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침은 내게 새로운 희망세계 최초 히말라야 15좌 등정, 아침공기는 정신과 육체 정화

[나의 아침, 나의 삶] 산악인 엄홍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침은 내게 새로운 희망
세계 최초 히말라야 15좌 등정, 아침공기는 정신과 육체 정화


‘엄홍길’이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봉우리 15좌를 모두 오른, 불굴의 산악인 정도일까. 화려한 등정 기록만으로, 그를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는 인간의 한계점, 그 거대한 산(山)에 끝없이 도전하면서 세상에 희망의 깃발을 꽂았다. 특히 숱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가 맞이한 ‘아침’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 산은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

서울 북부와 의정부에 걸쳐 있는 도봉산. 엄홍길 씨에게 산은,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였다. 부모님이 도봉산에서 터전을 잡고 장사한 덕분에, 어릴 때부터 집 마당이 곧 산이었던 것. 요즘도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산이다. 숲 사이로 들리는 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은 저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몸은 힘들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지요.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모르고 막연한 불안과 초조함이 있지만 아침의 기운을 받으면 새로운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그는 아침에 불어오는 신선한 산 공기를 맡으면 정신과 육체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살아 숨쉬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산에 오를 때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차리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도,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면 그런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새롭게 재무장하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만약 아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힘들고 위험한 산을 오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엄홍길 대장은 2000년 7월, 14번째로 K2를 등정한 데 이어 지난 5월 얄룽캉봉(8505m)에 올라 15좌 등정에 성공하면서 세계 최초로 8000m급 15개 봉우리를 완등하는 신화를 만들었다. 작년에는 그 동안 고난과 극한 속에서 정상에 이른 과정과 순간들을 생생히 기록한 ‘8000m의 희망과 고독’을 펴내기도 했다.


- “산은 내 인생의 위대한 스승”

“산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에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도 없고요. 산 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작고 부질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산을 통해 그리고 자연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산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며,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는 요즘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 7시면 일어나 집 근처 도봉산을 정상까지 올라간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짧지 않은 등반이지만 그는 산에 올라가면 ‘새로운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문명 세상에서 풀리지 않은 갈등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들, 고민, 스트레스 등을 산에 오르면서 차분히 정리한다. 그러면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명쾌한 답을 가지고 내려온다. 오로지 산과 자연에 있을 때만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도시 문명에 찌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산에 가라고, 자연을 접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산에 올라 내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자기 자신을 차분히 돌아보고 깨우치는 시간을 가져 보라고요. 그러면 분명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산에서 살았던 엄홍길씨. 그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산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산이 우리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암흑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생명을 선사한 ‘아침’

산소가 3분의 1밖에 안 되는, 8500m 정상 부근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그림자. 예측 불허의 자연 속에서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밤을 지새운다. ‘졸면 안 된다, 졸면 죽는다’ 고 끝없이 속으로 주문을 외면서도 깜박 잠이 들어 버린다. 꿈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따뜻하고 안락한 방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몸은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없고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목은 타고, 숨쉬기도 힘들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암흑 속에서 그렇게 꼬박 10시간 동안 자고 깨는 것을 반복하며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눈을 뜨는데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빛 속에서 발산한 에너지가 온 몸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아래를 보니 주변이 온통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다.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아침이 밝으니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가 구름 사이를 뚫고 사방으로 비치는데 그 에너지가 온 몸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어요. 밤새 얼었던 몸이 풀리고, 온 몸에 피가 새로 도는 것 같은 느낌, 생명을 갖게 한 이 아침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를 겁니다. 위를 올려다 보니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더군요. 마비된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니 신기하게 몸이 깨어나면서 기운이 나더라고요.”

100여m 남은 정상을 기어서 올라간 엄홍길 씨. 정상에 닿는 순간 무릎이 바닥에 구부러지면서 설산(雪山)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순간, 이것은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구름 뿐, 사방 천지는 온통 고요와 적막 그 자체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고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때의 감동과 환희는 지금도 생생하다.

“힘이 남아 있는 한, 걸을 수 있는 한, 계속 산에 가겠다”는 엄홍길씨. 산과 호흡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우리가 진정 소중한 것을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글 / 허주희 객원기자

사진 / 이상민 (프리랜서 사진가


입력시간 : 2004-08-05 14:47


글 / 허주희 객원기자 cutyhe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