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성 출혈열 '한탄바이러스'발견한 세계적 미생물학자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신개발은 인류를 지키는 보루"
유행성 출혈열 '한탄바이러스'발견한 세계적 미생물학자

‘한국의 파스퇴르’ 이호왕(76) 박사. 그는 20세기 한국이 나은 자랑스런 세계적 과학자다.

그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적의 총칼보다 더 처참하게 참호 속 군인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간 괴질(怪疾), 유행성출혈열(학명 신증후출혈열)의 병원체인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 ‘한탄바이러스(Hantaanvirus)’와 ‘서울바이러스(Seoulvirus)’로 명명한 뒤 예방백신을 개발한 미생물학자다.

8월의 마지막 날 서울 강남구 도곡동 집 근처 사무실에서 이 박사를 만났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현미경 속 바이러스와 평생을 숨바꼭질해 온 그의 삶은 과학만큼이나 곁가지 없이 담백하다.

“얼마 전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 밖 구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월전(月田) 장우성의 그림을 사 거실에 걸었는데 보면 볼수록 깨달음이 생긴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나라가 이제 먹고 살만 해졌다고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아직 ‘우물 안 개구리’ 신세라는 지적이다.

그는 우선 “학문 세계에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 자신도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하기까지의 기록을 ‘한탄강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책을 쓴 적이 있지만,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없이 과학 발전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또 당장 돈벌이와는 좀 거리가 있는 기초과학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기업보다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제2, 제3의 황우석 박사는 투자에서 나온다는 설명이다.

유행성 출혈열 항체 발견에 올인

이 박사는 요즘 한국에 세계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한국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백신은 전염병 쓰나미를 막는 방파제’ ‘백신 안보 확보’라는 기치아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연구실에만 머물지 않고 ‘백신 운동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작년 말 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로 20만명의 목숨이 희생됐지만, 예방 가능한 감염성 질환은 5세 이하 어린이 500만명을 포함해 매년 1,100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가 세계 전체 사망 원인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백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백신산업이 크게 후퇴해, 현재 백신 자급률이 10% 안팎에 머물고 있어 언제든 심각한 백신 부족 사태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행성출혈열의 예방 백신인 ‘한타박스(Hantavax)’와 진단법 ‘한타디아(Hantadia)’는 1990년 이 박사가 녹십자사와 공동 개발한 우리나라의 신약 1호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흥. 농사도 짓고 장사도 했던 유복한 시골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함흥의과대학을 다니다 월남해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학 중 전쟁이 터졌다. 졸지에 북의 부모, 누이동생과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됐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내과를 지망했다. 전쟁통이었던 1951년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시절엔 천연두며 뇌염,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독감만큼이나 흔했다.

당시 그가 유능한 내과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서 징검다리 격으로 택한 공부가 전염병학, 즉 미생물학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인연이 평생의 학문이 됐다.

그 당시 교육여건은 교실도 구하기 힘든 판이어서 제대로 갖춰진 실험실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미생물학과엔 세균배양기도 없었다. 이 박사는 이 때 세균이 든 용기를 가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체온으로 세균을 배양해 실습에 쓰곤 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지만, 열정 하나로 버텼던 젊음이 부럽기만 하다.

이 박사의 미생물 연구에 전기를 마련한 것이 조교 생활 중 운 좋게 얻은 미국 유학 기회였다. 미국 정부가 서울대의 젊은 학자 100여명에게 미네소타대학에서 공부할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 때 유학 간 학자들이 1960년대 대거 돌아와 대학에서 본격적인 서구식 교육이 시작됐다. ‘미네소타 학파’가 한국 대학의 교육을 장악했던 셈이다.

이 박사는 1955년부터 4년 간 미네소타대학에서 일본 뇌염 연구로 석ㆍ박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귀국해 미국 국립보건원(NIH)서 연구비를 받아 1969년까지 뇌염연구를 했다. 69년 연구가 중단된 것은 일본에서 일본뇌염 백신 개발에 성공한 탓이다.

이 박사에게는 ‘캄캄했던 시절’ 이었다. 일본 학자에 선수를 뺏긴 것이다.

이후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찾아 이 박사의 현미경이 주목한 것이 바로 유행성출혈열이었다.

유행성출열혈 규명 작업은 당시 미 육군의 시급한 숙제였다. 한국전쟁 때도 그랬지만 당장 휴전선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이 괴질로 숱하게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이 박사는 용감하게 미 육군성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정부는 그 때까지 내로라 하는 노벨의학상 수상자 2명이 포함된 연구진에 4,000만달러라는 거액을 쏟아 부었으나 괴질의 규명에 실패한 터였다.

1년 후 도쿄 미 육군 극동사령부에서 한 연구원이 찾아 왔다. 이 박사가 요구한 연구비는 한해 고작 1만3,000달러.

미국의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이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박사의 유행성출혈열과의 6년 간 싸움이 시작됐다. 연구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매년 연구비를 타기 위해선 연구 진척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삶은 매력적"

첫 승전보는 1974년에 있었다. 한탄강 유역에 많이 서식하는 등줄쥐의 폐장을 숙주로 기생하는 유행성출혈열의 항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코리아 항원’으로 불렀다. 그러나 처음엔 이 항체가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기서 활로를 연 것이 당시 막 소개된 ‘형광 항체법’이었다.

항체를 통해 항원을 역추적해 가는 방식이었다. 결국 1976년 그는 ‘유레카(알아냈다)’를 외쳤다. 인류를 괴롭혀 오던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세계 과학계는 충격 속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과학 후진국인 코리아의 학자가 인류의 숙제를 풀다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믿지 않는 과학의 세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그는 미국이 4,000만달러를 들여 실패한 프로젝트를 6년 만에 단돈 10만달러로 해낸 것이다.

그는 “1976년부터 한 10년 간은 과학자로서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술회한다. 영웅의 탄생이었고, 어디 가나 칙사 대접이었다. 요즘의 황우석 박사 인기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 박사는 그가 발견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한탄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주로 한탄강 유역에서 채집한 등줄쥐가 바이러스의 숙주인 점도 있었지만, 38선을 따라 흐르는 분단의 상징 한탄강이란 지명에 특히 애착이 갔다”고 되새기는 대목에선 그가 이산가족임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학문적으로 민족의 한을 싣고 흐르는 한탄강의 주인이 됐다. 이후 그는 서울 집쥐에서도 유행성출혈열의 바이러스인 ‘서울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박사는 2002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장도 역임했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학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2남을 뒀다. 큰 아들 성일(42)씨는 성균관대 공과대 교수, 작은 아들 근(41)씨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학자 집안으로 일가를 이룬 셈이다.

고령에도 병치레 없이 건강한 이 박사는 자신만의 건강 비결이 있다. 선배한테 배워 3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이 비결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 30, 40분 온 몸을 푸는 ‘침대 체조’다. 그는 한 번 해보라고 진지하게 권하며 어린아이같이 웃는다.

과학자로서의 일생을 걸어온 것에 후회가 없냐고 묻자 “현실 앞에 상상이 있을 수 없는 과학자의 삶은 좀 딱딱할 수도 있지만 집중적인 삶이라는 면에선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답한다. 실험실을 벗어난 요즈음 문학과 음악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했단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9-07 15:50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