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통하는거죠"전통의 목소리와 전위성의 충돌을 조화로 아우른 소리꾼

[한국 초대석] 가객 강권순
"극과 극은 통하는거죠"
전통의 목소리와 전위성의 충돌을 조화로 아우른 소리꾼


운현궁에 추색이 완연하다. 예절 교실에 나온 초등학교 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가을 하늘 아래서 부서졌다. 재잘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권순(35)에게 다섯 살 바기 딸 유진이 생각난 것일까. 묻지도 않은, 지난해 딸이 가졌던 무대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오사카 근교의 숲 속에서 펼쳐졌던 예술제 ‘하큐슈 페스티벌’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했었죠. 유진이와 함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를 불렀는데, 일본 사람들이 어찌나 신기해 하고 좋아하던지….” 평소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으면 철도 채 못 든 아이가 시조창까지 너끈하게 할 정도일까. 가끔 국악 신동이라는 아이들이 하는 판소리나 민요 가락이 아니었다. 어른도 쉬 따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유장한 호흡을 가진 선비의 노래, 정가(正歌)였다.

극과 극은 통한다던가. 그의 자그마한 체구는 그 같은 통설을 최대치로 입증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극 ‘토지’에서 주연을 맡더니, 2000년과 2002년에는 미국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 등지를 누비며 컴퓨터와 함께 만든 공연 ‘Dong Dong Touching The Moon’을 주재했다. 전통의 목소리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전위성이 빅 뱅처럼 폭발하는 자리였다. “나와는 완전 상극이지만 편안한 무대였어요. 극과 극은 통한다 잖아요?”과연 그러했다. 가장 정통적인 것과, 가장 일탈적인 것은 그를 만나 둘이 아니다.


- 전통에 내재된 현대성 끄집어내기

선비들의 도저한 풍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사통팔달로 나아가는 그의 행로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난 해 일본의 전통 연희 부토(舞踏)의 대가 민 다나카(泯田中)와 함께 했던 무대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은 기이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 자리였다. 그는 한 술 더 뜬다. 그 같은 만남을 두고, “오히려 편안하다”고 한다. 그의 행보에서 국악의 미래를 읽는다.

지난 8월 일본에서 치러졌던 ‘하추지만(장기자랑) 엑스포’를 빛냈던 것은 그의 가곡 ‘이수대엽(二數大葉)’이었다. 폐허나 다를 것 없는 극장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배경으로, 현대 무용과 컴퓨터 음악의 한 가운데를 그의 청아한 목청이 예리한 날을 그었다. 한국 전통 예술에 내재된 현대성 덕이었다. 프리 뮤직의 달인, 강태환(색소폰)이나 김대환(타악) 등과 함께 가졌던 즉흥 무대 역시 “참 편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전위에서 노닐 것만 같던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끝으로 왔다. 2004년 1월 11일 일요일, 늘상 타고 다니는 지프차를 몰고 당도한 국립국악원 연습실에서의 7시간. 정재국(피리), 박용호(대금), 이지영(가야금) 등 일가를 구축한 연주인 7명과 함께 만든 음반 ‘천뢰:하늘의 소리’가 거기서 용틀임했다. 오전 11시에 도착해 점심 식사와 세팅 작업 등을 거쳐 일사천리로 2장의 CD가 탄생한 것. “아, 단 한 번, 누군가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려 그 소리가 끼어 드는 바람에 다시 녹음했던 일이 있죠.” 원래, 고수들에겐 말이 필요 없는 법. 한 차례 해프닝 뒤, 녹음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일체의 삭제도, 편집도 없었다.

그 때, 한겨울의 널찍한 연습실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히터를 틀 수 없었다. 청명한 어쿠스틱 음향을 행여 전기적 잡음이 망칠지 모른다는 천려일실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천정 한 가운데에 고성능 마이크 하나만 장착해 녹음하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원 포인트(one point) 스테레오 방식’의 녹음 때문에 연주자들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야 했으니 더욱 썰렁한 광경이었다. 교수급 연주자들이 곱은 손을 호호 불어 가며 연주에 전념하는 모습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음반을 틀고 눈을 감으면 각 주자들의 위치가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러나 녹음만 했다고 음반 작업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천석고황 같은 완벽주의 탓이다. 해설지 역시 녹음 작업에 쏟아 부은 공에 버금 가야 했다. 물어 물어, 영문학도 출신의 시인 김정환을 찾아 냈다. 그 아름다운 시조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번역해 해설서에 수록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유진이를 데리고 가 부탁한 끝에 5개월만에 원고 작업은 끝났고, 완벽주의 탓?자신이 일일이 감수 한 끝에야 이렇듯 세상과 만나게 된 것이다(C&L 뮤직).


-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해외공연

그를 단련시킨 것은 무엇이었던가. 대학생이던 1988년, 유네스코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덕에 일본에서 시조창 공연을 펼쳤던 것을 시작으로 출발한 해외 공연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실질적 은인이다. 그것은 조선 시대 인텔리들의 음악이었던 가곡이 200여년 동안의 동면에서 깨어나는 소리이기도 했다. 동시에 음지 신세의 정악이 발하던 고고성이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악의 이미지란 영화 ‘서편제’나 김덕수패의 사물놀이 등으로 고착돼 있기 일쑤다. 한(恨) 아니면 흥(興)의 세계로 양분된, 이른바 민중의 세계다. 그렇다면 선비나 사대부들에게는 그러한 풍류가 없었을까. 유한 계급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는 방편으로서의 풍류. 휘몰아 치는 장단도, 숨가쁜 사설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공연을 보고 울면서 무대 뒤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7남매속에서 자랐다. 큰 오빠와의 나이차는 무려 스물 한 살인 전형적 대가족이다. “아버님께서 판소리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가곡은 찬성이지만.” 당연히 민요보다는 시조창이 친숙한 집안이었다.초등학교부터 노래로 이목을 모았던 그는 국립국악고가 ‘가곡’ 부문 모집 조항에 국비장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뜸 응모했다. 딸의 당돌한 결심을 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강점석ㆍ姜點錫)을 새긴 목도장을 건네 주었다. 부모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깊은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으”와 “어”가 구분되지 않는 소녀에게 서울의 양반들이 부르던 정교한 가곡을, 학교에서는 선뜻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거문고 연주로 바꾸라며 모 교수는 충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꼭두 새벽, 서울 외곽의 큰언니 집에서 택시를 타고 와 새벽부터 수위를 깨워 학교 연습실에 쳐박히는 것으로 답했다. 수위가 와서 나가 달라고 하던 밤 10시가 퇴교 시간이었다. 1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는 잠시 눈을 붙이는 생활이 계속됐다. 첫 시험에서 85점, 반에서 46등이라는 상상도 못 해 본 성적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2학년 때, 그는 선배들과의 경쟁을 거쳐 동랑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그를 괴롭혔던 문제란 결국 ‘왜 너는 여창 가곡의 통념을 깨느냐’는 것이었다. 예쁘다는 통념의 여창 가곡을 단전에서 나오는 ‘속소리’로 불렀으니 선배들의 지청구를 면할 길이 없었다. 화장 하듯 부르는 여성 가곡은 싫었다고 한다. 서울대 국악과(87학번)에서 B플러스를 못 넘기던 그는 당시 인간 무형문화재 30호 여창 가곡 보유자로 서울대 출강중이던 김월하 선생이 해 준 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네 소리는 힘이 있어 좋다. 곱고 예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을 알아 주는 스승이 있어, 그는 거칠고 모진 길을 헤쳐 간다. 기와 기가 벌거벗은 몸으로 격돌하는 순수 즉흥의 무대에서 시련의 시기는 엄청난 힘으로 변신해 그를 지탱해 준다. 2002년 라오스에서 스웨덴 배우, 프랑스 무용가, 독일인의 스크린 이미지, 미국 조명 기사의 조명 등이 어우려졌던 공연 ‘부다’를 관류했던 힘이 바로 그의 시조창이었다. “우리 음악의 기는 세다는 생각이 들죠. 내가 생각한 대로 외국의 예술가가 춤을 추는 게 재미있었죠. 내 에너지를 못 따라 오는 듯 하긴 했지만.”

대학 시절, 그를 구박하던 어떤 교수를 얼마 전 학교에서 만났다. 앞서 제자의 공연을 본 적 있다며 손 잡고 눈물 글썽였다. “자네가 이렇게 잘 할 줄 몰랐소.” 그는 답했다. “자극 받아서 했어요.” 스승의 속뜻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상하고 있는 셈이다.


- 전통과 이 시대를 융화할 수 있는 작업

가난을 남기고 세상을 뜬 달깍발이의 딸에게 서울은 결코 우호적이지 못 했다. 그가 원수 보듯 하는 먹거리가 셋 있다. 라면, 초코파이, 서울우유. 냉기 가득한 방에서 전기 곤로로 라면을 끓여 먹고 새벽별을 보며 연마한 것은 가곡이 아니라, 시간을 버텨내는 힘이었다. 이번 앨범 해설지에다 애정 어린 글을 실어 준 황병기 선생은 대학 시절, 그토록 가곡에 매달리는 그를 보다 못 해, 한 마디 툭 던졌다.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 아냐?” 당시 그의 말, “굶어 죽지만 않으면 돼요. 이게 너무 좋아요.”

“내 예술의 정점(頂點)이라고요?” 이 질문에, 그는 별로 뜸을 들이지 않았다. “정가를 해서도 밥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죠.”단순 명쾌. 그러나 몇 가지 해 놓아야 할 일이 있다. ‘정가 식으로 소화한 민요’, ‘이수대엽과 컴퓨터의 만남’ 등이다. 진취적 음반 기획자라면 귀가 번쩍 뜨일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잘만 하면 대중적으로 뜰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가 걸어 온 행보와 뭔가 어긋물린다. 크로스오버 쪽의 작업말인가? “결국 제가 걸어 가야 할 길의 시간을 줄여 준다는 의미죠. 전통을 보전하면서도 이 시대와 융화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은 하나의 통과 의례라고 봐요.”정악은 물론, 창작 음악과 대중적 음악 작업을 병행해 갈 생각이다. 물론 가사나 시조 등 정악쪽의 공부도 더욱 깊어 질 것이다.

다짐하듯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자기 전, 세수는 못 해도 노래는 한 번 더 불러야 한다는 믿음이죠.”한 가지 부탁을 한다. “정악은 하늘에 순응케 하는 노래입니다. CD에 수록된 순서를 절대로 바꾸지 마세요.”선비의 노래가 왜 그토록 좋은가? “진짜 재미 없고, 졸려서 좋은 음악이죠.”약간은 바람을 빼 놓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지점를 벗어나면 참세계가 기다린다는 것. 공연의 절정에 이르면 그런 세계와 만난다는 그는 “빙의(憑依)나 육체 이탈 같은 느낌”이라 했다.

10월 1~6일 도쿄와 오사카 등지를 돌며, 정악 ‘수제천’에 가사를 붙인 신작 ‘비천’을 서울시향과 함께 공연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10-05 18:49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