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활력…정치 쓴소리 여전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만섭 전 국회의장
변함없는 활력…정치 쓴소리 여전

“정치와 사랑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꾀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

‘영원한 청년’ 이만섭(73) 전 국회의장. 그의 정치인생 반세기를 관통했던 믿음이다. 지난해 16대 국회를 끝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거쳐 31세 때인 1963년 6대 국회에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국회의원 8선(選), 국회의장 2차례 등 49년 동안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의 현장을 지켰다.

‘걸어 다니는 한국 정치사’인 셈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거침없는 언변과 형형한 눈빛, 활기 찬 몸가짐에다 때때로 순발력 있는 유머까지 구사해 ‘영원한 청년, 이만섭’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다.

근황을 묻자 “요즘도 인터뷰나 정치 연설 등 몸을 아끼지 않고 응하며 바쁘게 지낸다”고 한다. 정계 은퇴를 선언 했지만 지금도 ‘뼈있는’ 소리를 서슴지 않는 그는 ‘전(前)’이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어색한 ‘정치인 이만섭’이다. 국회 밖에 있더라도 결코 당장의 정치 현안에서 비켜나 있지 않은 것이다.

요즘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X파일 사건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일갈했다. “1993년 내가 14대 국회의장이었을 때 통신비밀보호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도 불법도청을 했다니 국민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는 이어 “홍 사장(홍석현 주미대사ㆍ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적어도 양심적인 중앙일보 기자들의 자존심도 고려했어야 했어요”라며 “직접 돈 배달까지 했다는 대목은 참으로 충격적”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X파일 사건은 여야 모두가 반성해야 할 사안으로 쓸데없이 공방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이름 있는 정치인 치고 정경유착과 불법정치 자금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은 드문 게 사실 아니냐는 것이다. 결국 “불법정치 자금에 관해선 국민들에겐 여야 구별이 없다”며 지금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저주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라며 정치적 계산에만 바쁜 여야 모두에 일침을 가했다.

여당 속 야당, 정경유착과 거리
사실 그는 정경유착이란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41년 간 정치권, 그것도 주로 여당에 몸담았던 이력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가 돈과 관련해 문제가 됐던 적은 우리들의 기억에 없다. ‘여당 속 야당’으로, 권력보다 소신을 택한 정치역정의 보답인지도 모른다.

공화당 의원 시절에는 3선 개헌 반대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당시 실세인 이후락 비서실장ㆍ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 해임을 요구하는 기개도 보였다. 이 탓에 ‘괘씸죄’로 장장 8년 간의 정치 공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때의 정치적 박해는 이후 그의 정치적 장수를 보장하는 쓴 약이 됐다.

‘꼿꼿하고 바른 말 잘하는’ 그의 강단은 모두들 몸 사리던 5공화국 시절에도 꺾이지 않았다. 국민당을 이끌던 1984년 국회 대표연설에서 ‘문민정치’와 ‘대통령 직선제’를 처음으로 주창한 것이다. 특히 ‘문민정치’라는 말은 그가 처음 구상해 낸 신조어(新造語)로 이후 ‘군화발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상징어가 됐다.

그는 젊어서 만능 스포츠맨으로 정치를 하기 전부터 유명했다. 대구 대륜중학 시절에는 농구와 수영선수로, 대학(연세대 정외과)에서는 ‘털보 응원단장’(당시 수염을 기르고 다녀 붙여진 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기개와 강단도 젊은 시절 닦은 스포츠맨십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중학 시절 그는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 씨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대륜중학 다닐 때 김재규(전 중앙정보부 부장) 씨가 체육교사로 부임해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이후 정치인이 된 그에게 이 인연은 정치적으로 특별한 것이 됐을 법하다.

반세기 정치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것이 언제냐 묻자 그는 “아무래도 16대 국회의장 시절굼繭箚?답한다.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후 2000년 의장에 취임했다. 당시 정부 여당은 교섭단체 완화를 위해 국회법안 날치기를 시도했으나 그가 막아냈다. 2002년에는 중립적인 국회 운영을 위해 당적을 버리고 이어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금지를 법제화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날치기를 없앤 헌정사상 첫 무당적 국회의장으로 네티즌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만섭 오빠’라는 애칭도 얻었다. “70살이 넘어 오빠라고 불리는 것이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고 그 때를 회상하며 소년처럼 웃는다.

인터뷰가 계속되자 대화는 자연히 현 정권으로 흐른다. 그가 우선 노무현 대통령에게 2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말수를 줄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솔직하고 과묵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보니 말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과묵의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것. 정치도 오케스트라와 같아 말없이 지휘하면 된다는 얘기다.

"정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것
두 번째 지적은 ‘코드 인사’ ‘코드 정치’와 관련한 것이다. 그는 “50년 가까이 함께 사는 마누라(한윤복 여사ㆍ73)와도 때때로 코드가 안 맞는 법”이라며 “화가 나면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욕 한마디하고 스스로 코드를 맞춰가며 참고 살아간다”고 소개했다. 대통령이 먼저 국민하고 코드를 맞추라는 당부다. 그러면서 요즘 ‘386’들이 한창 힘주고 다니는데 사실은 자신도 ‘386’이라 우긴다. “30년대에 태어나 8선 의원을 했고 6대 국회부터 정치를 했으니 원조 386인 셈”이라며 웃는다.

최근 현안에 대해서도 일침을 잊지 않는다. 얼마전 노 대통령이 제안한 ‘연정(연립정부)’ 이슈는 “우선 헌법 정신에도 어긋나고 실현 불가능한 얘기”라고 평가 절하한다. 그는 “국회에 다수 의석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믿음과 지지를 얻는 일”이라며 오히려 ‘여소야대’ 상황이 양보하고 타협하는 절묘한 정치를 키우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평소 소신을 강조한다.

또한 남북문제에 관해서도 ‘뼈있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다 보내줬듯, 국군포로 송환을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적어도 그들이 고향 땅에 와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도리라는 얘기다.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북-미 가운데서 서투른 기교보다는 한미동맹을 공고히 할 것”을 주문한다.

이야기가 가족사로 흐르자 부인 한윤복 여사를 만난 이야기를 꺼낸다. 땡전 한 푼 없던 대학 시절에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부인을 광화문 다방에서 소개를 받는데 커피 값이 없었다는 것. 만남 내내 커피값 걱정에 안절부절인데 부인이 다방을 나가면서 선뜻 커피값을 냈다. 그는 “난 시원시원한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도 농담으로 집사람에게 ‘커피 한 잔’에 팔려(?)왔다고 말하곤 한다”며 웃는다.

한국 현대정치사 담은 책 펴내
점심 식사로까지 이어진 자리에선 특유의 재치 있는 유머를 섞어가며 좌중을 사로 잡는다. ‘주먹’ 김두한 의원이 ‘국회 오물투척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후 무너져 내린 말년의 모습에 대한 기억 등 자유당부터 시작된 그의 정치인생담은 바로 생생한 한국의 현대 정치사로 한 두 권의 책으로도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지난해 그는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문학사상사 출판)를 펴냈다.

골프를 끊은 지 20년이 넘는다는 그는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만보기를 차고 걷는다. 하루 평균 5,000보는 기록한다고.

인터뷰를 끝낸 후 그는 42년 단골의 광화문 이발소로 향했다. 운전기사도 30년 넘게 그의 차를 운전하고 있다. 그의 품성이 짐작 가는 대목들이다. 그는 나차긴 바가단디 몽골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지난달 28일 출국했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8-03 19:04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