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무색한 사유의 열정정년 앞두고 동서양 아우르는 대작 펴낸 노철학자

[한국 초대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형효 교수
세월이 무색한 사유의 열정
정년 앞두고 동서양 아우르는 대작 펴낸 노철학자


“일반적 철학 교수와 달리, 여행을 많이 한 덕분이랄까요?”

아닌게 아니라 길이 만만하지는 않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자택에서 판교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까지 일상의 주된 동선인 김형효(64) 선생. 오전 7시 기상 – 8시 30분 출근 - 오후 7시 30분 퇴근 – 저녁 식사 – 9시 뉴스 시청 – 12시 취침. 사람들이 시계를 맞출 정도로 정확했다는 철학자 칸트의 반복적 일상을 언뜻 연상케 하는 정확한 나날이다. 그런데 그걸 갖고 여행이라고는 하지 않을테고….

그가 말하는 바 여행이란 ‘지적 편력’과의 동의어이다. 사유 하기를 업으로 하는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서 “여행을 많이 했다”는 것은 사물과 시간의 이치를 궁구(窮究)하기 위해 주유(周遊)해 온 궤적이 길다는 뜻일 터. 6월 17일 조계사 옆 불교대학에서 갖기로 한 특강 ‘불교와 프랑스 철학의 만남’은 기나긴 사유의 여정에서 잠시 닻을 내려 놓는 시간이리라.

‘데리다와 불교’. 두 시간 가까이 펼쳐질 그 날 강의의 제목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는 언어의 속성을 논한 데리다의 ‘ 문자학’이 불교에서 말하는 이법(理法ㆍ진리)과도 통한다는 이치를 설파할 자립니다.” 하이데거를 주제로 했던 이전의 강연보다 불교쪽으로 더 접근한다. 일요일이면 서울 대치동의 금강선원으로 가 마음을 갈무리 하는 시간과도 상통하는 주제다.


- “나는 여전히 길 떠나는 중”

동서양의 종교적ㆍ철학적 사상을 모두 끌어 안는 독특한 사유 체계로 이 ‘ 속도의 시대’를 반성하게 해 온 선생이 방금 또 하나의 저작을 자신의 저서 목록에 하나 더 추가시켰다. 17번째 단행본인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청계刊). 유가, 도가, 불가 등 동양 철학은 물론 토미즘(13세기 기독교 사상), 스피노자, 하이데거, 융, 라캉 등 서양 철학까지 융해시킨 저작이다. 전문화ㆍ미시화의 길로 내닫고 있는 이 시대의 허를 겨냥한 듯, 방대한 사유의 분량만으로도 듬직한 느낌을 가져다 주기에 족하다. 계명대 철학과 이진우 교수가 “ 다양한 질문들로 이 속도의 시대를 반성케 하는 유목민적 사유가 이채롭다”고 평한 대로다.

선생은 철학적 문제를 진실하게 탐구하고 성실하게 글을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으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강대 재직 시절, 언론사의 청탁으로 시론류의 글을 많이 썼던 그가 “발심(發心)을 해서” 굵직한 저서를 본격 저술한 것이 1982년부터 몸담아 오고 있는 정문연 시절이다.

국내에서 구조주의가 막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와 이후 스테디셀러가 된 ‘ 구조주의의 사유 체계와 사상’(1989)을 기점으로 해, 박사 논문을 수정ㆍ증보한 ‘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 철학’, ‘베르그송의 철학’, ‘메를로 퐁티와 애매성의 철학’, ‘맹자와 순자’, ‘물학ㆍ심학ㆍ실학’등 더러는 절판ㆍ증보된 철학 서적이 모두 그의 저작이다. “나는 극과 극을 동시에 파고 들어갔어요. 진리의 추구란 끝없는 여행이니까요.”그것은 교조화ㆍ박제화의 길로 내닫기 십상이었던 대한민국의 철학계에 던져 주는, 끊임없는 굴신 운동이기도 했다. 18권에 달하는 단행본이 그 결정체다.

진리 발견의 기쁨에 못 이겨 옷을 홀랑 벗었다는 사실도 잊어 버린 채 “알아냈다(에우레카)!”라고 외치며 거리를 뛰어 다녔다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에 버금 가는 법열의 기쁨을 그 역시 맛 보았다. 그것은 어린이 같은 희열이었다. “주자가 말했던 수지무지 족지도지(手之舞之 足之蹈之)의 경지였어요.” 손발을 흔들며 춤추고 싶은 경지를 삭이느라 애써야 했을 정도라니.

“이 세상의 이치는 차연(差延)의 법이죠.”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서로 연계돼 있는 세상의 심오한 이치를 말함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緣起法)의 심화다. 그의 세월은 존재냐, 소유냐, 초탈이냐를 화두로 잡고 씨름했던 시간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58학번으로 철학도의 길에 접어 든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과연 존재한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전후의 비참한 분위기와 합쳐져,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저의 지적 호기심이 맞닿은 거죠.”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에 깊이 경도된 그는 4학년 때 천주교에 귀의했고, 보다 원류에 접하기 위해 불어를 쓰는 벨기에 루벵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 해외 장학금과 공군사관학교

군복무중이었다. 루벵대에서 지급하는 장학금 제공 기간에 맞추려다 보니, 제대전에 유학을 결행하게 된 것. 공군 장교로 병역을 이행하고 있던 그는 사비 유학을 인정하는 규정에 따라 이역으로 날아 간 것. 문자 그대로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1969년 돌아 와 대위 계급장을 달고 공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쳤다. 형이상학이란 실제로는 정신 교육.

동서를 망라하는 학문 세계는 물론, 군과의 인연이 같다는 점에서 독특한 이력의 학자로 분류될 만하다. 교수로 근무한 6년에다 유학 가기 전 2년간의 입대 기간을 보태면 모두 8년을 군대(공군사관학교)에서 복무한 셈이다. 특히 유학 갔다 와서의 6년은 동양 철학에 심취할 여유와 기회의 시간이었다. 대학 시절의 은사 열암 박종홍 선생의 가르침대로 한문 공부에서부터 시작, 동양 철학에 심취할 뜻밖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철학이 자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먼저 천착한 것이 공맹사상이나 주자학 등 유학 계열이었다. 양(洋)의 동과 서를 오가는 특유의 방법론이 배태된 것 또한 바로 그 시기였다. 못 다 한 군 복무 기간이 출ㆍ퇴근 빼고는 아무런 통제가 없었던 덕택에 그는 군 복무라는 현실적 과제와 신천지(동양철학) 개척이라는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 “철학이란 자유가 없으면 못 하는 거예요.”바로 그 자유를 얻기 위해 그는 아득한 우회의 길을 걸었던 것.

동양 철학이라는 신천지는 공사 복무 이후 서강대 전임으로 5년 근무하면서 더욱 다져져 갔다. 현대 철학을 중심으로 강의해 가던 그는 한국철학사 등 동양 철학에도 강좌를 할애했다. 서양철학자가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파격이 그렇게 이뤄졌다. “바깥 출입 않고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렸죠. 정문연의 유승국 원장 등을 한 달에 한두어 번 씩 찾아 가 열심히 공부도 하면서.”율곡과 퇴계는 물론 정암 조광조나 화담 서경덕 등 조선 거유(巨儒)와의 만남이 그렇게 이뤄졌다.


- 경계인의 떨림으로, 유목민적 사유를

그 기간은 동시에 서구 철학이 심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 등 구조주의에 대해 더욱 파고 들었어요 .”당시 구해 온 책 ‘그라마톨로지’ 등을 기조로 1996년 민음사에서 펴녔던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 바로 그 와중의 산물이었다. 당시 후기 구조주의에 매료돼 있었던 그는 보다 풍부한 자료를 위해 1주일 동안 파리행을 자처했다. 철학 교수와의 대담은 물론, 소르본 대학 앞 책방을 뒤져 10여권을 책을 사왔다. 책마다 적어도 세 번씩은 봤다는 선생은 또 다시 발견의 환희심에 빠진 것. 명시적으로는 동양적 사유를 언급한 적 없었던 데리다의 사유에서 동양적 요소를 적시해 낸 것은 선생의 몫이었다.

“이번에 낸 책은 그 간 사상의 여정을 압축했다는 것 뿐 아니라, 제 생각을 처음으로 본격 표출시킨 데서 의미를 찾습니다.” 유학 시절 당시 은근히 나타나던 동정적 시선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또 국내 학계에 만연한 사대주의, 한국 학자를 도외시하고 보는 태도(선생은 그를 가리켜 ‘수입상적 태도’라 했다) 등의 거북살스런 상황은 변방국이라는 자의식을 부추겼다. 업(業)이라 했다. “한국이라는 특수성, 철학이란 보편성 사이의 임계선상에서 항상 동요하고 고민해 왔어요.” 어쩌면 저런 것이 진정한 경계인의 모습 아닐까. 고교 2학년때 부친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기절 초풍할 정도로” 빈한했던 시절, 서양ㆍ동양 철학, 군대ㆍ대학 사회의 경험 등 그의 삶에는 너무나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그 복잡다단한 시간들을 관통해 낸 것은 사유의 힘이었다.

“세미나에서도 대화가 안 될 만큼, 한?사회는 대화 불능의 사회예요. 너무 감정적 양상으로 흐르고 있어요. 극단적이죠.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감정들에 휩싸여 있죠. 열이 많아도, 너무 많은 사회예요. 열이 많으면 수술도 못 한다 잖아요?” 현재 한국 사회를 보는 그의 소회다. “절대 선이란 엄청난 독기를 품는 법이죠. 현명한 사람, 현명한 역사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 없이 되돌아 보는 법이죠.”

인연의 끈이란 연속적이고도 묘하다. 서강대 전임은 공사때 강의 나간 인연으로, 정문연과의 인연은 서강대 강의 당시 한국 철학을 연구할 요량으로 시작된 것이었으니. 그에게 그 끈은 선연(善緣)이었던 것 같다. “심한 지적 편력, 이것이 바로 철학이죠. 죽을 때까지 묻고 탐구하는 거죠.”내년이면 정년 퇴직하는 선생은 “이제 남은 것은 공부, 수행, 책 쓰기뿐”이라고 말했다.

6월 중순께는 선생의 18번째 단행본이 나온다. 제목이 은근히 사람을 잡아 끈다.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刊).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6-16 11:18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