 시간 내에 찾아오게 했다. 이론 교육과 함께 약 1년간 준비한 끝에 1999년 정식으로 팀이 가동되었다.

팀장 조씨도 현장을 함께 뛰었다. 폭염이 덮친 어느 여름엔 작업복을 입은 채 직접 천장에 올라가 땀범벅이 된 채 일하는 그를 보고 의뢰한 회사에서 감동해 단골이 된 일도 있다. 차차 재계 안팎으로 소문나면서 하나 둘씩 외부 업체나 공기관의 요청이 늘어났다. 대기업뿐 아니라 정부 기관, 단체, 대학 등 다양한 대상들이다. 최근 대선자금 관련건을 비롯해 검찰의 의뢰로 특검 현장에 출동한 것만 수차례에 이른다.

- 실패 아니면 성공의 게임

신뢰를 얻기까지 치른 댓가 또한 만만치 않다. 초창기에는 국내 업체의 도청탐지능력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한번은 이런 ‘조롱?沮?받았다. “ 원래 외국의 통신보안업체에 계속 일을 맡기고 있던 한 회사에서 요청이 들어와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제가 5분만에 도청기를 찾긴 찾았는데, 설치된 위치나 거리를 보니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것이 이상했습니다. 실제 상황이 아니라 우리 능력을 테스트해보려고 불렀다는 걸 눈치챈 순간, 몹시 불쾌했습니다. ”

조씨가 순식간에 사태를 뒤바꿔 놨다. 발견한 도청기를 떼어 다른 곳에 숨겨놓은 뒤 회사측 담당자에게는 ‘특이사항이 없더라’며 시치미를 뗐다. 처음에는 ‘뭔 소리냐’며 빈정대던 담당자가 이내 고가(高價)의 도청기가 사라진 것을 알고 난 뒤 얼굴이 파래졌다. 끝까지 ‘우리는 못 봤다’고 잡아떼며 간이보고서를 남기고 철수하려는 조씨 앞에 급기야 담당자가 매달리며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한바탕 시원하게 쏘아붙인 뒤 조씨는 도청기를 되찾아주고 나왔다. 이 일 이후, 이 회사는 바로 평생 고객의 인연을 맺었다. 알고 보니 앞서 영국의 보안업체 두 곳에서 불려와 같은 ‘테스트’를 받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 일단 현장에 투입되면 실패 아니면 성공, 둘 중 하나입니다. 그에 대한 부담감과 긴장이 아주 크지만, 결국 성과를 얻고 의뢰처로부터 호응을 받을 때, 그래서 요청이 늘어날 때 보람도 못지않게 큽니다.”

한가지 흠이라면 좋든 싫든 올빼미형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가끔 회사의 1개층 전체를 탐색할 땐 작전 사령관인 조씨까지 포함해 전원이 출동하고서도 저녁 7시에 시작해 새벽 5시에야 일이 끝난다. 새벽 귀가는 이들에게 일상적인 일이다. 생체리듬이 깨지면서 감기도 쉽게 찾아 든다. 건강과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신노동의 강도 또한 엄청나다. 매일 몇시간씩 전장의 지뢰밭을 정찰하는 심정이다.

‘그래도 이 일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다’고 말하는 조씨.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아도 짐작할만 하다. 007시리즈가 그들 앞에 살아 꿈틀거린다. 이 기회에 테헤란 밸리에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더 있다. 무선 마이크를 너무 사랑하지 말자. 왜? “무선마이크는 그 주파수가 그대로 바깥으로 나갑니다. 외부에서도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전략회의 때 무선마이크를 쓰는 건 스스로 바깥에 정보를 나눠주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 유비(有備)라야 무환(無患)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10 22:27


정영주 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