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래의 원형을 지켜나갈 것"한국인의 가슴에 따스함으로 기억되는 영원한 찐빵

[한국 초대석] 가수 최희준
"내 노래의 원형을 지켜나갈 것"
한국인의 가슴에 따스함으로 기억되는 영원한 찐빵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의 해가 뉘엿뉘엿해 졌다.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최희준(65)씨. 배가 출출한 기색이다. 사람에게 부탁해 공원서 파는 붕어빵을 사 오게 한다. 달큰하게 달라 붙는 붕어빵을 맛나게 먹고 있는 모습에 유명한 별명이 절로 오버랩 된다. “찐빵”.

1960년대 중반께 코미디언 구봉서가 그에게 붙인 뒤, 너도나도 덩달아 불렀던 애칭이다. 그는 과연 ‘찐빵’이었다. 수더분한 생김새와 노래들은 파란 많던 현대사에 휩쓸려 온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한 찐빵, 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터이다.

한때는 국회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고 지금은 임기를 1년 남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감사로 있지만, 그는 노래로 살아 있다. “아련히 떠 오르는/그 여인의 얼굴을/별마다 새겨 보오는/진고개 시이인사아….”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남저음 허스키. 스윙 리듬을 타고 흥이 올라 고음으로 올라갈 때면, 절로 어깻짓을 하지 않을 한국의 기성 세대가 과연 어디에 있으랴. 찐빵 같은 친근함과 부드러움으로, 그 따스함으로 다가 오는 신사의 은근한 목청을 어느 누가 거부하랴.

“틈새를 막았으니, 노래가 더 잘 되겠죠.” 공연을 앞두고, 그는 이를 테면 하드웨어 점검도 했다. 그 동안 견딜만 해 미뤄왔던 충치 치료를 이번에 결행했다며 웃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저씨다. 그 와중에도 하루 2시간씩은 일산의 한 스튜디오에서 한달째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 오고 있다. 록 그룹에 색소폰과 바이올린까지, 모두 7인조 악단이라는 편성은 이번이 첫 시도다.

- 라이브형 노신사의 음악정신

3월 26~27일 정동극장에서 열릴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의 막바지 준비에 임하는 자세가 예전 같지 않다. 번번이 바뀌는 반주팀과 이뤄내는 호흡의 일치가 곧 노래의 승부를 가름한다는 믿음, 철저한 현장 정신 때문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라이브형 노신사’쯤 되겠다.

“국정에 쫓겨 7년만에 가진 콘서트였던 2002년 11월의 ‘가을밤 콘서트’는 그룹 사랑과 평화와 함께 였죠. 재즈 뮤지션 조지 벤슨처럼 기타를 잘 치는 최이철과의 협연이 멋들어졌었는데….”최이철이라면 미8군 무대 출연 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트롬본 주자 최상용의 조카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맺어진 인연은 그렇게 견고하다.

“굳이 꼽으라면 ‘빛과 그림자’, ‘길 잃은 철새’, ‘하숙생’, ‘옛 이야기’, ‘진고개 신사’, 그리고 ‘종점’이 제 노래 중 가장 애착 갑니다.”모두들 뽕짝과는 분위기나 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성정을 담고 있는 노래다. “마일스 데이비스, 스탠 게츠, 폴 데스몬드의 쿨 재즈에다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면 뭐든 좋아 하죠.” 자기 음악 세계의 인수분해인 셈이다. 뽕짝을 주조로 했던 동년배 가수들과는 분명 다른 뭔가가 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란 점도 그를 튀어 보이게 만든다.

“1954년 입학했는데, 학번은 7XXX으로 돼 있어요. 그 때가 단기 4287년이라, 맨 뒤 숫자를 딴 거였어요. 공부를 그리 썩 잘했던 건 아니었죠.” 당시의 커트 라인은 정외과 – 의예과 – 상대, 그리고 법대의 순서였다지만, 겸사이리라. 그는 1959년 ‘제 1회 서울대 장기(長技) 대회’에 참가해, 동료 학생들과의 차별성을 보였다. 김광수 탱고 악단의 반주로 팻 분의 팝송 ‘I’ll Be Home’과 이브 몽탕의 샹송 ‘낙엽’을 멋들어지게 불렀던 것이다. 같은 과 1년 후배인 황병기가 가야금 연주로 출전, 오늘날 국악의 대가로 군림할 맹아를 보였던 바로 그 대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문예진흥원 자리가 바로 옛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자리였으니, 인연이라면 참 질긴 인연이다. 그 사건은 일생을 뒤바꿔 놓은 계기이기도 했다.

- 미8군 무대에 선 서울법대생

“미 8군의 클럽 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당시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파피 악단’의 오디션에 참가했어요.”이후 ‘NX-1’, ‘서비스 클럽’ 등을 중심으로 계속된 미군 클럽 공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신중현의 천재성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바로 거기서 였다. 요컨대 엄격한 오디션 통과가 고용의 필수 조건이었던 미 8군 무대는 당시 한국 대중 음악의 정점이었고, 대학을 뛰쳐 나온 그는 감성이 예민한 시기의 2년 반 동안 그곳에서 국내외 뮤지션들과의 협연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대중 음악을 체화할 수 있었다.

1960년 작곡가 손석우에게서 받은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그는 한국인들과 낯을 텄다. “나, 현미, 한명숙, 패티김 등 미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괴상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우리 대중 음악의 색깔을 바꿔 놓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우리 애인…’이 한창 히트 치고 있던 당시, 그는 임희춘 불루벨스 남백송 등 연예인 20여명으로 구성된 ‘해병연예대’에서 2년반 동안 군인으로 지냈다. “원산폭격 기합을 받고 있는데, ‘우리 애인…’이 흘러 나오더라구요.”이때 맺어진 끈끈한 전우애는 훗날 출마 당시 톡톡히 값을 했다.

1964년에 제대, 월남 파병과 가까스로 어긋난 그는 이봉조 길옥윤 김호길 등 당대의 일류 작곡가들과 호형호제하며 찰떡 같은 콤비를 이뤘다. 대표곡들을 비롯 ‘맨발의 청춘’, ‘엄처시하’ 등 그가 부른 드라마 주제곡들은 본방에서 재방까지, 당시 한국인들은 하루에 적어도 네 번은 들었을 정도다. 회사원의 평균 월급이 1만원을 채 못 헤아렸을 당시, 그는 하루 개런티만으로도 3~5만원을 받았다.

그러다 고운봉 등 쟁쟁한 선배 가수들과 경선을 거쳐, 1971년 예총 연예협회 산하의 가수분과에서 2년 동안 위원장직을 역임했다. 설득과 투쟁, 바로 원초적 형태의 정치였다. “세금, 사회적 대우, 위상 향상 등 가수들이 직면해 있던 예술외적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나가려 애썼어요.”무대 일선은 일단 뒷전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은 성인 취향의 고급스런 가요인 자신의 노래가 더 이상 새로움이 되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김민기 등의 청년 음악이, 80년대는 조용필이, 90년대는 서태지가, 이후는 댄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후, 그는 하드보일드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 제대로 된 야당이 정권을 잡아야 나라가 된다는 평소 신념이 외화(外化)된 것이다. 1995년 5월, 새 야당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문에 난 전화번호대로 새정치국민회의측에 동참 의사를 밝혔다. “정말 우발적으로 이었어요.”경기 안양 동안갑(甲) 지역구에서 제 15대 국회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여의도 입성 이후 4년 임기 동안 문화관광위에서 활동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통합방송법 시비 등을 겪으며 정치판이란 데를 익힌 그는 문화ㆍ언론 분야에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 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라이브 클럽 합법화. 시시콜콜한 규정을 답습해 진정한 공연 문화를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법안이 그의 주도로 개정되기 이른 것이다. 요즘은 너무나 당연시 되지만, 클럽등지에서 어떤 형태로든 공연이 가능해 진 것은 바로 그의 덕이다. 16대 때는 갑ㆍ을로 나뉘어 있던 지역구가 합쳐지는 변수를 당해, 공천을 받지 못 한 그는 정치를 마감했다.

- 씁쓸함 남긴 4년간의 외도

“나는 가수 최희준이란 데서 하나도 좋아진 게 없었어요. 가수로 있을 때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세비에다, 이른바 후원금 혜택도 못 보는 초선 의원으로 여의도 경험은 마감된 거죠.”4년 경험은 좋은 추억이었다지만, 결국은 씁쓸한 외도담(外道談)이었다.

그에게 요즘 탄핵 정국을 물어 보고 싶었다. “정치가 바뀌어 나가는 고통의 순간이죠. 아주 힘든 변화의 과정이지만 소용돌이속에서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국민의식이 정치보다 앞서 있으니까.”여지껏 독재 집권당을 향한 투쟁에만 익숙해 온 야당이 비로소 협력ㆍ대화ㆍ조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번 사태로 고질적인 돈 정치 관행은 바뀔 겁니다.”

정치인에로의 변신보다 더, 본질적으로, 그를 거듭나게 한 일이 있다. 1990년 천주교 신자로 ‘鞭?飜身)’한 것이다. “하느님과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지만, 보다 솔직히는 어떤 여인을 다시 사랑하게 된 때문이었다. 암에 걸린 부인을 투병 9년만에 하늘로 보낸 그는 종교가 필요했고, 아직 처녀로 있던 현재 아내를 마침 성당에서 만났다. “내가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앞에 나타난 거예요. 곧 바로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집요한 애정 공세를 펼쳤죠.” 현재 결혼 14년째인 이들 부부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자식으로 두고 있다.

- 평생을 재즈정신으로 살아온 그

지금껏 그의 목청으로 녹음된 신곡은 240여곡. 그들 노래 대부분은 현재 40~60대 한국인들의 원체험으로 스며 들어 있다. 공연을 코앞에 둔 그는 새삼 다짐한다. “나는 내 노래의 원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무엇보다 아직도 나는 노래가 좋아요.” 아마도 5월께는 미국 순회 공연길에 오른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젊은 기획자들은 지방 투어를 제의해 오고 있고, 신진 작곡자들도 그의 스타일에 맞는 새 작품을 준비중이다. 무엇보다 전국에 산재한 문예 회관들은 여전히 그의 라이브를 청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우발적이었어요. 노래 한 것도, 정치 한 것도. 평생을 즉흥, 재즈의 정신으로 살아 왔다고나 할까요?” 붕어빵은 아직 따뜻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3-24 22:11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