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와 집념으로 일궈낸 마르지 않을 '영화의 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말 그대로 회의적이었습니다.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죠. 주위에서는 대부분 말렸습니다. 그런 지독한 우려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죠.”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린 후 한 달이 훨씬 지나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인터뷰한 것은 영화제에 대해, 그리고 그의 영화 사랑에 대해 좀 더 여유 있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였다.

그는 “영화제가 벌써 끝났는데, 뭘”이라고 다소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영화가 화제에 오르자 청산유수였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집념은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았다.

1996년 국내 첫 국제영화제로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역사가 오래고 예산도 훨씬 많은 도쿄영화제를 일찌감치 따 돌리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잡았다.

도쿄영화제는 예산이 부산의 두 배가 넘지만, 관객 스태프는 4분의 1 수준이다. 처음 18만명을 기록한 관객은 꾸준히 유지돼 20만명선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해외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모르는 영화인들은 이제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참가를 희망하는 해외 영화인들을 선정하는 것이 고민이 된 지가 꽤 됐다.

올 베니스영화제 개막식에서 칸과 베를린영화제 위원장 사이에 김 위원장의 좌석이 배치된 것이 그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흔들림 없는 영화 사랑

김 위원장은 영화제 소감을 묻자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또는 ‘운이 좋아서’ 등의 의례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쏟아 부은 노력과 정성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를 짙게 풍겼다.

김 위원장이 10년을 버틴 기둥은 ‘오기’와 ‘집념’이다. 처음부터 그가 영화제를 창설하자고 나선 것은 아니다. 부산에 연고가 있는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돼 영화제를 논의했고, 그에게 집행위원장을 부탁했다.

“권유, 아니 꾐에 빠져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맡자 무섭게 매달렸다. 비판적이고 패배적인 주위의 시선을 보라는 듯이 이겨내고 싶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인데,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끝장을 봐야 했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는 이 같은 말을 아주 부드럽게 했다. 표정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풍기는 인상도 ‘오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이웃집 할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할아버지 모습인 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처음에는 이상했다.

그러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영화제가 장수할 수 있는 데는 무엇보다 부산 시민과 영화 팬들의 적극적인 성원과 영화제 관계자들의 엄청난 땀이 바탕이 됐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조절하고, 방향을 정하고, 끌고 나간 것은 결국 김 위원장의 리더십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영화제 장수 이유로 영화제의 정체성과 일관성 확립을 꼽았다. “아시아의 신인 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발굴해 세계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10년 동안 꾸준히 실행했습니다. 3회부터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을 시작해 아시아 감독들의 좋은 프로젝트를 엄선, 투자자와 연결시켜줬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식상해 새로운 영화를 갈망하는 관객들의 불만을 해소 시켜 주었다.

외압이나 외부 영향력을 막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다시 강조했다. “부천 판타스틱영화제의 경우 8회가 지속되면서 자리를 잡았으나 부천시에서 개입하면서 위상이 흔들렸습니다. 해임된 집행부는 서울에서 다른 판타스틱영화제를 같은 시기에 개최했습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서울을 택했고 부천을 외면했습니다.”

지방정부는 지원은 하지만 간섭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영화제도, 지자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철학이다.

김 위원장은 직원들에게 최대한 자율을 보장하고 책임은 자신이 진다. 1회부터 지금까지 4명의 프로그래머는 한 명도 바뀌지 않았다. 영화제의 색깔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각 후보들이 영화제를 통해 자신을 알리려 했을 때도 그는 모두 거절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영화제 장수를 뒷받침하고 있다.

세계영화인들의 '축제의 장'

김 위원장은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성과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한국 영화의 해외 소개 및 진출이다.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초청이 크게 증가한 데는 부산영화제의 역할이 컸다.

이창동이나 김기덕 감독에서 보듯 부산영화제는 한국 영화가 해외에 나가는 주요 창구가 됐다. 또 하나는 부산을 영상산업도시로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점이다. 베니스나 칸처럼 항구와 바다에 영화를 절묘하게 잘 조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10년 동안 쌓아올린 부산국제영화제만의 독특한 멋과 맛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거리에 신문지 등을 깔고 앉아 같이 영화를 보면서 술을 먹었다.

또 영화제동안 외국 손님을 횟집에 초대해 매일 술 마시고 노래 불렀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토론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 마디로 신나게 노는 것이다.

영화제는 영화인들의 축제이고, 그에 걸맞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영화 예술인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고, 당연히 대성공이었다.

그 추억과 낭만을 잊지 못해 매년 부산을 찾는 영화인들이 적지 않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경우 수많은 영화제 초청 가운데 일년에 다섯 차례 정도 참석한다.

그 정도로 바쁜 그이지만, 매년 부산은 잊지 않고 찾는다. 디터 코슬릭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도 마찬가지다.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대만의 세계적인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이제 노래방에 가면 서로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밤 새 폭탄주를 마시고 새벽 6시에 공항으로 직행한다.

유명한 술꾼인 김 위원장은 술을 매개로 국내외 영화계에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술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40~50명을 상대로 술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최소한 한잔 씩 만 주고 받아도 엄청난 양이다. 비법은 중ㆍ고교 때부터 마셔 내성이 생긴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영화제 기간 중 보통 국내외 감독 및 손님들과 함께 새벽 4~5시까지 매일 먹는다. 잠은 하루에 많아야 3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

어떻게 버티냐고 하자 일주일에 3일, 한 번에 3시간씩 테니스를 치는 것,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냉ㆍ온욕을 하는 것 등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란다.

이는 해외에서도 거르지 않는다. 이런 노력과 열정, 희생 위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우뚝 섰고, 이를 발판으로 우리 영화가 해외로 나갔던 것이다.

영상종합시장 부산필름마켓 창설

그는 부산영화제의 경우 이제부터가 본격 시작이라고 했다. 우선 시급한 것이 예산 확보다. 재정적 안정기반 구축이다. 부산의 위상을 높인데 비해 재정 지원은 아직 미흡하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다.

칸은 정부 지원이 50%, 베를린은 3분의 1이다. 시급하기는 필름 마켓도 뒤지지않는다. 현재 아시아 영화를 중점적으로 사고 파는 시장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얼마 전부터 도쿄와 홍콩이 시장 기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상하이와 방콕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칫하면 우리가 주도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내년부터 부산필름마켓을 창설키로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PPP 및 촬영 로케이션 마켓과 함께 영화의 기획ㆍ촬영ㆍ판매를 총괄하는 종합 시장의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이미 사전 조사와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이 끝났다. 내년 10월15일부터 4일간 시장을 열 계획이다. 그는 성공을 자신한다.

아시아영화아카데미도 중점 추진 사항이다. 아시아에는 감독지망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다. 연간 800편을 만드는 인도에도 없다.

그래서 올해 아시아 각국에서 28명을 뽑았다. 여기에 한국과 아시아에서 각각 2명의 감독이 참가해 1대 1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동서대가 공동으로 맡았다. “이런 식 교육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이들은 영화 두 편을 완성하고 헤어졌다. 내년에는 규모를 더 늘릴 계획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전용 극장이 없다. 때문에 추석 기간 등을 살펴 일정을 잡아야 해 ‘음력 영화제’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2009년에는 만족할만한 규모의 전용관이 완성된다.

그래서 이제는 대학과 기업, 영화제를 연결하는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김 위원장은 강조한다. “전문 인력을 양성해 고급 두뇌를 부산영화제 및 부산 영상산업과 연계해 활용하는 것이 당면 과제입니다.”

한국 영화의 문제점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간단하고 확고하다. 최근 우리 영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 영화, 저 예산 영화, 예술 영화 등이 상대적으로 너무 저조하다. “한 마디로 돈이 안 되서 그렇겠지만, 그 격차가 너무 심합니다.”

전문적 배급망과 상영관이 거의 없다. “이들 영화가 장기적으로, 일정 기간동안 상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화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쉽게 말해 재주가 많다. 이재용 감독의 ‘정사’와 프랑스 끌레어 드니 감독의 ‘개입자’에 출연하기도 했다. 후자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는 등 주요 영화제에 소개돼 해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배우’라고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사진 찍는 솜씨도 유명하다. 특히 해외에 나가면 만사 제쳐두고 한국 감독과 배우들 사진을 찍는다. 이를 몇 년 후에라도 꼭 본인에게 준다.

얼마 전 베를린영화제에서의 임권택 감독 회고전 때 임 감독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를 우편으로 보내줬고, 사진을 본 임 감독은 정색을 하며 “촬영감독하고도 남을 실력”이라고 감탄했다.

서예는 각종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또 그림 보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해외 영화제 등에 참석할 경우 꼭 미술관을 찾고 도록을 구입한다.

도록은 웬만한 화가보다 많다. 아마추어든 전문 화가든 1960~80년대 개인전의 도록은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을 때는 100유로가 넘는 도록을 ‘기쁜 마음으로’ 샀다.

"기회되면 영화 한 편 만들고 싶어"

앞으로 희망은 위원장을 물러난 후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1년 정도 영화 수업을 받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영화제가 그를 놔주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는 1년에 절반 이상을 밖에서 보낸다. 올해 방문한 도시만 30개가 넘고, 참가한 영화제는 22개에 이른다. 연말까지 두 영화제가 더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외 영화인들과 친분이 두텁고, 이것이 우리 영화 발전의 하나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는 국내 영화 중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영화인은 누구냐고 묻자 직업상 말할 수 없다며 그냥 웃는다. 외국 영화는 너무 많이 봐서 그것이 그것인 것 같단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10년을 한 매듭으로 본다. 그 매듭을 넘어 이제 다시 출발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부산영화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그것이 우리 영화에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