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 복간은 한풀이 아닌 의식의 이정표 세우는 일"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저음의 목소리 등 아버지인 고 장준하씨를 그대로 빼닮은 장호권(57) ㈜장준하 사상계 회장은 사상계 복간 준비에 한창이다.

사상계는 현재 제3공화국때 장준하씨로부터 발행권을 인수했던 부완혁(1984년 사망)씨 장녀가 판권을 가지고 있어 ‘장준하 사상계’로 이름 지었다.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지만, 복간은 반드시 합니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먼저 e-사상계(esasangge.com)로 인터넷에서 문을 열었다. 젊은 이들에게 사상계란 무엇인지를 먼저 알리기 위해서다.

젊은이들도 사상계는 실물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1953년 4월 고 장준하씨가 창간한 월간 종합 교양지로, 1950~60년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모태가 됐던 지식인들의 필수 잡지였다.

장준하씨의 의문사 후 30년,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된지 35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현안보다는 교과서 같은 책 만들고 싶어

“사상계는 20년간 한국의 지성을 인도했다고 봅니다. 암울한 시절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것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상계가 보여준 길은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4ㆍ19의 기폭제 역할도 했고요. 5ㆍ16 이후 수난의 시대를 맞아 정치와 반독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일간지가 6만부 정도 나갈 때 사상계는 10만부를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지식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김종필씨 조차 5ㆍ16 훨씬 전에 놀고 있을 때 사상계에 이력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총리가 된 후 이력서를 돌려 받을 수 있겠느냐고 사람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5ㆍ16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사상계였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읽지는 않더라도 사상계를 들고 다녔습니다. 지식인들에게 교과서 같은 잡지였습니다.”

이번에도 시사 현안보다는 교과서 같은 책을 만들 작정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와 지금의 제 나이가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상계 창간 때와 비슷해요. 진보와 보수, 세대 및 계층간 갈등으로 총체적 혼란기를 맞고 있습니다.”

사상계 복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헌 책방 등에서 사상계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격려 전화도 가끔 받는다.

그는 “1950~60년대 젊은이들은 그래도 역사의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부족하니 오히려 지금이 더 혼란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 30년 동안 젊은이들이 역사의식을 잃어버린 게 아닌지 하는 우려까지 듭니다. 이것이 정론지였던 사상계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장 회장은 복간할 사상계도 장준하 선생의 평소 신념이었던 민주와 민족을 편집 방향으로 정했다. 다만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 만큼 내용과 형식은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출 계획이다.

잡지는 3분화할 생각이다. 앞쪽에는 보수 성향의 글을, 뒤쪽에는 진보 성향의 글을 실을 예정이다.

가운데는 중용의 글로 장식한다. 잡지를 앞에서도, 뒤에서도 볼 수 있다. “젊은이들 의견을 들어보니 호응이 좋습니다.”

잡지가 수익성이 어떨 것 같으냐고 묻자 단호히 말한다. “복간은 돈벌이를 위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업이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혼란한 나라에 이정표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다만 운영문제 등으로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많은 자금이 들지만 그 일을 완벽하게 알 경우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편집 방향에서 흔들리지 않고 경영에서 의식 있는 사람이 뭉치면 남들의 10분의 1도 안 듭니다. 외국에서 벌어서 가지고 온 돈이 조금 있는데 그것을 우리 가족을 위해 안 쓰고 장준하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사회에 알리는데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사상계는 공익잡지로 나갈 것입니다. 국민의 잡지로 만들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시면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의식있는 독자 위한 책, 물량주의는 배격

장 회장은 나름대로 방법이 있다고 했다. 공공단체와 학교 등에서 벌써부터 요구하고 있어 잡지 소화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

약 8,000부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무작정 파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있는 독자를 찾아서 가겠다는 것이다. 물량주의는 철저히 배격할 계획이다.

글도 예전처럼 무겁지 않고, 젊은 층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겠다고 했다. “젊은 층의 추세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 사상계에 향수를 느끼는 층과 젊은 층이 3대 7 정도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복간을 위해 장준하의 광복군 동지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명예 고문을 맡고, 이부영 장준하 기념사업회장과 함세웅 신부 등이 고문직을 맡았다.

편집자문위원으로는 김진현 전 과기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김도현 전 문화관광부 차관, 임현진 서울대 교수, 정두환 역사비평 대표, 윤무한 강원대 교수, 송민훈 홍익대 교수 등이 참여한다.

아버지가 1975년 8월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후 어떻게 생활했느냐고 묻자 고생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독재정권의 철저한 탄압으로 그의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찾지조차 않았다.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어 쌀을 훔칠 생각까지 했다. 장 회장은 76년 4월19일 밤 4명의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산산조각 났다.

8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의 턱은 백금으로 간신히 이어놓은 상태다. 테러 이후 입이 비뚤어졌다.

“아버지도 죽이는데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활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떠나 일단 살아야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79년 빈털터리로 말레이시아 행 비행기에 올랐다. 말레이시아를 선택한 것은 비자 없이도 갈 수가 있어서 였다. 그곳에서 청소와 막노동을 하며 근근히 살다가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인 82년 귀국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서울 서초동 한 건물 지하실로 끌려가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의 이름을 불라며 고문을 당했다.

다시 도망치듯 싱가포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난한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칠까 봐 극도로 조심을 했다.

93년 아내와 두 딸이 싱가포르에 왔지만 겨우 마련한 방 한 칸에서 신문지를 깔고 나뭇가지를 잘라 젓가락으로 해 밥을 먹을 만큼 빈곤했다.

그러다 한 교민의 소개로 유럽 투자자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금융 컨설팅을 시작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됐다. 현재 두 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2003년 완전 귀국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일을 다시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회고록인 ‘돌베개’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돌베개가 장준하의 광복군 활동과 해방 뒤 환국 때까지의 일을 기록했다면, 후속편은 그 이후 해방과 4ㆍ19, 5ㆍ16에 대한 기록이다.

“아버지는 5ㆍ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부분까지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제가 좀 덧붙일 계획입니다.”

박정희 시대와는 '화해' 생각없어

장 회장의 요즘 정치권에 대한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아직 민주주의가 완전 정착하지 않았어요.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민중의 통일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통일논의는 남측과 북측 기득권층들의 잔치놀음에 불과합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죠.”

장준하 선생도 정치권에서 필요할 때 이용하고 나중에는 소외시켰다고 한다. 그는 그런 정치인을 모리배라고 불렀다. “정권욕 때문에 반독재 투쟁을 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후 그들의 행동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직접 정치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려고 했단다. “아버지가 감옥에 계실 때 저를 보고 성격이 그러니 정치 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을 많이 품고 살아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언젠가 저를 필요로 할 경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온통 사상계만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제의는 있었지만, 일절 응답을 안 했습니다. 지금 정치권에 나가면 아직 한이 남아있어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거 기억 때문에 현존 정치인들과 충돌할 우려가 있습니다. 심하면 피를 볼 수도 있죠. 여하튼 지금은 객관적으로 정치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지 박정희 시대 사람들하고는 화해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물과 기름이라는 것이다.

대신 봄이 되면 대학가를 돌며 강연을 할 예정이다. 그는 이제는 민족주의도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구적이 아닌 글로벌한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만 잘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이고 동등한 민족주의가 요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라는 말보다 ‘장 선생’이란 호칭을 더 즐겨 쓴다.

“장 선생은 김지하 김도현 이부영 등과 같이 지내면서 꼭 그들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도 아버지를 선생이라고 불렀고요.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그렇게 부르게 되더군요.”

장 회장은 말미에 혼잣말 비슷하게 문득 꺼냈다. “사상계가 역사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다면 나도 장준하의 아들이 아닌 장호권으로서의 인생을 살 수 있을텐데….”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