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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석] 채수선 갤러리 셈 대표
베풂, 그 지독한 이웃 사랑의 삶
뇌성마비 장애인이 만든 수공예품 전시·판매 갤러리 운영






당신은 지하철 출입구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 등에서 구걸하고 있는 걸인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못 본 채 하거나, 동전을 몇 개 던져주거나 등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옆에 앉아 꼬치꼬치 캐 묻는다. 하루에 얼마를 버느냐, 집은 있는가, 없다면 잠은 어디서 자나, 가족은 있는가 등을 자세히 물어본다. 어떻게 보면 참 별 난 사람이다.

서울 삼청동에서 감사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골목에 갤러리 셈(SEM)이 있다. 셈은 티베트어로 마음이라는 뜻이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국내 최초의 장애인 전용 갤러리다. 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채수선 씨가 앞서 말한 바로 그런 사람이다.

채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의 이 같은 ‘이상한 버릇’은 천성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누가 시켜서 할 수 없는 타고난 것이다. 그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장애인이나 걸인을 보면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 일일이 물어야 하고, 도와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는 “안 하고는 못 배긴다”고 간단히 말했지만, 주위에서 보면 일종의 ‘병’이고 그것도 ‘지독한 병’이다.

도와주면서 느끼는 기쁨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점심을 굶는 친구들한테 미안해 도시락을 여러 개 안 싸주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냥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라고 짧게 답했다. 자신이 편하기 위해 남을 돕는다는 것이다. 문득 인도의 걸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도에서는 걸인이 당당하게 구걸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간해서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걸인에게 돈을 주는 것은 결국 주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니 오히려 주는 사람이 더 고마워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기에 종교가 가세한 것일까.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훨씬 더 나아간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지를 따져봤다. 그는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플롯을 전공했다. 대학 때에는 운전사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운명이었다.

대학생 때 고아원에 갔었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곳에 갔다 온 이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를 매일 생각했다. 또 동생이 뇌성마비 장애인인 친구가 있었다. 뇌성마비 동생이 어느 날 가출을 했고, 자살을 기도했다. 그를 병원에 옮기면서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랬니?” “희망이 없어서요.” 충격이었다. 희망이 없다니…. 대학 졸업 후에 그리 크지 않은 기업에 취직을 했다.

첫 월급으로 10만여 원을 받았다. 너무 적다고 생각해 회사측에 항의하고 돌아와 보니 옆 자리의 고졸 직원은 월급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자세히 짜고 있었다. 적금 얼마, 고향 송금얼마, 생활비 얼마 등의 식이었다. 월급 명세서를 보니 자신의 절반 가량이었다. 순간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워졌다. ‘월급을 받으면 명동에서 고급 구두하고 핸드백을 사야지’라는 것이 그의 당초 생각이었다. 그런 것들이 모여 ‘혼자서만 잘 살면 소용없지’라는 의식이 점차 굳어졌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하고 결혼을 했다. 상대방은 너무 가난했고, 시아버지는 농아다. 집안에서 반대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래서 사고를 쳤다. 미리 예식장을 예약하고, 청첩장을 만들어 돌렸다. 하지만 진짜 사고는 그 다음이었다. 결혼 전 남편 될 사람한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결혼 10년 후부터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겠다는 것을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 때?왔다. 그는 남편에게 정식으로 이야기했다.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거부했다. 아이들(두 딸)을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그런 것을 모두 고려하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맞섰다. 결국 그가 이겼다. 그렇게 해서 뇌성마비 장애인들과의 생활이 시작했다.

그는 사는 곳을 동부이촌동에서 수유리로 옮겼다. 보다 많은 장애인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딸들은 지금도 원망조로 말한다. 엄마가 한 일 중에 가장 잘못한 일이 수유리로 이사한 것이라고. 생활 환경이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그에게는 자식들 못지않게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게 ‘수유리 누나’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장애인과 함께 '수유리 누나'로 살기
처음에는 남편과 그 친구들로부터 모은 4만 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지를 이용해 봉투를 만드는 것을 첫 사업으로 했다. 4만 원 중 500원으로 종이를 사고, 3,000원으로는 칼을 샀다.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구걸이었다. 쓰레기 통을 만들어 옷 가게 문 앞에 뒀다. 그리고 가게 주인에게 부탁을 했다. 제발 쓰레기는 이 통에 버려달라고. 그리고 쓰레기 통에 있는 천 조각을 모아 재료로 했다.

길을 가다 조그만 나무 토막을 보면 얼른 주웠다. 이것 역시 훌륭한 염주 재료가 됐다. 그런 식으로 버티면서, 장애인들에게 실력을 갖추도록 다그쳤다.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장애인들이, 그것도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봉투나 염주, 가방 등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어려울수록 시키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모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다.

“1989년 2월,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홀로서기 위한 하나의 출발선을 끊었습니다. 목공소에 가서 나무토막을 주워오고, 포목점에 가서 조각천을 얻어오고 500원짜리 종이도 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인욕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토막토막 나무를 다듬고 조각조각 헝겊을 이으며 한땀한땀 수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들었고, 조각칼을 제대로 쥐는 것도, 굽은 양손가락으로 바느질을 하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욕으로 지혜를 배웠습니다. 수 천번 깎아서 토막나무들은 염주가 되었고, 수 백번 바느질해서 조각천들은 벼량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못도 갈면 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천 조각 하나도 이으면 주머니가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우리의 손을 잡고 싶은 분들은 이곳으로 저희들에게 오십시오. 이제 우리들은 진실로 살아왔습니다.” 그가 주도하고 있는 ‘한마음회 장애인 모임’이 회원전을 열면서 한 말이다.

의타심 막으려 후원 거절
여기에 그가 한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나갈 것이다. 그런데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후원회에 관한 것이다. 요즘 웬만한 단체에는 후원회라는 조직이 붙어있다. 혼자서 하기에는 힘겨워 여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후원회를 만들지 않고 있다. 아니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우리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후원금이 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에게 공개했죠. 그랬더니 당장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에요. 큰 일이라고 생각했죠. 받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의타심이다. 의타심이야말로 장애인들의 진정한 자활을 막는 최대의 적인 것이다. 자활촌 건립에 쓰라며 땅을 기증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들은 얼마를 내놓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그것이 안 되면 화를 낸다. 그럴 경우 그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그냥 가세요”라고 쏘아붙인다.

또 사회 저명인사가 장애인들 행사에 와서 연설을 할 경우 대부분 “장애인 여러분, 힘 내십시오”라고 한다. 그것이 그는 못마땅하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침을 놓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부처는 상대방이 바로 부처일 수도 있다고 했고, 예수는 가장 천한 사람한테 해준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장애인이라고 구분을 할까. 그는 지금까지 남편과 그의 동료들의 도움만으로 모든 것을 꾸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그러니 당연히 경제적막?어렵다. “처음에는 창고에 만든 물건이 쌓이면 무척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숨부터 나옵니다. 잘 팔리지 않으니까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더 애가 탔지만, 그는 “언제는 걱정하면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웃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사회가 장애인이라고 몰아붙이고 무시해 놓고서는 ‘그래, 장애인이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이 부분에서 그는 싸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 그는 싸움을 즐긴다.

그렇다고 그가 일방적으로 장애인들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장애인들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준다. “너희들은 보기가 싫다. 너희들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실제로 한번 화랑을 찾는 사람 중에서 두 번 오는 사람은 없다. 장애인들이 서브하는 차나 음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나이 50 직전인 그는 환갑 전까지 200여 명의 장애인들이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자활이 목표냐”고 물었다가 반쯤 혼이 났다. “왜 자활이라고 합니까. 그냥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인터뷰 내내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투적인 표현이 결코 아니다.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 더 부끄러울 뿐이다. 내가 장애인이 아닐까.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  


입력시간 : 2005-08-0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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