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기 예술이 빚어낸 과학은을 두드려 기명을 만드는 기법, 두드리는 만큼 손맛도 달라

[한국의 장인들] 방짜은기 장인 이명숙
두드리기 예술이 빚어낸 과학
은을 두드려 기명을 만드는 기법, 두드리는 만큼 손맛도 달라


여기 은그릇이 하나 있다. 밥주발이다. 낙숫물 떨어지는 순간을 잡은 듯한 길다란 손잡이가 뚜껑에 달려있다. 표면은 매끄러운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냥 매끄러운 게 아니다. 미세한 물결 무늬가 은그릇을 감싸고 있다.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안은 주황색이다. 도금을 했다는 말이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은빛과 따사로운 주황의 조화, 그리고 보일 듯 말듯한 미세한 잔물결 무늬는 그릇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 그릇은 방짜은기 장인인 이명숙(52)씨가 만든 것이다. ‘방짜’는 원래 질 좋은 놋쇠를 불에 달군 뒤 두드려서 놋그릇을 만드는 데서 나온 말이지만, 금속 종류에 상관없이 기명(器皿)을 틀에 찍지 않고 두드려서 만드는 기법에 두루 쓰이고 있다.

이명숙(52)씨는 은을 두드려 온갖 기명을 만든다. 그가 만든 은 그릇 표면에 나타난 잔물결은 손가락보다도 작고 가는 망치를 수도 없이 두드려 만들어낸 것이다. 그릇 하나를 만들려면 형태를 만드느라 수천 번 망치질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완성된 형태를 다시 수천 번 두드려 표면을 매끈하게 만든다. 단조(두드리는 작업) 뒤에는 다시 부드러운 금속 조각으로 문질러 윤을 내야 한다. 몸무게 45kg의 가냘픈 여인네가 하기에는 보통 중노동이 아닐 듯 싶었다.

“요즘은 좀 꾀가 난다”고 웃는 이 씨는 그러나 “배운대로 만들 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계로 찍는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씨는 이 같은 수작업으로 컵도 만들고 주전자도 만든다. 그가 지난 해 만든 은주전자는 독일 하나우 공예가협회 주최로 3년마다 열리는 ‘유럽 실버 트리에날레’에 2004년 출품작으로 선정되어서 현재 유럽 각지를 돌며 순회전시중이다. 2003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이타미 국제공예전에 연꽃 쟁반과 잔을 출품해 입선을 했다.

금은세공장인, 독일서 금속공예 수업
‘금은(金銀) 세공 장인(gold and silver smith)’인 이씨는 독일에서 금속공예를 배웠다. 그의 스승은 독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금은 세공 장인인 빌헬름 나겔(75)이다. 현재 독일 축구 FA컵 우승컵으로 쓰이는 은배를 1964년에 만든 주인공이다.

성신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이씨는 미술 교사를 잠시 하다가 79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쾰른 미술대학에서 그래픽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담당 교수가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의 학생은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뒤늦게 금속 공예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금속 공예에서도 또 한 번 방향을 바꿨다.

원래는 조그만 장신구를 만드는 세공(細工)으로 입학을 했는데 큰 물건을 만드는 대공(大工) 담당 교수이던 나겔이 그의 작업을 보고는 대공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당시 나겔 교수는 ‘대공은 세공을 할 수 있지만 세공은 대공을 하기 힘들다. 전체적인 조형 감각과 기술을 익히기엔 대공이 좋다’고 일러주더란다. 사실 독일의 예술대학 교육은 이미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가르치는데다가, 세공 담당 교수는 기법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예술 감각을 일깨워주는 세미나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서 그와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 씨는 나겔 교수의 제안에 대공으로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금속 공예의 기초부터 도제식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은을 고르는 법, 은판을 두드리는 법, 공구를 선택하는 법, 석고로 틀을 만드는 법 등 5년 동안 금속 공예의 모든 기법을 나겔 교수에게서 배웠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허술함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실용품을 흠 하나 없이 만들어내는 독일 장인의 정신과 기술을 전수 받았다.

첫 해에는 은잔 하나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물론 은잔 하나에도 과학과 예술이 총동원된다. 잔의 아구리가 너무 좁으면 마실 때 고개를 많이 꺾어야 하고 아구리가 너무 넓으면 내용물이 한꺼번에 많이 쏟아져 마시기 힘들다. 잔의 깊이는 설거지할 때 손이 잘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잔의 두께는 또 입술이 닿았을 때 물방울이 새지 않도록 날렵하면서도 내용물의 온도를 지켜 줄 두께는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은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쾰른미술대학 금속공예과 대공 전공 학생 다섯 명은 입학 첫 해 종강식을 갖는다고 했다.

잔을 익히면 주전자에 도전한다. 주전자는 외형 자체가 잔보다 복잡할 뿐더러 물 나오는 꼭지 부분의 각도를 잘 잡아야 물을 따를 때 물이 꼭지를 타고 질질 흘러내리지 않고 방울로 똑 끊어진다. 역시 과학이 필요했다. 전제 면적만큼의 은판을 구해서는 두드려서 꺾어 올리기도 하고 매우 복잡한 부분은 따로 만들어 용접으로 붙이기도 한다. 잔처럼 단순한 것은 은판을 두드려가면서 곧바로 형태를 만들어올려도 되지만 주전자처럼 복잡한 것은 종이나 석고로 먼저 틀을 만들어보고 거기에 맞춰 은 작업에 들어간다.

이씨가 처음 만든 주전자는 육각으로 꺾이는 중국 주전자 형태였는데 직선이면서도 단조를 통해 미묘한 곡선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그냥 은판을 직선으로 뽑아서 꺾는 것과 달리 두드려가면서 직선을 만들어주면 주전자가 빵빵하게 배가 불러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고 공 들인 만큼 달라지는 손맛의 매력을 설명했다.

대공작업과 함께 세공작업도 병행
그의 공방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산7번지에 있다. 저수지를 마주하고 산골짜기에 들어선 2층 컨테이너 하우스가 그의 작업실이다. 이층 살림집에서 밥만 먹으면 그는 1층 공방으로 내려와 은을 두드린다.

그의 공방에는 은판을 얇게 펴는 압연기와 은선을 뽑는 압연기, 모루를 대고 치는 걸 돕는 바이스, 금속에 구멍을 내는 드릴 기계, 판을 깎고 광택을 내는 연마기에 은판을 자르는 작두, 평면을 가는 걸 도와주는 사포기계, 산소 용접기까지 10여개의 기계가 그득하다. 안쪽 벽면에는 묵직한 모루만 38개. 망치도 그만큼 있다. 창가쪽에 참나무로 만든 책상형 작업대 옆에는 또 정교한 마무리 작업에 쓰이는 연필 굵기의 망치와 모루가 그만한 수만큼 꽂혀있다.

이런 기기 가운데 그가 대공을 할 때 가장 오래 붙어있는 자리는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나무토막 옆이다. 지름 40cm쯤 되는 이 나무토막 위에는 동그란 그릇 모양의 홈이 세 개가 파여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가 은판을 놓고 두드리는 곳이다.

그가 쓰는 은판은 순은이 아니라 동을 섞은 순도 92.5%의 스털링 은판. (흔히 925실버로 불린다.) 순은과는 달리 단단하기 때문에 산소 용접기로 노글노글하게 덥혔다가 미지근하게 식었을 때 망치로 두드려서 모양을 만든다. 옆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니 지름 10cm 은판을 한 바퀴 돌리는데 망치질을 쉰 다섯번을 한다. 한 번 두들기면 주름이 잡히고 두 번째 두들겨서는 주름을 펴서 형태를 잡아주는 것이니, 실은 백 번이 넘어야 한 바퀴가 돌아 가는 셈이다.

그렇게 밥만 먹으면 내려와 사나흘을 두드려 주면 잔이 하나 나오고 닷새를 두드려야 밥 주발이 하나다. 하지만 공들인만큼 팔리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스승은 할머니가 손녀를 데려와서 혼수품을 맞춰가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의 제자는 수제품 명품 보다는 외국산 공장 제품을 선호하는 환경에서 대공 작업을 계속 이어가기가 힘든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4년전부터는 장신구를 만드는 세공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독일의 장인에게는 성당에서 쓰이는 성작, 성반, 제대가 수입원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이탈리아의 것을 직수입하기는 해도 국내 장인에게는 ‘봉사하는 마음’을 청하기 때문에 이 씨의 작업을 뒷받침해 줄 성당도 없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适?창작하는 즐거움에서 나오는 명품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대공 장인이 워낙 귀한 한국에서 그마저 세공 장인으로 완전히 돌아서지 않게, 그의 작품을 구매해주는 눈썰미 있는 고객이 나서 줄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드는 과정

- 만들 형태를 종이나 석고로 만든다. 이것은 은판을 두드려 형태를 잠을 때 감을 잡기 위한 것으로 실제 작업에 사용되지는 않는다.
- 은판을 원하는 두께와 크기로 주문한다. 대개 1mm 짜리를 쓴다.
- 은판을 작두로 원하는 크기만큼 자른다.
- 은판을 두드려 원하는 형태대로 올린다. 두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형태를 끌어올리는 것이 요령이다. 925실버는 단단하기 때문에 산소용접기로 은판이 발그레해질 때까지 불기운을 쬐었다가 미지근하게 식으면 두드린다. 모양을 크게 변형시키는 것은 기계 모루를 대고 쳐주어야 한다.
- 부조로 무늬를 만들 때는 송진과 진흙을 섞어서 구운 감탕에 불을 쬐어 부드럽게 한 후 그 위에 은판을 대고 끌이나 정으로 형태를 만들어낸다.
- 복잡한 형태의 기명은 부위마다 따로 두드려 제작한 것을 용접으로 붙인다.
- 형태가 완성되면 조그만 모루로 바깥면을 두드려 표면을 펴 준다. - 사포 기계와 연마기로 표면을 매끄럽게 한다.
- 표면 작업이 끝난 것을 다시 조각도 모양의 부드러운 쇠조각인 광쇠로 문질러 광을 내 준다.

서화숙 대기자


입력시간 : 2005-01-27 11:07


서화숙 대기자 hssu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