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향한 예술작업 계속할 것"1995년부터 5년마다 요절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 헌정 콘서트

[한국 초대석] 피아니스트 김진호
"님을 향한 예술작업 계속할 것"
1995년부터 5년마다 요절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 헌정 콘서트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귀남이가 역시 최초의 감상자가 됐다. 말티즈 종의 11살짜리 애견이다. 모친이 외출하고 없는 아파트에서 녀석은 여기 저기 빈둥대며,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주인의 음악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김진호(48)씨는 이탈리아산 커피 메이커 가쟈(Gaggia)에서 갓 뽑아 낸 에스프레소 한 잔을 우선 권한다. 3년 전 인터넷을 통해 70만원에 구입한 뒤 열심히 뽑아 마시고 있단다. 커피가 달랑 한 잔에 4,000~5,000원이니 이미 본전은 빼고도 남은 셈이다.

5월 2일, 그는 금호아트센터에서 루마니아 출신의 요절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Dinu Lipattiㆍ1917~1950)를 기리는 헌정 콘서트를 가졌다. 작곡가라면 모르겠지만, 한 연주인이 특정 연주인에 대해 꾸준하게 추모 콘서트를 펼치는 예는 흔치 않다. 그것은 대선배에게 바치는 최대의 존경이자 동시에 후배 연주인들에게 주는 격려와 질책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리사이틀 음반은 오래 전부터 대학 음악 감상 동아리의 필청 음반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음대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백혈병으로 요절한 피아니스트 리파티를 기리는 블로그가 국내에만 250여 개인데, 정작 피아노 전공자들은 그에 대해 무지한 상황이다. 그를 아는 학생들은 20%도 채 안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시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가 5년에 한 번씩 콘서트를 열어 리파티를 알려 나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가 1950년 9월 16일 프랑스 브장송 의회 강당에서 독주회를 통해 들려 주었던 프로그램의 레퍼터리와 똑 같이 해 오고 있어요.” 참된 예술은 죽어서 기억과 전승의 형태로 완성되는 것일까. 그는 숨지기 77일 전 아픈 몸을 부여 안고 무대에 섰지만 쇼팽의 ‘왈츠’ 중 마지막인 14번째 곡에서 너무 지쳐 그만 기절하기도 했다. 그 콘서트는 이제 많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전설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리파티는 그가 살아 있음의 증거
이번이 세 번 째 연주회다. 1995년부터 5년에 한 번씩 꼭 같은 프로그램으로 연주회를 펼쳐 왔다. 그렇다면 자기 표절이 아닌가. 이에 대해 그는 “자기 부정의 과정”이라고 받았다. “매년 한다 치더라도 똑 같이 할 수 없어요. 다만 완벽을 향해 끝없이 갈 뿐이죠.”바흐의 ‘파르티타 1번’ 모차르트의 ‘소나타 a 단조 K310’슈베르트의 ‘즉흥곡 2, 3번’그리고 쇼팽의 ‘왈츠’등이다. 리파티가 했던 이 마지막 콘서트를 그는 자기 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리파티가 음반으로 기록한 모든 음이 완벽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리파티 사랑은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다. 리파티가 세상을 뜬 지 50년째였던 2000년, 싱가포르의 초청을 받고 그 곳 DBS홀에서 펼쳤던 콘서트에 대해 현지 언론은 머릿기사로 찬사를 쏟아냈다. 그에게 리파티는 자신이 살아 있음에 대한 확증이다. “5년 만에 한 번씩 치른다는 마음속의 작정을 지켜냈다는 의미가 가장 크죠.”

“콘서트라는 게 미장원 가서 얼굴 다듬고 드레스 차려 입고 치르는 결혼식 같이 돼 버린 한국에서 연주회란 결국 예술 작업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콘서트는 연주자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녹음을 들어 보면)5년 전에는 서둘렀던 게 보여요. 10년 전에는 더 급했죠. 이제는 나쁘게 말하면 둔해졌고, 좋게 말하면 느긋해졌다고 나 할까요?”그는 앞으로도 계속 5년 간격으로, 자신이 숨을 거두지 않는 한 리파티 콘서트를 계속 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솔로이스트의 삶 고집하는 현장주의자
연주자로서 자신의 장점을 그는 ‘끈기’라고 말한다. 요즘은 20, 30대 당시보다 훨씬 연습을 많이 한다. 오전 10시에 일어나 맨 먼저 커피 메이커에 전원을 켠 ?4~5시간은 연습에 몰두한다. 그는 레슨은 않고 오직 연주에만 열중하는, 문자 그대로의 전업 연주자다. 또 실내악단이나 교향악단 등 단체에서의 활동은 삼가고 솔로로서의 삶을 고집하고 있다. 그의 백건우론은 그래서 남달리 들린다. “백 선생은 그 나이에도 레퍼터리를 확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는 “자유의 느낌이 좋다”고 말한다. 고독의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타고난 낙천성으로 극복해 나간다고 했다. 그가 레슨을 하지 않는 것은 전업 연주자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때문만은 아니다. 레슨을 받는 학생측에서 오는 무언의 억압이 싫기 때문이다. “서울대, 연세대 같은 데 합격시켜야 한다는 압력 말이죠.”

보통 레슨 교사들의 경우, 각종 대회 입상을 위해 곡을 ‘만들어 준다’는 지극히 한국적 상황이 그래서 나온다. 레슨 받는 학생들의 악보가 총천연색인 것은 그래서다. 갖가지 종류의 사인 펜을 동원해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연주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식으로 지시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색깔별로 표시를 해 두는 탓이다. 예전에 레슨을 할 때 학생들은 자신의 강의를 자꾸만 녹음해 두려 했고, 그는 만류했다. “한국 학생들은 음악 공부에서도 적어 둬야 속이 시원해지죠.” 그러나 그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악보에 적어 두면 레슨 당시의)긴장이 풀어지니까요.” 요즘 찾기 힘든 철저한 현장주의자다.

레슨 경험으로 그는 한국의 대학 입시 절대주의를 재삼 확인했다. 시험 성적을 잘 따기 위해 대작곡가들의 고난도 피아노 소나타만 고집하는 학생들과 학부모 앞에서 그는 두 손 들었다. 한국의 음악 학도는 기초도 채 닦여지지 않은 채 대학 입시 절대주의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고착된 음악만을 하고 있는 국내 클래식계를 그는 또 걱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교수들이 다 만들어주죠. 한 곡만 갖고 한 학기 내내 하는 식이니까요. 외국서는 서너 번 하면 끝이죠.”

그는 한정된 음반을 듣고, 그 특정 해석만을 좇는 한국적 관행을 깨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5년마다 해 오고 있는 리파티 연주에서 각각 템포와 장식음 등을 달리하고 있다. 1년마다 갖는 독주회에서는 바흐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 고금을 망라하는 레퍼터리로 자신의 음악적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진정한 천재의 밑거름은 음악성
부모가 모두 실향민(평안도 출생)인 그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잠시 피아노에 손 댔으나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그렇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명동 국립극장에서 서울시향과 협연할 정도는 됐었다. 1970년대 초 보다 높은 음악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옮긴 그의 가족은 LA에서 레슨을 받고는 아들의 성공 가능성에 흥분했다. 선생의 칭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뉴욕 퀸즈의 한인촌에 자리 잡은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의 15년은 그에게 현실을 알게 했다.

“사실 줄리어드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비한다면 2류 같은 데에요. 그런데 줄리어드 만능주의가 유독 판치는 것은 하버드 대학이라면 무조건 1등으로 쳐 주는 다분히 한국적 풍토 때문이죠.” 그러나 좋은 선생들이 포진해 있고, 세계 각처에서 영재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은 분명 장점이다. 그의 5년 유학 시절에 서혜경ㆍ초량린(대만ㆍ바이올린) 등 우수한 학생은 물론, 켈리 맥길리스(영화 ‘탑건’의 톰 크루즈 교관역)나 발 킬머(‘세인트’의 배우) 등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 낸 그가 줄리어드 5년 생활에서 얻은 것은 약간은 어이 없을 지도 모른다. “진정한 천재의 밑거름은 음악의 높은 수준(스탠더드)이라는 사실이죠.” 세계적 대회에서 어쨌든 상을 따 보려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한국의 풍토를 겨냥한 말 같다. 그는 그러한 깨달음을 당시 일흔 줄의 러시아 태생 할머니에게서 얻었다. “열 여섯 나이에 세계 최고의 제정 러시아 페?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라이센버그 선생이었죠. 콩쿠르 공장이라는 줄리어드에서 학생들에게 콩쿠르를 장려하지 않던 분이었어요.”

스승의 가르침 덕일까, 그는 교내 오디션이나 콩쿠르에서 출전자들을 경쟁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음악가로서 행복한 것은 피아노 치는 한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죠.” 진정한 음악적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 같은 그의 줄리어드 유학 시절에도 아쉬움이 하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증손녀와 함께 다녔어요. 8등신의 피아노 주자였는데, 가까이 지내지 못 한 게 가장 아쉽네요.” 아직도 결?안 한 건 바로 그 아쉬움의 표현일까.

“아니죠. 밥벌이가 신통치 않은데 결혼은 무슨 결혼?” 레슨을 열심히 하면 생활은 나아지겠지만 연주를 못 하게 된다는 현실 앞에서 그는 당당히 연주를 택했다. 결혼은 그러나 열려 있다고 굳이 첨언했다. 그런 그가 참으로 소원하는 것은 건강이다. “피아노 연주란 기본적으로 육체 노동입니다. 건강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그 때문이죠.”특히 정신적 건강을 위해 그는 많은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경험이란 게, 이를 테면 이런 거다. “러시아 사람이 영어로 옮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죠.”그렇다면 음악 잡지를 아예 보지 않는 건 그의 자신감이 여전하다는 증거일 터다. 콘서트 있을 때면 티켓을 10장 이상 사는 건축가 김헌 등이 열렬한 후원자로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마음을 손가락이 받쳐줄 지, 이번 연주회를 한 달만 연기할 수는 없을지’ 등등의 생각에 콘서트를 앞 두고는 항상 스릴 만점으로 산다는 그다. 그런 그에게도 긴장을 푸는 비법이 있다. 재즈 연주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의 클래식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인 미셸 페트뤼시아니를 뺨치는 현란함으로 ‘미스티’ 등 재즈 스탠더드 두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칠 수 없단다. “이제는 카를로스 가르텔이 내 음악적 텍스트예요.”가르텔은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박물관까지 있는 탱고의 전설적 인물이다.

미국 갔을 때가 열 다섯살, 한국에 돌아 왔을 때가 30세였다. 이제 또 다른 15년이 막 지났다. 그것은 또 다른 음악 여정의 출발일까. 확실한 것은 5년 뒤, 네 번 째 리파티 추모 공연이 그의 손으로 또 펼쳐질 것이란 사실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롱한 타건음을 내는 피아노 바로 옆에서 하얀 개 한 마리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5-05-04 14:33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