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은 공연장, 문화수준 10년 앞당겨"볼쇼이 무대공사 따낸 중소기업, "극장 지으려면 공연 콘텐츠도 꿰뚫고 있어야"

[한국 초대석] 원한수 자스텍 사장
"잘 지은 공연장, 문화수준 10년 앞당겨"
볼쇼이 무대공사 따낸 중소기업,
"극장 지으려면 공연 콘텐츠도 꿰뚫고 있어야"


모스크바를 가봤든 아니든, 무대예술에 관심이 있든 아니든, 볼쇼이 극장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볼쇼이 극장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정식 명칭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으로, 러시아의 자존심이자 상징이다. 1780년 건립됐으나 1805년과 1835년에 각각 불에 타기도 했다. 현재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장 증축 된 것이다. 좌석 수는 2,100여 개이며, 오페라단과 발레단, 부속학교 등이 있다.

얼마 전 이 극장 개ㆍ보수 공사의 무대장치 부분을 한국의 중소기업이 따내 화제가 됐다. 볼쇼이 극장은 세계 최고만을 고집하는데, 우리 기업이 그 관문을 뚫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무대기계 설치 제작 전문회사인 자스텍(Jasstech)이다. 볼쇼이 극장은 자스텍과 1,900만 유로에 해당하는 무대장치 설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볼쇼이 극장의 총 개ㆍ보수 비용은 7억 달러다.

자스텍이라는 회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도대체 어떤 회사이길래 세계 최고 극장의 개ㆍ보수 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무엇보다 궁금해 이 회사 원한수 사장을 찾아 얘기를 들어봤다.

“볼쇼이 극장 공사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무대설비 회사들의 꿈입니다.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볼쇼이 극장이 개ㆍ보수 공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번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중국 등에서 공사를 한 경험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러나 최고 극장에 최고 제품을 납품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

그래서 자스텍은 2003년 4월 견적서를 제출했다. 경쟁 상대는 독일의 보쉬 렉스로스, 오스트리아의 와그너 비로 등을 비롯해 러시아와 유고 등의 세계적인 회사들이었다.

“이번 수주로 세계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항상 독일 일본 등의 기업들과 부딪쳐왔는데, 이제 한국 기업이 인정 받은 셈입니다.” 한마디로 원 사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자스텍은 올 하반기에 설계를 마치고 2007년까지 작업을 끝낼 계획이다.

자스텍은 1967년에 설립됐다. 당시 명칭은 중앙기계공업사였다. 원 사장의 부친이 세웠다. 회사가 무대설치 사업에 주력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외국산 낚싯대가 고장 났다. 그것을 부친이 고쳐줬다. 원 사장 집안은 원래 엔지니어 집안이다. 오래 전부터 기계가공 일에 종사했다. 그 후 1970년대 초반 중앙일보 윤전기가 고장 났다. 부속품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부친이 고쳤다. 이런 것을 기반으로 1970년대 초부터 중앙일보 계열인 동양방송(TBC) 등 각 방송국 무대장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장비를 대부분 수입하는 것을 보고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대장치 부분을 특화 하게 됐다. 결정적 분수령은 예술의 전당이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와 자유소극장, 콘서트홀 등의 무대장치를 맡았다.

중국은 거대한 기회의 땅
원 사장이 회사의 힘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우리 기업에게 거대한 기회의 땅이다. 처음에는 대만의 신탁상업은행의 무대공사를 일본 산세이유소키와 합작으로 맡았다. 1994년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1996년에는 미쓰비시중공업에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납품해 일본 수출을 시작했다. 다음해에는 상하이 오페라하우스 공사에 역시 미쓰비시중공업의 OEM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약액은 17억 달러였다. 그런데 미쓰비시가 중국 측과 맺은 계약서를 보니 70억 달러였다. 그때 크게 느꼈다. “우리 브랜드가 아니면 남는 것이 없겠구나.” 그래서 직접 수출하기로 결심했다. 중국 시장에 대한 본격 진출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일본 기업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베이징 국립극장의 1억 달러짜리 프로젝트 때의 일이다. 당시 미쓰비시는 하청업체로 참여하면 싱가포르의 60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하청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브랜드로 입찰에 들어가야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미쓰비시의 방해를 뚫고 들어가 결국 프로젝트 참여에 성공했다. 그 후 미쓰비시 측으로부터 “자스텍이 계속 입찰에 참여하면 앞으로 모든 관계를 끊겠다”는 협박성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것이 오히려 중국 진출을 가속화하는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에 중국 사무소와 베이징 사무소를 각각 설치했다. 2002년에는 항저우 법인을, 지난해에는 베이징 법인을 각각 설립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돼 볼쇼이 극장 건을 성사 시켰다.

자스텍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인재와 기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원 사장은 ‘끊임없이 도전한다, 기술로 승부한다, 고객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 등이 회사의 기본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세일즈 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하기가 곤란합니다.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볼쇼이 극장 수주를 따낸 것은 이런 것들의 결실인 것이다.

한류, 수준높은 공연과 접목해야 생명력
원 사장은 일년에 절반 정도를 중국에서 보낸다. 서울 본사 그의 사무실에는 대형 중국 지도가 있고, 양국 국기가 나란히 놓여있다. 차도 중국 차를 마시고, 회사 소개서도 중국어 판이 더 많다. 그래서인지 원 사장은 중국 내 한류에 대해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중국에 5군데 현장이 있습니다. 극장을 짓다 보니 극장 운영에 대한 문의를 많이 받습니다. 경극만 아니라 다른 공연도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극장을 짓고 있습니다. 한국의 좋은 공연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로 한류를 이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수준 높은 좋은 공연을 직접 보여줘야 합니다. ”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서로 보완이 되어야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 사장은 이를 ‘신 한류 체험’이라고 불렀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

그가 요즈음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극장 비즈니스’다. 그 방면으로 전문 기업화하겠다는 것이다. 공연장을 지으면 무슨 공연을 할 것이냐를 사전에 결정해 거기에 맞게 설비를 제작해야 한다. 이제는 획일화한 극장을 지으면 안 된다. 특색 있는, 살아있는 극장을 지어야 한다. 도시 인프라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의 소신이다. “볼쇼이 극장을 보면서 왜 극장을 짓는지 그 철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는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없애주는 곳입니다. 배우가 생동감 있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입니다. 앞으로 괜찮은 극장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는 기업, 공연을 이해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 사장의 주장이다.

“외국기업 들의 경우를 보면 이 극장에서 무슨 공연을 하고, 극장을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 등을 먼저 따집니다. 그에 맞게 극장을 짓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상하이 푸동극장 입찰에서 떨어졌습니다. 당시 극장측이 ‘뮤지컬을 중심으로 하려고 하는데 어떤 설비가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대답을 못했습니다. 다목적이냐 아니면 특정 공연을 위주로 하려하느냐를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수출하면서 느낀 것인데, 다목적이 무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 사이타마의 경우 기본적 운영방식을 결정하는 데만 10년이 걸렸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데 우리도 있어야지, 거기는 몇 석이니까 우리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는 좋은 극장이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앞으로 국내에 극장이 많이 지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문화적 욕구가 갈수록 급격히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문제는 얼마나 잘 짓느냐는 것인데, 여기에는 여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잘 짓자는 압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 남북 잇는 극장 세우자
“공연장 자체가 문화예술 환경을 최소한 10년은 앞당깁니다. 그런데 공연장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무대설비입니다.” 어떤 무대설비를 만드느냐에 있어서는 결국 아이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보통신(IT)이나 컴퓨터 관련 기업만이 벤처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다.

무대장치 제작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각지대에 있는 산업이다. 하지만 문화산업에는 없어서는 안될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원 사장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자신이 지은 극장에서 공연을 볼 때다.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했구나 하는 느낌으로 뿌듯하다고 했다.

반대로 아쉬웠던 경우는 중소기업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이다. 무대장치 분야에는 대기업이 없는데도 공연장 건설이 턴 키 베이스로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건설사가 무대까지 만들 수는 없는데도 그렇다. “국제 입찰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별도 발주해야 합니다.” 자스텍은 국내 최초의 무대기계 수출로 대표자가 1999년 훈장을 받고, 2000년에는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비무장지대에 철도 도로만 연결할 것이 아니라 한국을 상징하는 극장을 짓고 가교로 남북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측의 공연을 번갈아 또는 함께 올려야 합니다. 프랑스 바스티유 극장도 감옥소 터가 아니었습니까.” 원 사장이 대통령 등 정치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이상호 편집위원
사진=임재범 기자


입력시간 : 2005-08-23 16:54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