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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프라이빗 뱅커의 세계
고객 우선주의로 무장한 똑똑한 '자산관리 마당쇠'
서비스의 A to Z 실현, 금융권의 부자고객 자산관리 전문가




정해원, 이정우, 김동균 팀장(왼쪽부터)



“ 고객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고, 고객이 잠든 뒤에 잠자리에 든다고 할까요….” “ 아니, 우리보다 일찍 일어나는 고객들도 적지 않아요.”

하루 일과가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두 프라이빗 뱅커(Private Bankerㆍ금융권의 부자 고객 자산 관리 전문가)가 잠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둘 다 맞는 말이다. 흔히 금융권에서 ‘집사’(執事)라는 별칭으로 통할 정도로 고객의 일거수 일투족을 꼼꼼히 챙기는 프라이빗 뱅커의 바쁜 업무 속성상 전자도 옳고, 그 프라이빗 뱅커들조차 이따금 감탄할 정도로 부자 고객들이 부지런하니 후자 또한 옳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갈망하는 이 시대, 수십 수백억대 부자 고객들만 전담하는 프라이빗 뱅커가 은행권에서 각광 받는 업종으로 뜨고 있다. 초우량 고객에 주목하는 부자 마케팅, VIP 마케팅 등이 일반화하면서 은행들도 경쟁적으로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ㆍ이하 PB) 사업 부문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봄 한미은행을 인수, 국내 PB 시장 본격 공략에 나선 세계적 금융 그룹인 씨티은행의 ‘인재 사냥’도 프라이빗 뱅커의 주가를 띄우는 데 한몫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은행원들이 선망하는 최고 인기 부서도 과거의 기획, 국제, 여신 심사 파트 등에서 PB 분야로 급격히 옮겨 가는 중이다. 한 은행에서 얼마 전 신입 직원들을 채용할 때 ‘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면접을 본 응시자의 90% 이상이 ‘ PB 영업을 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는 사례까지 들린다. 가히 프라이빗 뱅커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 ‘파이낸스 센터’ 25층. 신한은행 서울PB센터가 입주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은행 간 격전지의 첨병으로 뛰고 있는 프라이빗 뱅커들을 만나, 그들만의 사적인 세계를 들어 봤다.


- 최정예 알짜고객 왕처럼 모시기



흔히 자주 연락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 단축 키’로 저장시켜 놓는 휴대폰 이용자들을 주변에서 꽤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 1번’은 십중팔구 가장 필요하거나 소중한 존재인 경우가 많은데, 프라이빗 뱅커들 중에는 고객들에게 이같이 1번으로 선택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 일’이 생기면 가장 의지 하고픈 사람들로 여기는 까닭이다. 프라이빗 뱅커와 고객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 좋게 생긴, 푸근한 표정의 이정우 팀장(40). 그는 2주 전 가족들과 꿀맛 같은 여름 휴가를 즐기던 중 고객의 다급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모처럼의 망중한을 방해 받았다는 느낌도 잠시, 그는 금세 ‘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고객의 ‘ 민원’을 깔끔하게 원격 처리했다. “ 저희야 업무와 휴가의 구분이 있지만 고객들은 프라이빗 뱅커를 항상 대기 상태로 아시죠. 때문에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일 처리를 우선적으로 해 드립니다.”

휴가를 아예 고객 가족과 함께 나선 적도 있었단다. 다소 적적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는 여행길의 동반자를 고객이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내용상 업무의 연장인 셈이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정해원 팀장(39)도 고객과 ‘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고객이 함께 나서자고 하면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소는 골프장일 때도 있고 식당일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든 고객이 동행하고 싶어할 만큼 든든한 파트너라는 점이다.

남자다운 용모가 듬직한 김동균 팀장(38)이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 마디 거든다. “ 모든 일정을 고객에게 맞춘다고 할 수 있죠. 프라이빗 뱅커는 항상 고객의 요청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 됩니다.” 늦은 휴가를 곧 떠날 예정이라는 김 응? 과연 완전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프라이빗 뱅커가 이처럼 만사 제쳐두고 고객들을 문자그대로 왕처럼 모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은행이 벌어 들이는 수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 최정예 알짜 고객’이기 때문이다. 주로 예금과 대출로 이익을 창출하는 은행의 속성상, 거액의 금융 자산을 굴리는 PB 고객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는 바로 은행의 경쟁력에 직결되는 요소다. 이정우 팀장의 설명. “저희들은 초우량 고객들을 장기적 관점에서 봅니다. 이런 고객들의 은행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은행의 수익성도 크게 높아지기 때문에 프라이빗 뱅커들이 고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로 ‘ 충성’하는 거죠.”


- 자산관리는 기본, 유언 집행까지

그렇다면 프라이빗 뱅커들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는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질까. 은행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신한은행의 경우 기본적인 예금ㆍ대출 업무에서 주식ㆍ채권 등 투자 상담은 물론이고 세무ㆍ법률 자문까지 자산 관리에 관한 한 없는 서비스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부동산 중개와 컨설팅, 기업 M&A 중개도 해준다. 부자들의 공통된 고민 중 하나인 유산 상속과 유언 집행까지 빠짐없이 서비스 목록에 올라 있다.

“ 평소 지병이 있던 고객께서 갑작스레 몸에 이상을 느끼자,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가족도 친구도 아닌 프라이빗 뱅커인 저였습니다”(이 팀장). “ 캐나다나 일본에 사는 교포 고객이 국내 자산 관리를 맡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 분들을 대신해 제가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매달 월세를 수령하기도 합니다”(정 팀장). “ 골프를 즐기는 한 고객께서 함께 라운딩을 나갈 만한 ‘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해 적당한 분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즘 두 고객은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즐긴다고 합니다”(김 팀장). “ 사실 정해진 서비스 외에도 적지 않은 비공식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저 같은 경우엔 고객들 간에 중매를 선 적도 있습니다. 고객의 재무 상태, 집안 환경 등을 소상히 알고 있는 덕에 대개 양쪽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낳죠”(이 팀장). “ 일상 업무가 무척 바쁜 고객들은 더러 자동차나 골프회원권을 구매할 때도 저희에게 괜찮은 곳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합니다”(정 팀장).

이쯤 되면 서비스의 종합 선물세트이다. 이 많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프라이빗 뱅커들은 그렇다면 만능일까. 일견 그런 측면도 있다. 세 팀장이 가진 자격증을 훑어 보니 대략 금융자산관리사, 투자상담사, 선물거래상담사, 공인재무설계사 등으로 만만치 않은 내공을 자랑한다. 하지만 프라이빗 뱅커가 고객에게 팔방미인처럼 통하는 데는 사실 회사 안팎으로 구축된 ‘네트워크’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고객의 어떤 요청이든 해결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전문가 그룹과 상시적인 공조 체제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김동균 팀장은 이에 대해 “상품에 대한 정보 등 전문성으로 고객에 다가서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갖출 순 없다”며 “고객의 각종 수요에 맞춰 적절한 전문가 그룹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프라이빗 뱅커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은행에서 프라이빗 뱅커를 발탁할 때도 전문적 지식 여부만 까다롭게 따지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선발 기준은 고객의 요청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해줄 수 있는 신뢰성과 성실성이다. 요즘처럼 금융 사고가 자주 터지는 세상에 고객이 거액의 자산을 흔쾌히 맡길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신뢰’가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 신뢰와 성실의 전문직업인

일부 특별한 계층만 고객으로 상대하는 프라이빗 뱅커들이다 보니 무언가 특별한 경험도 있을 법하다. “ 한번은 새로운 상품을 한 고객에게 권해 드리면서 시뮬레이션으로 도출한 수익을 설명했는데, 그 분이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공식이 잘못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재검토 결과 고객의 말씀이 맞는 것으로 나타나 적잖이 당혹했죠. 그 분은 명문대 수리경제학과 출신이었습니다”(이 팀장). “ 고객들 중엔 부동산, 주식 등 각종 경제지식이 상당히 해박한 분들도 많습니다. 경제 현장에서 CEO로 활동 중인 분들도 적지 않죠. 이런 고객들에게는 오히려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대합니다”(김 팀장).

지금 한국 사회는 부자 되기 열풍이 거세지만, 한편에는 부자들에 대한 편견도 엄연히 똬리를 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한 프라이빗 뱅커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들에게는 부자가 될 이유와 微鳧?충분히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초고가 아파트에 살더라도 막상 집안에선 오래된 가구와 가전 제품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고, 밖에서 식사를 해도 5,000원에서 1만원 정도의 간소한 메뉴를 즐깁니다. 그러면서도 남모르게 양로원이나 장학 재단 등지에 10억원이 넘는 기부금을 쾌척하는 분도 봤습니다. 절약이 몸에 뱄지만 쓸 데는 쓴다는 생활 철학인 셈이죠”(정 팀장). 부자들이 아낌없이 돈을 쓰는 곳은 이밖에 자동차, 건강, 교육 등이 꼽힌다. 주로 일신의 안전과 가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시장 상인으로 자수성가한 부자이든,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자이든, 심지어 상속받은 부자이든 또 다른 공통점 몇 가지가 있다. 꼼꼼한 성격에다 자기 절제를 잘하고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라이빗 뱅커들도 고객들에게 많은 자극을 받는다고 한다. “ 부자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 등 많은 점을 배우고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신조가 저도 모르게 강해지기도 했어요” (김 팀장).

세 사람의 프라이빗 뱅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온 답은 각각 ‘ 동반자’(이 팀장), ‘ 네트워크 파트너’(정 팀장), ‘ 믿을맨’(김 팀장). 조금씩 다른 듯하지만 고객 우선주의라는 점에서 셋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김윤현 기자 unyon@hk.co.kr


입력시간 : 2004-08-2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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