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정오, 우리 시대의 ‘영원한 춘향’을 만나러 간 남산 국립극장 앞마당은 때마침 봄기운이 완연했다.

약속 장소인 극장 내 카페 ‘해와 달’로 들어서는 그의 인상은 의외로 수수하고 평범하다. 5척 단신 자그마한 체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대충의 옷차림…. 언뜻 보기에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생뚱맞다.

그러나 간단한 수인사 뒤 마주앉은 그는 달랐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 때문이다. 한창 때 ‘춘향’도 부럽지 않았을 형형한 눈빛이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창극 무대 최고의 ‘춘향’으로 통하는 명창 안숙선(57ㆍ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이 바로 그 사람이다.

먼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레 운을 떼자 “차림새가 좀 그렇죠. 그럼 사정없이 일어나버려” 한마디 툭 던지고선 미련없이 일어나 앞장을 선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것. 단신의 조그만 몸집과는 달리 행동거지가 거침없이 ‘아쌀’하다.

그는 남원지방 산골마을 태생으로 아버지는 ‘나무장사꾼’이었다. 가난이야 그 시절의 흔한 수식어지만 그에겐 유독 더 심했다. 그러나 산골은 장독대고 우물가고 어느 곳에서나 남도 특유의 흥이 흘러 넘쳤다.

그런 남원 지역에서 9세 때부터 잔칫집이며 명문가를 돌며 ‘애기 명창’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제 소리인생 50년을 앞두고 있다. 또 지난달 28일에는 9년여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창극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2회 허규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남구 세곡동 집으로 가는 도중 그는 ‘밥부터 먹자’고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고깃집으로 이끈다. “채식하신다고 들었는데”라며 그에 관한 기사를 떠올리자 “한동안 그랬죠. 근데 소리꾼은 권투선수와 같아요. 한번 무대에 서면 젖 먹은 힘까지 모두 길러내니 고기힘, 밥힘 없으면 다리가 후들거려요”며 웃는다.

식사량을 보니 ‘저 자그마한 사람이 한번 서면 6~7시간 이어지는 완창 무대를 어떻게 수차례나 소화해 냈을까’며 생각했던 의문점이 풀린다. 또 자분자분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 솜씨는 흥겨운 가락마냥 운율이 있어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한다. 사설과 가락이 한 몸인 판소리 대가의 마력이랄까.

소리꾼 한평생,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

“소리하는 분들이 득음, 득음 하는데 선생께서는 득음을 하셨는지…”라고 묻자 그는 손사래부터 친다.

그는 “동리(桐里) 신재효(1812~1884년) 선생께서 판소리는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이 있고 그 다음이 느름세(판소리할 때 창자 특유의 연기)라고 했어요. 득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전체를 갖춰야 제대로 소리한다 할 수 있죠”라고 한다.

말인즉 소리는 얻고 말고가 아니라, 인생처럼 끝없는 진행형이고 과정이라는 설명. 명창이라도 소리를 좀 게을리 하면 옛 어른들 말씀대로 금방 ‘새제비(초년생)’ 같이 된다는 것이다.

안 쓰면 녹스는 게 소리로 평생을 마라토너처럼 뛰어야 한다며, 한편으로 고달프고 한편으로 미친 것 같은 소리인생을 털어놓는다. 자기 귀가 자기 소리에 한번 반하면 그때부터 아무도 못 말리는 게 소리꾼 삶이라고.

요즘 이런 ‘아름다운 광기’가 점점 사라져가는 게 아쉽다며 그는 영화 <서편제> 의 후유증을 예로 든다.

그의 소리로 더빙한 영화 <서편제>가 대중에게 판소리의 맛을 새롭게 조명한 계기가 됐지만, 한편으론 소리꾼들이 소리보다 유명세나 잿밥에 혹해 옆길로 새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판소리나 창극에서 스타를 키우고 현대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국립창극단 감독을 지낸 그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좋은 소리 없이는 말짱 헛것이란 얘기다.

그는 요즘 옛 스승들이 ‘소리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던 호통을 다시 새긴다. 예인이 갖춰야 할 ‘인물치레(인격ㆍ몸가짐)’에 대한 것이다.

명창 김소희(1917~1995년) 선생의 일화 한토막. 말년에 병으로 누워 있는 김소희 선생께 문안을 갔다 나오는데 선생이 편지봉투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집에 돌아와 열어보니 한 줄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아무 곳에나 나가 소리하지 마라.”

그는 기력이 없어 희미하게 쓰인 스승의 필체를 보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근간 방송출연이 잦았던 자신에 대한 스승의 따스한 꾸지람이자 염려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절대”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소리꾼으로 살며 오랫동안 품어 온 격언이 하나 있다. ‘기쁨보다 슬픔을 담은 소리가 더 달다.’ 9세 때 그에게 판소리의 맛을 처음 일깨워준 주광덕 선생이 즐겨 하던 말이다. 그때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나중에 세월이 그것을 깨우치게 했다.

그럼 소리에 슬픔을 어떻게 담습니까? 묻자 그는 “스승들은 슬픔을 터뜨리지 않았어요”라며 에둘러 말했다.

슬픔이 클수록 절제되고 감춰진다는 뜻이다. 그는 ‘소리는 죽죽 펴서 하는 게 좋다’던 스승들의 말씀이 나이 드니 정말 공감이 간다고 했다. 애써 표현하려 쥐어짜는 것보다 ‘무덤덤하고 무심하게 소리하는 게 낫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절제의 미학이다.

그는 1970년, 21세 때 상경했다. 그리고 김소희 선생 문하로 들어갔다. 김 선생의 판소리는 지금껏 그가 했던 소리와는 다른 세계였다. 정확한 음계와 박자, 무대 연기 등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 뒤에는 박귀희(1921~1993년) 선생에게서 가야금 병창을 전수 받았다. 9세 때부터 예인 가문이었던 외갓집 공연단의 아역으로 불려 다니며 ‘애기명창’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스무 살을 넘긴 후였다.

김소희·박귀희 두 거장 스승으로 모셔

/ 박철중 기자
어릴 적부터 재주가 남다른 그였지만 누구보다 ‘스승복’이 많았다. 당대 국악계의 큰 별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김소희ㆍ박귀희 선생 모두로부터 수제자로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김 선생은 세심한 어머니 같고, 박 선생은 품 넓은 아버지 같았다고 회고한다. 박 선생은 프로기사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운당여관’을 운영했었다. 나중에 박 선생은 여관을 팔아 국악예고 운영에 보탤 만큼 국악 사랑은 유달랐다.

또 그가 여성으로 드물게 힘있는 창법을 구사하는 것은 외당숙인 ‘동편제’의 대가 강도근 선생의 가르침 덕이다.

그렇다면 스승들의 소리를 넘어섰습니까? 그의 대답은 “그러고는 싶지만…”이다. 그는 우선 요즘 들어 ‘귀명창’을 찾아보기 힘든 데 그 이유를 든다. 소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스승들의 전성기 때에는 판소리가 당시 대중문화의 꽃이었던 까닭에 소리를 알아주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국악 전성기 때의 명창인 스승들을 어떻게 넘어섰다고 할 수 있냐는 게 그의 고백이다.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김명곤 전 국립극장장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소리꾼으로도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라며 “적어도 국악 푸대접은 안 하겠죠”라고 웃어 넘긴다.

화제를 돌려 소리꾼은 왜 호남 일색이냐고 따지듯 묻자 그는 “과거에는 안 그랬는데…”하며 자신도 의문을 표시한 뒤, 진주 권번과 대구 권번이 번창할 땐 특히 경상도에서 판소리 후원자들이 굉장히 많았다며 언제부턴가 경상도 판소리가 퇴색해 아쉽다고 했다. 남편 역시 경상도 진주 출신의 아마추어 국악인인데 결혼 전에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모두 국악을 배웠지만 지금은 함께 살고 있는 딸 최영훈씨만 거문고 산조를 하며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는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인터뷰 중에도 그에게선 틈틈이 가락이 흘러나온다. 마치 ‘소리 귀신’이 붙은 사람 같다. 사진 찍을 때도 포즈 잡고 춘향가 한 자락, 사뿐 사뿐 걸으면서도 심청가 한 자락… 그의 흥과 소리는 무대가 따로 없다.

그는 “지금은 명창이다 뭐다 해 다들 추켜세우지만, 어릴 적엔 잔칫집에나 불려 다니는 궁상맞고 측은한 직업이라고 여겨 도망가고 싶었다”며 “그것이 바로 소리꾼 인생”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50년 소리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칠 때면 홀로 북채를 잡고 장단을 치며 소리를 한단다. 세월을 녹여 창을 하는 것이다.

향후 계획을 묻자 그는 “이제는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돈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리의 깊은 맛을 전하는 춘향, 심청이고 싶다”고 말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