紹軒 정도준

“동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다.” “서예에서 3차원의 조형 세계를 볼 수 있다니.” 1999년 소헌(紹軒) 정도준(58)의 서예를 처음 접한 서구 평단의 탄성이다. 서(書)라고도, 화(畵)라고도 말하기 힘든 소헌의 서예에 대한 놀라움의 고백인 셈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는 소헌의 작가 정신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뜻이다.

예스러운 묵향에 현대의 숨결을 불어넣은 그의 서예가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열렬한 팬인 로랑 그로고쟈 까르띠에 한국지사장은 소헌의 서예를 “여백의 미를 살린 회화적 서체, 한지만의 독특한 촉감, 여기에 향기로운 묵향까지, 그야말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예술”이라고 했다.

소헌은 17일부터 프랑스 한림원 초대로 마르세이유의 ‘공간예술과 자유 미술관(Espace Art et Liberte Musee)’에서 10번째 해외 개인전을 가진다. 10월26일 서울 인사동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소헌은 요즘 곧 있을 프랑스 전시회 구상에 여념이 없다. 현지 미술관에서 보낸 사진이며 설계도를 펼쳐 놓고 작품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 중이다.

차 한 잔을 놓고 먼저 서예가 서법(중국)ㆍ서도(일본)라고 불리는데 가장 합당한 말이 무엇인지 말문을 트자 “우리나라에서 서예라는 말은 소전(素筌) 손재형(1908~1981) 선생이 처음 쓴 것으로 알지만, 서예는 어느 한 가지 말에 가두기가 불가능한 세계”라고 답한다.

그는 “음악에서 득음(得音)의 경지를 논하듯 서예도 자신만의 선(線)을 얻는 득선(得線)의 경지를 위해선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신만의 격(格)을 표현하는 선을 얻기 위해선 그야말로 예(藝)와 법(法)과 도(道)가 한데 어우러지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그은 한 획도 범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국서예의 폭을 넓힌 오륜체

소헌은 194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주 촉석루와 해인사 해인총림 현판을 쓴 유당(惟堂) 정현복(1909~1973)이다.

소헌은 10살 무렵부터 부친 밑에서 먹을 갈고 붓을 잡았다. 대학(건국대)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당대 일중(一中) 김충현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서예인으로 젊은 시절 방황도 많았다.

서예가 마치 골방 영감의 취미 정도로 치부되는 세태와, 이것 해서 밥 먹겠나 싶어 붓을 놓을까 고민도 적잖았다.

그러나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전업작가로서 한 길을 걸었다. 막연하지만 묵향의 세계에 자신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대학, 문화센터 강사 등 ‘보따리 장수’ 십여 년째였던 1982년, 소헌은 서단에 이름을 알릴 기회를 잡았다.

그 당시 말도 많던 국전이 폐지되고 화단의 등용문이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새 출발을 한 첫 해에 그는 작품 ‘조춘(早春)’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서예가 정도준’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작품 제작에도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이후 소헌은 자신만의 서예 세계를 열기 위해 어깨가 굳을 만큼 먹을 갈고 획을 쳤다. 그는 모든 예술이 그렇듯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첫째이지만 스승을 쫓아가기만 하면 ‘스승 집에 평생 세 들어 사는 격’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길을 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그만의 서예를 이뤘다. 특히 ‘오륜체’로 불리는 소헌의 한글체는 오륜행실도에 기초해 새롭게 발전시킨 것으로 서예가들이 꺼려했던 한글 서예의 폭을 크게 넓혔다.

그는 전각(篆刻)에도 능하다. 전각은 쓰는 것이 70%이고, 칼로 새기는 것이 30%라 한다. 쓰는 것이 우선이란 말이다.

동시에 서예는 그에게 ‘쓰기’가 아니라 ‘구성’이다. 전각이나 서예는 잘 쓴다는 경지를 넘어 글씨와 여백의 절묘한 조화를 빚는 조형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서예는 차라리 회화다. 이는 자신의 서예를 ‘보는 서예’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서단의 평가는 궁궐과 문화재급 현판에 자신의 글씨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다. 2001년 경복궁의 ‘홍례문’ 현판 휘호를 비롯해 ‘유화문’ 현판과 창덕궁의 ‘진선문’ ‘숙장문’ 현판, 규장각 그리고 덕수궁의 덕홍전 중수기 등 숱한 문화재에 글씨를 남겼다. 최근에 복원된 청계천 복원사의 글씨 역시 그의 작품이다.













잠깐 화제를 돌려 과거 붓글씨를 좀 썼다던 대통령들의 서예 수준에 대해 묻자 괜한 호기심이라며 말을 삼간다.

다들 취미로 쓴 것이기에 품평하기에 걸맞지 않다는 말이다. 다만 그런 글씨가 궁궐의 얼굴과 문화재 현판에 아로새겨진 것은 문화가 권력 아래 숨죽였던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사라는 것이다.

서양미술계 놀라게 한 여백의 미

소헌의 명성은 솔직히 한국인인 우리가 민망할 정도로 해외에서 더 하다. 그의 서예가 서양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의 초대전이다.

당시 반향은 선생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마치 19세기 서양의 화단이 일본의 판화를 접하고 받았던 충격처럼, 문자와 여백의 추상을 탐색한 소헌의 세계는 그 전에 봤던 중국과 일본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의 린덴 박물관은 지난해 그의 초대전 이후 상설 한국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소헌은 요즘 일주일에 한두 차례 짬을 내 일반인을 직접 가르친다. 서예에 대한 몰이해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에 시간을 쪼개고 있다.

곧 예순인 나이를 몰라볼 정도로 젊어 보이는 비결을 묻자 “세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예인이 서예가”라고 귀띔 하곤 소년처럼 웃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