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하고 방대한 해외시장 다리 놓기죠"국내 수출업체의 해외진출 길라잡이

[직업의 세계-36] 수출지원 코디네이터 고상영
"잡다하고 방대한 해외시장 다리 놓기죠"
국내 수출업체의 해외진출 길라잡이


행사 2시간전, 갑자기 서버가 다운되어 버렸다. 2002년 5월 7일 아침 8시. 고상영(32)씨에게 일어난 일이다. 고씨는 이날 코엑스에서 큰 행사를 준비중이었다. 국내 최초로 인터넷 화상 채팅을 통해 국내의 수출업체들과 해외의 바이어들이 상담하는, 자못 실험적이고도 중요한 행사였다. 성공만 한다면 국내 수출기업들의 경제적 비용과 시간, 노력의 낭비를 대폭 줄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거의 넉달에 걸쳐 준비한 결과가 심판대에 올라 있었다. 설치된 컴퓨터가 약 60대, 각 컴퓨터 모니터 옆에는 동시통역사 60명이 각각 1대1로 대기중이었다.

그런데 행사 개막 2시간전, 갑자기 서버가 다운된 것이다. “ 그땐 정말 암담했습니다. 기술진의 작업으로 곧 복구하긴 했지만, 그 외에도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여기저기 있었지요. “

첫 채터로 예약돼 있던 것은 중남미권 바이어들이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지나도 대화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급히 현지로 전화를 돌린 고씨. 엉뚱하게도 그들이 다른 방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 조마조마한 두시간의 씨름 끝에 다행히 행사는 순조롭게 개막돼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인터넷 상담은 해외쪽에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이날 무대 이후로 현재는 수출업체들에게 상용화되어 쓰이고 있다.

“그 외에도 외국측의 인터넷 회선이 불안정해 갑자기 통신이 끊긴다든지 여러 일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별 문제없이 잘 끝났습니다. 제게도 참으로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 대규모 해외프로젝트 발국·진행

고씨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즉 코트라(KOTRA)에서 일한다. 현재 시장개발팀 과장을 맡고 있다. 코트라는 국내 기업들의 수출업무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국내외에 많은 무역관을 포진시킨 가운데 수출업체들의 해외시장진출을 돕고 있다.

고씨가 소속된 시장개발팀은 그 중에서도 주로 전략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진행하는 일을 맡고 있다. 각종 정부 조달사업이나 부품 아웃소싱, 대형 SOC, 재건사업 등 대개 국가적 규모의 대단위 사업을 찾아 그 틈을 공략해 국내 수출기업들을 참여시키는 일리다. 한마디로 국내 수출기업들을 해외시장과 맺어 주는 매치메이커 역할이다.

이에 필요한 ‘잡다하고도 방대한’모든 일이 다 이들 손에 놓여 있다. 최종 결과는 주로 설명회나 상담회를 통해 이뤄지는데, 준비기간을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설명회는 1달, 상담회는 2달쯤 걸린다. 프로젝트당 2명이 1조로 호흡을 맞추며 부지런히 뛰어야 일정을 맞출 수 있다. 행사의 기획에서부터 참가할 기업을 찾고 선정하는 일, 면담 방법을 정하고 예약하는 일 등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결해야 한다. 행사때 쓸 영문 프리젠테이션 자료에다 언론 홍보용 자료, 내부적으로 올릴 환영사와 오찬면담 자료 등 영어와 우리말을 수시로 넘나들며 작성해야 할 보고서도 많다.

행사를 위한 동시통역사 섭외, 방송장비 등 행사장 세팅, 초청자와 참가자의 사전 참가여부 인과 안내, 관련된 정부 부처나 유관기관과의 정보 공유 등 행사가 임박하면 일거리는 더 늘어난다. 더 사소하게는 외국인 초빙자들과의 오찬면담때 이용할 식당과 식사 문제도 빠짐없이 챙겨야 할 점검 항목이다.

평소에는 저녁 8시쯤 퇴근하지만, 행사가 임박하면 새벽 2,3시 귀가가 보통이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호시절이다. 수출상담회만 열렸다하면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준비하고도 어딘가에는 꼭 돌발상황이 터지는 것이 현장이다. 내근이라고는 하지만 편안한 내근이 아니다.

“ 저희 또한 그렇게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쪽은 아닐겁니다. 특히 저희는 공기관이면서도 연봉제를 취하고 있는데, 상반기, 하반기별로 실적이나 결과를 끊임없이 평가해 다시 연봉에 반영하는 등 평가 시스템이 상당히 철저합니다. 조금만 신경 안 쓰면 심할 경우 같은 경력의 동기와 몇백만원씩 연봉액에 차이가 벌어지기도 하지요. 기본적으로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

지난 22일엔 세계 5대 방위산업체들의 전자상거래에 국내 기업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미국무부 관계자 등 큰 손님들도 많이 초빙된 이 행사를 준비하는 데에도 쉽지 않았다. 이 거대한 구매처와 연결해 줄 국내 방위산업체 기업들을 찾느라 국방부와 IT업계 등에 일일이 자료를 요청하고 뒤져 어틥潁?자리를 주선했다. 참가 인원이 약 120명. 그러나 평소 규모에 비하면 고씨에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9년차의 구력이다.

- 지원업체 계약성사땐 큰 보람

“ 여기에선 자신이 한 일이 즉각즉각 실체로 나타납니다. 업체를 지원한 지 얼마간 시간이 지나보면 실제로 그 업체에 비즈니스가 발생해 성과가 나오는 걸 볼 때 참 뿌듯합니다. 입사한지 1년쯤 지났을 때 깨달았던 것도 ‘이건 대충해서는 안 될 일이구나’하는 거였지요.”

사실 개인의 소속부서란 이들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2,3년을 주기로 계속 부서순환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업무를 고루 익히게 하는 것은 해외 무역관 근무를 염두에 둔 훈련이기도 하다. 실제로 3,4년을 주기로 한번씩 해외 근무가 돌아온다. 고씨 역시 베이징 근무를 거쳐 현재의 시장개발팀에 배속된 것이 작년 일이다.

고씨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 부친의 권유로 95년 코트라에 입사했다. 처음엔 해외조사팀에 배치돼 국내 수출업체들의 문의를 받아 해외 시장 정보를 조사하고 알려주는 등의 일을 했다. 워낙 광범위한 품목들을 다루다보니 때로는 관련 전문 지식이 부족해 바이어의 요구를 잘못 읽고 엉뚱한 업체를 연결해주는 등 실수도 많았고, 혼도 많이 났다. 선량한 업체들이 간혹 사기를 당해 거액의 돈을 떼이는 일도 현장에서 지켜봤다.

“ 이미 문제가 터졌을 땐 저희로서도 어떻게 도와드릴 방법이 없지만, 그래서 더 애가 타고 너무나 화가 나기도 해요. 얼마전에도 카라치에 수출을 했는데 돈을 못 받았다며 전화를 하신 분이 있었어요. 그럴 때 참 마음 아파요. “

중국 연수와 중국실 근무를 거친 뒤 5년차때 베이징 무역관으로 발령을 받아 첫 해외 근무를 맞게 되었다. 발령 전만 해도 그는 현지 근무에 대해 적지않은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 그동안 익힌 업무들을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의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베이징 근무는 그 간의 생각을 대폭 바꾸어 놓았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도 만만치않았고, 현지의 업무는 예상 이상으로 힘들고 넘쳤다. 특히 그곳은 중국시장 진출붐까지 더해 고국에서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방문객들이 연일 줄을 이었다. 대기업 경영자에서부터 남대문 시장에서 모자를 파는 아저씨까지 방문객층도 다양했다. 주업무외에도 수시로 이들의 요청을 받아 바이어 행방을 찾아주거나 시장을 안내하는 등의 일로 24시간 비상대기상태처럼 살았다. 출퇴근 시간도 없었고, 주말이나 휴일에도 쉬지 못했다.

“ 그분들 입장을 생각하면 아무리 휴일이고 피곤하더라도, 또는 제 개인적인 사정이 있더라도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거지요. 한번은 그렇게 일요일 오후에 또 불려나가 시장을 안내해드리고 돌아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도 있어요. “

위장병에 편두통, 중국 특유의 기후조건으로 인한 피부염까지 앓았다. 일에 점점 지쳐가면서 결국 사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거의 굳힌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리게 된 건 부친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 네 뒤에서 같은 길을 걸어올 후배들을 생각해보라, 지금 힘들다고 손을 떼면 네 자신에게도 패배하는거다. 정 그만두더라도 임기는 마치고 들어와서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그럼 일단 임기는 끝내고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다시 변한거지요. “

2002년 중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조사업무를 맡으면서 지역전문 사이트를 처음으로 만들어내 활성화시켰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정보기획 업무를 맡게 되었고, 코엑스에서 성공적으로 치른 화상 채팅 수출상담회도 그렇게해서 치러낸 일이었다. 그 행사만해도 시행전엔 모두가 반신반의한 일이었다. 내부에서조차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고씨 자신도 과연 성공할까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반문하고 고민하며 다듬어 간 길이었다.

- 사명감 없인 버텨내기 힘든 일

힘들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남편과 생후 3개월 된 아들 등 든든한 가족이 있지만, 사실상 이산 가족이나 다름없다. 아기는 시부모님 곁에, 부군은 지방 파견근무로 각각 떨어져 지내다가 주말에서야 한번씩 상봉한다. 올 여름쯤이면 남편이 서울로 복귀할 것 같긴 하지만, 오롯이 세 가족이 모여 사는 꿈은 여전히 요원할 것 같다. 얼마 뒤엔 아내인 고씨의 해외 근무 차례가 또 다가오기 때문이다.

국내 공기관중에서도 가장 경쟁률이 치열한 이곳에 힘들게 들어서고도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여성중 상당수는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바깥 젊은이들의 환상과는 달리 해외근무는 이들에게 가족의 의미와 인생관을 되묻게 하는 진지한 현실이다. “ 외국에 갔다왔다는 것만으로도 부럽고 좋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코트라 근무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내가 왜 이 일을 원하는지, 이러한 근무여건이 내게 정말 잘 맞을지 충분히 생각하고 선택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이 봄도 그에게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5월에는 중화권 정부조달 SOC 대형 협력파트너 초청 상담회가, 6월에는 IT산업과 관련된 EU 정부조달 상담회 등이 연이어 대기중이다. 중국과 대만의 경우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 등 앞으로 다가올 큰 프로젝트 발주 계약자들을 겨냥해 미리 우리 기업들을 참여시키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당장 다음날에 있을 설명회 준비로 바쁜 고씨. 마지막 체크리스트로 적어둔 15줄의 항목중 오전까지 겨우 석 줄을 지웠다고 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태산같았지만 차마 더 붙들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코디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책임감을 항상 느낍니다. 가능하다면 코트라나 저를 만나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답을 얻을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글ㆍ사진 정영주/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4-27 22:05


글ㆍ사진 정영주/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