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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초대석]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
이념의 정치쟁점화는 역사적 퇴보
좌우대립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뒷북치기, 대중적 글쓰기 하고 싶어


책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책을 낸 데 대한 소회, 의미, 향후 계획 등 대동소이한 질문들. 그는 차분하게, 충분히 답했다.

그러고도 정옥자(62)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참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관악산 냉기가 어스름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진 대담에서는 정년을 앞두고, 이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그가 이 종잡기 힘든 시대에 보내는 격려와 위안의 전언들이 풀려 나왔다. 연구와 강의에만 전념하던 정 교수를 세상과 다시 접하게 한 실마리는 근간 ‘오늘이 역사다’(현암사 刊).




<오늘이 역사다> 출간으로 세상과 접속
원래는 18세기의 선각자 박지원이 문장론에서 했던 말을 이어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본 받아 새 것을 창조하다)’이라는 제목을 달려 했으나, 그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출판사측의 이견을 좇았던 것. ‘역사 에세이’(1996)와 ‘역사에서 희망 읽기’(1998)라는 이름으로 일반인들을 위해 펴 낸 지 10여년만의 일이다. 정작 본인은 “잡문”이라며 자꾸 폄하하려 드는 글이다.

출판사의 압력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고향 춘천에서의 일과 6ㆍ25가 남긴 아픈 기억들, 그리고 고등학교 이후 서울서 공부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생에게 벌어졌던 일들과 마음의 궤적 등 원로 사학자가 일개 자연인으로서 들려 주는 이야기가 따지고 보면 그 닥달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 피란을 가다 청평호에서 가족들이 숨지는 광경을 지켜 봐야만 했던 심정, 두 아들(6살,7살)을 둔 어머니의 몸으로 공부에의 목마름에 못 이겨 10년만에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남편으로부터 “신들린 사람”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역사서를 천착했던 시절 등 그 동안 학문에 치여 뒷전에 숨어 있던 일들이 처음으로 볕을 쏘였다.

내친김이다. 선생은 “피난때의 일은 쓰지 않은 게 많다”며 “특히 6ㆍ25 이후 대학까지 많이 힘들었다 ”고 운을 뗐다. 꼴찌도 힘들 거라며 텃세를 부려대던 서울 아이들을 누르고 1등을 차지했던 고교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한다. 고려대 옆 동덕여고에서 그렇게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고 3때 서울 토박이들을 제치고 학생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마침 4ㆍ19와 겹친 시기여서 무척이나 바빴다 한다.

“공부할 짬을 내지 못 해 대학에 떨어질 뻔했죠. 그해 10월까지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학교측에 전달하느라 아무 것도 못 했는데, 대학(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죠.”연구실을 가득 메운 고서 더미에서 풍겨 나는 서권기를 뚫고 나오는 사학자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걸어 온 삶의 고비고비마다 선생이 보여준 힘에는 저 같은 시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그는 서울대 여교수회 회장을 맡아, 채용 등에서 여교수도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언뜻 보기에 얌전해 보이는 사람이 보수적인 교수 사회를 상대로 시대를 앞서가는 발언을 했으니, 학계의 권위를 인정받던 일부 남성 중견 교수들이 노발대발했던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현대사에 의해 이미 단련을 받은 상태였다. 1981년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전두환 정권의 개헌에 반대하는 교수 서명 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나, 1,500명 교수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1986, 87년 당시 대학측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명 작업에 동참한 교수는 48명. 당연히 선생이 거기 있었다. 그 시기를 버티게 해 준 유효한 힘은 글쓰기였다. 이 시기, 그는 바로 에세이류의 ‘잡문’ 쓰기에서 힘을 얻었던 것.

반 서울대 정서는 국가적 손실
“오늘이 곧 역簾굡箚?하는 사학자에게서 우리 시대를 보는 눈을 얻고 싶다. 그는 우선 서울대 이야기부터 했다. “반(反)서울대 정서는 국민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단초는 서울대 출신들이 제공했죠.” 엘리트 집단이 파편화되고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 빚어진 문제라는 사실을, 또 상당수 국민들이 그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두고 서울대는 뼈아픈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

“동창들이 ‘서울대가 동네북이냐?’며 저더러 나설 것을 요구했죠. 그러나 서울대 출신이 군사 정권 당시 보여 준 행동 양태는 반성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 그을 줄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지성주의적 정서를 어떻게 반성의 기회로 삼는가가 관건이죠. 인재 양성을 국가 경쟁력의 차원에서 보는 여유가 아쉽습니다. (반서울대 정서는)결국 국가적 손실이니까요.”

지금 한국이 손해 보는 게 어디 그 뿐이랴. 뭔가 결단 낼 태세로 전개되는 작금의 이념 대결, 그의 눈에는 어떻게 포착될까? “좌우 대립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뒷북치기죠. 마르크시즘이란 이미 검증된 것 아닙니까? 6ㆍ25의 후유증이고 남북 분단 상황 때문이겠지만, 의아한 현상입니다. 여하튼 그 문제를 두고 정치 쟁점화한다는 것은 경계해야죠.”그러나 그 골은 깊다. “크게 보아 과거 청산의 단계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국민 정서적 면에서 해로울 뿐이라는 사실이죠.”

여기에 나라 바깥의 바람도 심상찮다. “예. 견제 세력이 없는 미국은 가히 최강성기죠. 세계사적 정황으로보자면 아주 안 좋은 시기지만, 결국은 내부 결속의 문제예요. “크게 보아, 역사상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오랜 동안 지배하지 못 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 한국인들에게 정서적 반미란 결코 현명치 못 한 생존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미국이 6ㆍ25 동맹 국가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는 것. 선생은 이렇듯 복잡다단한 국제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최상의 방편으로 집안 단속을 꼽았다. 미국에 대한 충고도 따른다. “미국민들이 다시 부시를 택했다는 것은 결국 가고 싶은 데까지 가자는 거지요. 미국이 대형 노릇을 하려면 부드러워져야죠.” 미국은 그들이 강국이라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 듯 하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전쟁보다 평화의 시기에 국가의 진정한 동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그가 첫 제기한 ‘조선중화(朝鮮中華)론’은 그 결정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류 이론과 아귀가 맞지 않던 그 이론은 기존 사학계로부터 사방에서 질타 당했다. 박사를 앞에 둔 그에게 “박사는 꿈도 꾸지마라”며 협박까지 날아 들었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이론은 20여명의 후진에 의해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국문소설 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18세기 르네상스’의 요체라는 것.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 집약돼 있는 그 말에는 명청 교체의 일대 혼란기였던 17세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가 주객이 전도된 동아시아에서 조선이 이제 문화적 적자임을 천명하면서 제기됐다. 국제 사회지만 현실이 아니라 국가간의 의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그 같은 주장은 창덕궁 부근에 명나라의 세 황제를 모시는 대보단을 짓는 것은 물론, ‘대청복수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기저에는 청나라는 곧 오랑캐라는 생각보다는 청나라가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종족이므로 세계 질서의 리더가 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훗날 일본제국주의가 대보단을 그냥 둘 리가 만무했다. 이후 모든 역사를 제국주의나 군사 등 힘의 논리로 파악하는 논리에는 식민사관의 더께가 짙게 덮여 있다는 지적. 그것이 지양될 때, 전통과의 단절은 치유돼 비로소 우리 역사 바로 보기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전쟁보다 평화의 시기에 국가를 움직였던 동력이 과연 무엇이었나를 찾자는 겁니다.”

규장각 역사정보 시스템 구축
“1999년 5월 1일에서 2003년 4월 30일까지 였어요. 꼭 4년이네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역사학자의 자세는 저렇듯 엄정한 것일까, 서울대 규장각 관장으로 재임했던 기간에 대해 묻는 말에 대한 선생의 답은 날짜 단위다. 그것은 동시에 규장각이 거듭 난 시기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중, 그는 먼지 쌓여 가고 있던 규장각의 방대한 서책에 21세기의 양광을 쏘이는 데 진력했다. 먼저, 정신문화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등 4개 단체를 총지휘해 일반인들도 클릭 한 번으로 과거와 만날 수 있게 한 ‘역사 정보 시스템 데이터 베이스 구축’ 사업이 가장 먼저 꼽힌다. 모두 100억의 예산으로, 현재 8할의 공정을 거친 규장각 증축 사업이 그를 만나 불이 당겨졌다.

또 문집, 의궤, 왕실 자료 등 규장각내의 방대한 자료를 대상으로 년간 8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정밀하게 해제를 붙이는 작업은 현재도 관여하고 있는 바다. 말이 쉽지, 족히 20년은 내다 봐야 하는 사업이다. 이 같은 고문서 DB화 작업은 세계에서도 매우 선진적인 작업으로, 한국이 모델을 수립한다는 자부심도 깔려 있다.

그 속내 사정을 들여다 보면 선생이 왜 대모의 이름에 값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이 사업은 제자들의 생활과 직결돼 있기도 하다.“박사 제자 50여명의 실질적 취직 자리죠. 한 달에 240만원의 연구비를 받고 각자의 공부에 몰두하는거죠. 국사, 국악, 동양철학 등의 분야에 딴 학교 출신까지 개방하고 있어요.”

이 방대한 사업이 한국인들에게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문화 전통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이 일 것”이라고 선생은 확언했다. 이렇게 되면 문화 상품에 전통의 물결이 일면서, 국가경쟁력에 큰 기여를 하리라는 예상이다. 현재 그의 주도로 전통 문화 자산을 이용해 만든 몇 가지 물건들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엿보게 한다. 임금의 행렬도나 옛 악기 그림 등을 이용한 보자기나 넥타이 등에는 관광 기념품 따위에서 느낄 수 없는 질박한 멋으로 사람을 은근히 잡아 끈다.

“나는 정년이 기다려져요. 가슴 설레게.” 정년을 2년여 남긴 선생이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문화 상품때문이 아니다. 남몰래 흉중에 품어 온 희구가 있다. “제약 없이, 아주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역사 소설도 쓰고 싶고…. 예를 들어 17세기 국가 재건기의 정신적 지도자 이야기나 18세기의 혜경궁 홍씨 같은.”역사를 택하지 않았다면 문학을 했을거라는 말이고 보면, 선생의 ‘아주 대중적인’ 소설이 과연 어떤 것일까 슬슬 궁금해지는데….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4-12-1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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