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도전적 삶한국 최초 경영 컨설턴트, 경영전문대학원서 후진양성

[리더탐구 성공의 조건] IBS 컨설팅그룹 윤은기 회장
시대를 앞서간 도전적 삶
한국 최초 경영 컨설턴트, 경영전문대학원서 후진양성


한국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가장 신뢰 받는 방송인. 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오랫동안 KBS에서 생방송 ‘오늘’을 진행했고 지금은 매일 아침 교통방송에서 ‘굿모닝 서울 윤은기입니다’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는 방송인이다. 또 20년 이상 컨설팅을 하고 있으며 IBS컨설팅 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현직 컨설턴트이다.

경영 전문 대학원인 서울과학종합대학의 부총장을 맡아 후진 양성을 하고 있으며, 가장 인기 있는 기업 강사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변신에 변신을 하고 있는 사람, 동시에 그 분야에서 계속적으로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과연 그런 리더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평범한 봉급 생활자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아래로는 여동생이 셋이다. 평범한 집에 7남매인 만큼 그는 별로 풍족하지 못 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새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늘 형들이 쓰다 물려준 교복과 책으로 성장했다. 그 당시 대부분 집안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기만성형인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뭔가 다르고 반짝반짝 했던 사람이었다기 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진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한 그가 대전 최고의 명문인 대전고가 아닌 충남고를 다닌 것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성적도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담임 선생님의 영향으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한 결과 고려대 심리학과에 진학을 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세상 물리에 눈을 떠 지금의 윤은기가 된 것이다.


- 희망과 비전을 불어 넣어준 어머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 김숙 씨이다. 가난했지만 활달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어머니 덕분에 집안에는 늘 활기가 넘쳤다. 어머니는 늘 삶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불어 넣었다. 자성 예언을 통해 자식들이 미래에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항상 갖게 만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의 집에 도인이 들어왔는데 인심이 후한 어머니는 시주 쌀을 듬뿍 주었다. 도인은 집안을 한 바퀴 돌아 본 뒤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앞으로 자식을 많이 낳을 텐데, 자식 중 한 명은 반드시 왕이 될 것이오.” 어머니는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아무리 어려울 때도 이 말만 생각하면 힘이 솟았다. 물론 어머니 살아 생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임종 직전 자식들을 한 명씩 불러 유언을 했다. 그 때 어머니가 그에게 한 말이다.

“우리 집안에서 왕이 나온다는 말을 늘 믿고 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왕이 될 자식은 넌 것 같다.” 자식이 잘 될 거라고 예언을 했고 그를 굳게 믿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다. 사람은 믿는 대로 만들어진다. 훌륭한 자식에게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사람을 신뢰하라. 그러면 그는 당신을 신뢰할 것이다. 그를 위대한 사람처럼 대하라. 그리하면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 줄 것이다." 에머슨의 말이다. 자성 예언은 이만큼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가장 왕성한 젊음을 몇 년간 낭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보면 군대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군대를 가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단연코 지금의 윤은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공군 장교 생활을 했는데 군 생활을 통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당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앞선 군 생활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이 뜬다. 정보 장교를 하면서 정보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인 관계에도 눈을 뜨게 된다. 그가 거둔 성공의 반은 공군에서의 경험 덕분이다. 남들은 피하고 싶은 군에서 그는 금맥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는 공군 출신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김동호 장군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사건이었다. 어머니 다음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날 김해 비행단에서 편히 근무하던 그에게 부관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유유자적할 수 있는 공군 장교에게 부관이라는 것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거절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김동호 장군을 만나는 순간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첫 대면에서부터 김 장군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상관이 본인이 자기 소개를 먼저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이 어디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 집은 어디고, 원래 부관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고, 부관이란 자리가 고달프긴 하지만 한 번쯤 하는 것은 인생이 득이 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경력에 대해서도 쭉 설명을 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관으로 근무할 용의가 있느냐고 정중히 묻는 것이다.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군에서 인간적인 진지함과 진솔함으로 먼저 다가오는 장군에게 윤 박사는 큰 감동을 받고 그와 일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운다. 인격적인 면뿐 아니라 외국어 잘 하는 것, 늘 책을 읽는 것, 영국 신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의 세련된 매너, 솔선수범 등. 그는 김동호 장군을 보면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김동호 장군은 큰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 시테크 개념 정립한 언어의 마슬사

그는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다. 정보 관련 일을 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는 선구안이 발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 시대 흐름에 적극 몸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1983년 그는 최고의 직장이라는 말을 듣고 있던 삼성물산을 과감히 그만 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정보 분야가 뜰 것을 예상하고 정보전략연구소란 컨설팅 분야 회사를 만든 것이다. 모두에게 생소한 컨설팅을 시작했고, 기업 교육으로 분야를 넓히면서 그는 한국 최고의 기업체 강사로 부상한다. 그리고 20년 이상 장수하고 있다.

시작하기는 쉽다. 하지만 계속해서 잘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기업교육처럼 상품의 반감기가 짧은 직종에서는 더욱 그렇다. 계속해서 학습하고 노력하고 진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을 못 하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은 글이 별로 인 경우가 많은데 그는 모두에 능하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그의 주특기이다. 그는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언어의 마술사이다. ‘시테크’란 말을 만들어 냈고, 이를 책으로 써 공전의 힛트를 쳤다. 돈을 모으는 것이 재테크면 시간을 모으는 것이 시테크란 의미이다.

시간을 잘 모아 잘 활용을 하자는 의미의 시테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 ‘골드 칼라’란 말도 최초로 도입해 유행시켰다. 농경사회,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가 되면서 정보 마인드로 무장된 골드 칼라의 시대가 오고 있으니 모두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가수 조용필의 장수 노하우는 끊임없는 변화이다. 윤은기 박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도 끊임 없이 변화한다. 직장인 생활을 하다, 경영 컨설턴트로 변신하고, 이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가 싶더니 어느 날 방송인으로 등장한다. 또 최고의 기업체 강사가 되는가 싶더니 교수로 변신했다. 올해 초 그는 경영전문대학원인 서울과학 종합대학 부총장으로 취임을 했다.

이 학교는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 유럽의 IMD를 겨냥해 만든 학교이다. 단순한 MBA를 넘어 미래 한국을 짊어질 동량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마 그 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진들에게 체계적으로 물려주겠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또 컨설팅 분야도 계속 넓혀 요즘은 골프와 관련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적응력이 높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반성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별명은 ‘독사’, ‘독일군 장교’였다. 그만큼 원리 원칙에 충실하고 빈틈이 없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불 같은 성격을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성격은 결혼을 하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젊은 시절 저는 모든 것을 생산성과 연결했고 제가 늘 옳다는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결혼을 해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군요. 이런 식의 고집과 독선으로는 평안한 집안을 경영할 수 없더군요.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전의 윤 박사가 딱딱한 원칙주의자였다면, 지금의 윤 박사는 부드러움 그 자체이다.


- 가정경영이 경영의 첫 걸음

그는 한국에서 가장 가정적인 사람일 것이다. 늦은 나이에 발군의 미인과 결혼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마흔이 다 되는 나이에 스튜어디스 출신과 결혼해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보통 한국의 아저씨들은 집안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데 그는 정반대이다. 늘 가족에 관련된 얘기가 화제를 이룬다. 그와 함께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늘 가족과 연결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경영은 모두 비슷합니다. 가정을 잘 경영하는 사람이 집안도 잘 경영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가정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집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녀는 제가 갖지 못한 것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서로 보완하며서 사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의 얘기이다. 그는 부인을 교주로 떠받들고 산다고 농담을 하는데 농만은 아닐 듯 싶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가난, 사랑, 재채기가 그것이다.’그를 보면서 떠올린 탈무드 격언이다.

성공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사는 모습을 보면 부럽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 계속해서 하는 일에 변화를 주고 진화를 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을 주변에 나누어 주고 존경을 받는 것…. 그를 인터뷰하면서 든 생각이다.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학 교수


입력시간 : 2004-10-06 11:24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학 교수 kthan@ass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