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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석] 한글문화연대대표 김영명 교수
우리말의 생채기를 고발한다
영어 망령에 휩싸인 한국인, 영어지상주의 사라져야


1990년의 영화 ‘토털 리콜’에는 실제 체험과 꼭 같은 기억을 뇌 속에 심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10여년 뒤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또 어떤가. 영화의 대전제는 인간이란 존재들은 기계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매트릭스)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숙주일 뿐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주체와 객체가 극단적으로 혼동 내지는 착종돼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이라는 점이 두 영화의 저류에 흐른다. 가치가 뒤바뀌고, 헛 것(또는 비본질적인 것)이 행세하는 전도 현상이 헐리우드적 SF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일까? 바로 우리의 일상이 그런 것일진대.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현재 한국인이 깃들어 사는 존재의 집은 찌그러졌고 지금도 오그라들고 있다. 그것은 ‘세계화’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천연덕스레 펼쳐지고 있는 그 같은 상황을, 한글문화연대 대표 김영명(51ㆍ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국제학 대학원장)교수는 좌시하지 않았다.

이미 2000년, 김 교수가 펴냈던 저서에는 제목에서부터 문제 의식은 선명했다. ‘영어 사대주의 뛰어넘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던 책의 제목을 보면 충분히 짐작 갈 만한 일이다. ‘나는 고발한다’.

본디 이 문구에는 격렬한 시대적 함의가 깔려 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국민을 인권 대 민족주의라는 첨예한 대립속으로 내몰았던 ‘드레퓌스 사건’ 당시 문호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부쳤던 격문의 제목(‘ J ’accuse’)이었다. 책 거풀을 넘기며 본문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실렸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불케 하는 의분마저 감지된다.


- "우리는 '너훈아 인생'을 사고 있다"





그는 “우리 한국인 모두는 ‘ 너훈아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노래를 잘 하고 아무리 나훈아와 비슷해도 끝까지 아류를 벗어나지 못 할 짓을, 영어를 둘러 싸고 답습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한국인들이라는 질타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느닷없이 ‘세계화’를 국가의 당면 과제로 내세우더니, 그것은 영어를 해야 산다는 실천 지침으로 둔갑했다. 영어 망령은 급기야 2000년 정초 ‘조선일보’를 필두로, 앞으로는 영어를 못 하면 인간 취급을 못 받기라도 할 것처럼 한국인을 주눅 들게 한 공격적 영어 캠페인의 행태로 계속되고 있는 바다.

이 땅의 시대 정신이라 해야 어울릴 법한 영어지상주의는 지금도 형태를 바꿔가며 욱일승천중이다. 김 교수가 가만 있을 리 없다. 그것은 2000년 2월 20일 행자부의 시민단체지원금과 벤처기업기부금 등의 도움으로 순수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www.urimal.org)’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이끌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일 지 모른다. 250명의 유료 회원과 3,000여 네티즌을 열성 회원으로 두고 있는 이 단체의 수장을 또 다시 분발하게 한 일이 최근 벌어졌다. 4월 말, 서울시가 슬쩍 내 놓은 ‘영어 상용화 정책’.

서울이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외국인 투자를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영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요지다. 거기에는 “2006년 이후, 간부 회의를 영어로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명박 시장의 구상과 함께 올해 안으로 학교나 관공서 등에서는 영어만 쓰고 돈도 달러로 받게 한다는 등의 세부 조항이 뒷받침돼 있었다. “외국의 투자자문회사가 영어 타령을 하니 국내 관료가 얼씨구나 맞장구 쳐 빚어진 악순환이 답습되고 있는 거죠.” ‘동북아 허브’론처럼 경제라는 잣대만으로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려 하니 영어 지상주의라는 논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 그 점에서는 여건, 야건 다를 바 없죠.”

“일본이나 싱가폴 타령은 무지의 소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일본의 경우 영어공용화론이 3년전, 그것도 정부 보고서 차원에서 나왔다는 것. 한술 더 떠 싱가폴의 예를 드는 것은 그곳이 엄밀?말해 식민지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탓이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도 이 곳은 영어 문제가 나오면 다들 숨 넘어 가는 소릴 해 대는가? “결국 자발적으로 식민지가 되겠다는 말인데, ‘문화력’의 문제죠.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돈을 번다는 보장도 없?일인데, 그것은 이 땅의 지도층이 해외 선진국의 상층부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예요.”

- 왜 언어식민지가 되려 하는가



그는 “ 다분히 진실을 호도하는 공용화란 말 대신 아예 ‘상용화’란 말을 쓰는 게 훨씬 솔직하고 당당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강조한다.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는 수 많은 약소국들의 주권을 침해하고 소수 언어를 죽여 가는 현실”이라고. 코드나 취향 같은 막연한 이유를 내세우지 말고, 먼저 영어를 공용화 했을 때와 그렇지 못 했을 때의 차이를 수치적으로 제시해 보라며 정부 발상의 허를 찔렀다. 바로 지금,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영어 열풍과 영어공용어론이 여실히 입증하는 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힘의 논리, 곧 정치이다.

21세기 한국 상공을 어지러이 배회하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해 그는 일축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영어 공용화론을 두고 한국만큼 범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곳도 없다는 것이다. “월드컵 개최국이니 뭐니 해도 (우리에게는)근본적으로 소국 근성이 있는 거죠. 영어 공용이니 경제특구니 하는 주장의 기저에는 집단심리적인 무엇이 깔려 있어요.” 모화사상 - 친일파 - 대미사대주의 - 영어공용화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라는 지적.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부터 광풍은 불어 왔나? “자, 보세요. 어디, 영문학자들이 영어 공용화를 주장합디까? 그런 주장 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자 아니면 행정관료죠.”마치 사대부가 한문만 썼던 것처럼, 고급공무원이나 사회적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구별짓는 도구로 영어를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반가운 자들은 개발론자, 곧 시장주의자이다. 왜? “영어는 곧 돈이니까요. 영어 공용화론은 결국 그들의 힘에 휘둘리는 밑도 끝도 없는 정신 나간 짓입니다.”

문화의 힘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는 본인의 표현을 따르면 “이질적 정치학자”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국어 사랑은 자연스럽게 배태됐다. 원인 제공자는 문학평론가들이었다. 서울대 외교학과(73학번) 재학 시절, 그는 그들의 알 듯 말 듯한 멋있는 말들, 예를 들어 ‘…에 다름 아니다’라거나 ‘…의 지평을 열다’ 등의 표현이 결국 외국어의 표현을 어설프게 본뜬 엉터리 한국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들을 불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믿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 같은 판단은 정확한 생각이란 쉬운 말과 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과 궤를 같이 했다.

그 같은 깨달음을 준 것은 서울대 김현 교수의 덕이 가장 컸다. 우리 문학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학자답게, 국어를 한국어답게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은인이 바로 고 김현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의 서가에 김현-김윤식 공저의 ‘한국문학사’가 이제는 너덜너덜해졌지만,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다. 그를 한글사랑이라는 외길로 이끈 책에는 또 ‘우리 글 바로 쓰기’(이오덕 지음)와 ‘아름다운 우리말 사전’(김정섭 지음) 등이 있다. 영어는 지상의 언어 중 최대의 포식자이고 약탈자이며, 영어화는 곧 식민지화라는 현재의 지론이 배태된 배경에는 그 같은 이력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 한글사랑 신념으로 배태된 새로운 학문



사회와 문화를 포괄하는 ‘우리식 정치학’을 지향한다는 그의 독특한 학문적 태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한국적 상황에 대해 우리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사회의 타성화ㆍ제도화 때문에 힘들 거라고 전망돼요. 기존 학문 체제의 완고성, 논문지상주의, 실적주의 같은 것들 때문이죠.” 한글 사랑의 신념으로 새로운 학문 양식이 이렇게 배태되고 獵? 이화여대 정치학과 김웅진 교수 등이 그의 한국적 정치학론에 동지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화의 힘을 강조한 정치학자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일찍이 주목한 그는 지금 정치학의 새 지평을 열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바로 ‘언어 정치학’이다. 언어가 강제력과 동의라는 절차를 거쳐 헤게모니를 획득해 가는 메커니즘을 정치학적으로 풀어 보자는 것이다. 곧 빛을 볼 저서 ‘단일사회의 한국, 그 빛과 그림자’는 새로운 접근법의 정치학이 통일 한국을 위한 모델이 될 것임을 규명할 전망이다.

학계 주류의 완고한 벽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는 그에게 남겨진 실천 과제일 것이다. 이미 그는 ‘고쳐 쓰는 한국 정치사’(우리문화사 刊),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오름 刊) 등 기존의 정치학 관련 저서 곳곳에도 주체적 태도를 강조해 왔던 바다.

“국어 운동은 결국 정치 운동일 수 밖에 없어요. 힘과 돈을 가진 쪽은 우리 국어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정당으로 보자면 민노당과 가장 가깝죠.” 한국의 지배층은 언제나 외세의존적이었고, 결국 친미사대 영어숭배론자들이라는 공식은 불변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러므로 지극히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함의를 짙게 깔고 있다.

그의 글, 한글의 오늘, 무엇보다 한글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홈 페이지를 클릭해 볼 일이다. 그를 중심으로 온·오프라인 회원들 사이에서 오가는 한글 사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니. 서울시의 ‘ 영어 상용화 정책’을 놓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응해 나갈 지에 대해서도.



장병욱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4-05-0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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