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개량에 인생 건 국악계의 아웃사이더전자가야금·23현 가야금 등 개발, 운명같은 파격행보

[한국 초대석] 국악인 천익창
가야금 개량에 인생 건 국악계의 아웃사이더
전자가야금·23현 가야금 등 개발, 운명같은 파격행보


“야, 이 씨부랄 놈아! 니가 왜 국악계 욕 먹이고 지랄이야!”걸쭉한 사설을 닮아서 그런가, 당대를 주름잡는 판소리 명창의 입심 좀 보소.

1977년 KBS TV ‘국악춘추’의 녹화 현장에서 그를 발견한 명창 박동진 선생이 녹화를 막 끝내고 돌아 서는 그에게 다짜고짜 퍼 부은 말이다. 국악기 개량에 생을 바치고 있는 그에게 떨어진 난데없는 불호령이었다. 가야금은 영원토록 12줄이며 하물며 그 어떤 변형도 불가한 것이라는 기존 국악계의 입장을, 말하자면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한 것이렸다. 행여 제대로 못 들을세라 그의 귀를 바싹 잡아 당긴 채 거기에다 대고 소리쳤으니,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귀가 얼얼하다.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던가, 1986년으로 필름을 돌려 보자. 서울대 국악과 이성천 교수 등이 21현금과 장새납 등 당시 적극 소개돼던 북한의 국악기 개량 노력에 대해 매우 고무돼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하 신문들은 “우륵 이래 최대의 쾌거”라 호응했고, 후배 국악인들은 “문화적 혁명 운운”하며 맞장구쳤다.

아버지만큼 세상을 놀라게 한 아들
재빨리 감을 잡았던 쪽은 언론사였다. 국악기 개량과 연주 보급에 생을 걸어 온 그가 신문 등을 통해 비로소 적극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단국대 멀티미디어실. ‘남북한 개량 국악기’라는 제하의 세미나에 그는 강사로 초빙됐다. 전자가야금, 23현 가야금, 10현 아쟁 등 그가 혼자서 개발해 온 개량 국악기들이 거기서 연주되고 뜨거운 토론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연주자는 물론 그였다. “나에 대한 최초의 적극적 평가였다”고 그는 담담히 기억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모른 체 하더니…’란 말이 금방이라도 들릴 듯 했다. 천익창(54)씨.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부천시 원종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부인과 아들, 그리고 8순 노모와 함께 사는 16평짜리 아파트에는 취재진을 반길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더구나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려 7대의 가야금, 아쟁 1대, 대형 앰프 등 동서양을 망라한 음악 도구들이다. 이제는 아버지만큼이나 유명한 아들 새빛(17ㆍ원종고)과 한복을 입고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던 그가 전자 가야금을 켜 보였다 “우리집이 이래요. 공간이 워낙 좁아서…”라며 보낸 양해의 말을 신호로 해 연주에 들어 간다.

칼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를 연주할 때는 장중하기 그지 없더니, 슈만의 ‘꿈’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일 수 없다. 그러다 민요 ‘새타령’에서는 간드러지기가 김세레나 뺨친다. 이어 아들과 함께 창작 국악곡을 연주했다. 바로 2005년 1월 1일 펼칠 ‘새해맞이 천새빛 개량 가야금 연주회’에 등장할 레퍼토리다.하프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아르페지오가 가야금에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천씨는 보통 한꺼번에 저음ㆍ중음ㆍ고음의 가야금 세 대를 동시에 펼쳐 놓고는 그 위를 오가며 열 손가락을 다 써서 연주한다. 북한의 21현 가야금에서 한층 더 나아갔다.

그러나 새빛이의 손이 조금 성치 못 한 터라, 취재진은 맛만 조금 볼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을 삐어 깁스를 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면 회복된다지만 새빛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1999년 ‘국악 국악한마당’에서 가야금 연주로 데뷔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이는 2003년 남북한 개량 국악기 비교 연주가 주제였던 ‘제 1회 서울가야금 경연 대회’에서 아버지의 23현 가야금을 들고 나와 아버지가 작곡한 ‘오솔길’로 보란 듯 대상을 거머쥐었던 화제의 주인공이다.

그에게는 음악만이 꿈이었다
아들이 또래의 모습과 다르다면, 아버지는 아예 별종이었다. 비주류와 파격의 행로는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그 같은 존재 양태가 그에게는 오湯?자연스러워 보인다.

보수적인 경상북도 예천서 태어나 그 보다 더 고루한 안동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음악 시간에 어쩌다 본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8남매 중 유일하게 음악에 관심 있었던 그는 중고생 시절, 공부한다며 자취방세에서 타 낸 돈으로 음악 선생에게 교습료를 주고 몰래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음악만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형편이 어려우니 사범대 가기만을 바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칼빈 소총의 대금으로 자살하겠다며 난리를 쳤던 것은 그래서였다

타협책이 떴다. “1년만 레슨비를 대 줄테니, 가 봐라. 단, 꼭 서울대에”라는 말이 나왔다. 우선 대구 영남대 음대 교수에게서 작곡 등을 레슨 받고는 당시 을지로에 있던 서울대 음대로 가 실기를 쳤으나 텃세는 워낙 드셌다(여담이지만, 당시 함께 시험 봤던 사람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 근영씨도 있었다. 작곡과 합격). 그는 홧김에 시내를 쏘아 다니다 YMCA옆의 음악학원에 들어 가 허락도 없이 피아노를 마구 쳐 댔다 한다. 그 사건은 이를 테면 전환점이었다. 듣도 못 한 파격적 연주가 마침 거기 와 있던 미 8군 클럽 매니저의 귀에 들어 가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곧 바로 몇 달 동안 전국 순회 연주를 함께 한 그는 세운상가의 극장식 댄스홀 ‘아마존’에서 20인조 대편성 악단의 건반 악기 주자로 옮겼다. 그룹 사운드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마이하우스 밴드’(지휘 김강섭)에서 김정구 등 인기 민요 가수들의 반주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안동에 있을 때 어설픈 가설 극장 무대에서 흘러 나오던 국악기의 애틋한 선율을 잊지 못 해, 어깨너머로 가야금을 틈틈히 익혀 나갔다.

1970년대 명동의 ‘마이하우스’에 있던 시절, 그는 ‘전자 오르갠과 가야금을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별종’으로 서서히 인기를 모아 갔다. 양악 밴드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최초의 사람이라는 소문은 날개 돋힌 듯 했다. 라데팡스, 유토피아, 관광열차, 로얄박스 등 명동 일대의 극장식 식당에서 그의 ‘퓨전 음악’은 단연 인기였다. 보통 하루 3회, 새벽 4시까지 공연이 있었다. 그 특유의 가야금은 그렇듯 철저한 현장성, 실용성에서 배태된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인기의 신기루보다는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평가 받을지, 얼마나 정당한지가 더 궁금했다. 1976년부터 대학과 언론 등에 가야금 개량 등에 대한 자료를 띄우기 시작했고, 전문가의 평을 기다렸다. 국악 전공자들이 그에게 쏘아 주던, “가야금이란 이름을 붙이지 마라”는 말이 그의 내면에 상처로 남아 있던 탓이기도 했다. 그 무렵 자신이 개발한 철선 가야금에 창금(昌琴:천익창이 만든 가야금)이란 이름을 단 데에는 그런 정황이 있다.

계파없는 설움, 소외와 배척의 대상
그러나 ‘천익창류(流)’란 말은 없다. 물론 기자들이 순발력 있게 지어 낸 말.기성 국악계에서 그는 예외적 인물일 따름이다. 그를 마음 아프게 해 온 말은 이를 테면 “선생님한테 레슨 받으면 어느 대학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하나의 유파로 인정 받으면, 그것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현실은 그런 식으로 불쑥 나타나 그를 낙담시킨다. 예를 들어 가야금을 서서 연주하는 것이라든가, 가야금 뒤에 홈을 파서 조율용 키를 달아 조율을 쉽게 만든 것은 이미 30여년전에 자신이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전수 계보를 특히 중시하는 예술계에서 계파 없는 무명의 설움은 상상을 넘는다. 그는 “국악계에서 내가 소외와 배척의 대상이었던 게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렇지만 악기와 씨름하느라 크게 외로움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늘 아들하고만 하니, 파릇파릇한 아들의 앞길을 넓게 틔워 주지 못 하는 것 같아 아들에게 괜히 미안한 감정이 항상 남는 듯 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꿈도 저간의 사정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내가 겪은 고통과 가난을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잖다. 내가 평생 연구한 것을 올곧게 전수 받아, 사회에서 당당히 생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아이가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따라 와 주었으면 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 시켜 와 아이에게 미안한 노릇이죠.”

외부에 대해 스스로 담을 쌓은 것은 아닌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외곬의 길을 걷게 됐는지에 대해 나름의 예화를 몇 개 들려 주었다. 그가 축적한 악기 개량에 관한 노하우를 건네라며 술자리에서 반협박조로 말하던 국악 관계자 ?그 동안 못 볼 일을 적잖게 겪었다고 했다. 또 모교수급 인사는 그가 답답하다는 듯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된다”며 현실적 대책을 일러 주기도 했다고. 음악보다는 판권 소유에 더 관심이 많은 음반 회사, 자기 계파의 세력화 등 학문을 벗어난 목적에 더 관심이 많은 교수들 등도 그의 기억속에 쌓여 있었다.

못다 이룬 꿈, 아들이 펼쳐주기를…
외롭지 않은지? “아들이 있잖습니까?” 그의 답은 단순 명쾌. 천씨는 자신이 시절을 못 만나 못 다 펼친 꿈을 이제 아들이 이어 받기를 소망한다. “쟤 학교 축제때 황병기 씨의 ‘침향무’ 연주에 슬금슬금 나가던 사람들이 ‘오솔길’을 록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다 들어 와서 보더라니까요.”훨씬 다채로운 레퍼터리로 채워져 있는 내년 정초의 콘서트에서는 그보다 더 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기대가 깔려 있는 말이었다. 거기에다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이는데, “남편이 이러고도 붙어 사는 아내(김숙여ㆍ50)는 정말 천사지요.”

외롭지 않다고 믿으며 살아 온 세월은 머잖아 현실로 드러난다. 내년 1월 1일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의 공연을 보자. 중요 무형 문화재 제 29호 서도 민요 전수자 박중길, 가야금 산조 김윤덕류의 이수자 이유진(이화여대 대학원) 등이 출연한다. 인간 문화재 42호 악기장 고흥근 씨는 24현 가야금을 기증하기도 한다. 그날 공연을 새로운 출발로 볼 수 있는 이유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12-22 16:01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