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WBC 대회 4게임 연속 홈런으로 4강 견인, 세계 야국계 스타로"병상의 어머니께 영광" 소문난 효자… 메이저리그 진출 '예약'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하겠다며 방망이를 들고 다닐 때만 해도 귀엽게만 보였죠. 근데 이렇게 큰 인물이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이승엽(30ㆍ요미우리 자이언츠)을 세상에서 맨 처음 만난 강말자씨의 말이다. 대구에 사는 강씨는 1976년 8월18일 이승엽의 탯줄을 잘라준 산파였다.

2003년 이승엽이 56홈런으로 한 시즌 아시아 최다홈런 기록을 세웠을 때 강씨는 “내가 동네 아이 여럿의 산파역을 맡았고, 다들 잘 자라 출세했지만 그 중에서도 승엽이는 최고”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승엽은 99년 54홈런을 치며 일약 ‘국민 타자’로 떠올랐다. 2003년엔 아시아 신기록을 작성하며 ‘아시아 홈런왕’으로 발돋움했다. 2006년 3월 사상 첫 야구 국가대항전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세계 홈런왕’으로 비상했다.

"어머니 완쾌가 소원"

“이 홈런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이승엽은 2003년 10월2일 대구 롯데전에서 56호 홈런을 터뜨린 뒤 인터뷰 첫 머리에 이렇게 말했다. 이승엽은 이춘광(63)씨와 김미자(57)씨 사이에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승엽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까닭에 효심이 남다르다. 2002년 1월 신혼여행 중 어머니 김씨가 뇌종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중도에 귀국했다.

한때 머리를 기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쓰러진 뒤로 짧게 깎았다. 어머니가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는 게 이유다. 한국에서 뛸 때는 주말이면 늘 어머니와 함께 했다. 틈나는 대로 집에 들러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

지난해 이승엽은 ‘미광(美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언더셔츠와 모자를 사용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해 5월7일 이승엽은 투병 중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엄마! 저 막내예요.” ‘승엽이구나’하는 힘찬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는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었다. “응…. 그래….”

이승엽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막내 아들 장가도 보냈고, 이제는 편안하게 아무 걱정 없이 아픈 데 없이 사시는 게 소원이었는데…”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김씨는 뇌종양 판정 직후 곧바로 수술을 받았고, 꾸준히 치료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억력이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승엽은 그런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 1월28~29일 이승엽은 대구 집에 있었다. 95년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설을 보냈다. 집에 머문 이틀 동안 이승엽은 매 끼니 어머니에게 직접 음식을 먹여드렸다. 떡두꺼비 같은 손자(은혁)도 안겨드렸다.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의 진정한 스타

지난달 1일 일본 미야자키현 종합운동공원 내 선마린 스타디움에선 요미우리의 2006년 스프링캠프가 시작됐다. 지난해 리그 5위로 추락한 요미우리는 명가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하루 7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훈련을 강행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훈련은 오후 5시가 돼야 끝이 난다. 점심시간도 딱 20분밖에 안 된다. 지바 롯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이승엽이 엄격하고 빈틈 없이 진행되는 요미우리 스프링캠프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훈련 도중 이승엽은 한국 취재진을 보면 하소연했다. “아주 사람을 잡네요. 잡아.” 그렇지만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에 온 한국 취재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늘 하루 훈련을 마치고 나면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했고, 성실하게 답변했다.

이승엽은 지난달 5일 훈련이 끝난 뒤 기자와 마주치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소주 한 잔도 못 해서. 다음에 오시면 맛있는 안주에 소주라도 한 잔 하시죠.”

이승엽은 친절하고 겸손하다. 훈련을 마치고 나면 수많은 일본 팬들이 야구공, 티셔츠, 수첩을 이승엽 앞에 내민다.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이승엽은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사인을 해준다. 어린이 팬에게는 기념사진 촬영도 허락한다.

이승엽은 늘 친절과 겸손의 덕을 본다. 물론 실력이 가장 큰 이유지만 국내에서 뛸 때 골든글러브를 7년 연속(97~2003년) 수상할 수 있었던 데는 친절과 겸손도 한몫을 했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친절하고 겸손한 선수에게 표를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 지난해 11월12일 이승엽 선수가 아버지 이광춘씨와 함께 도쿄돔에서 열린 코나미컵 대회 삼성과 대만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박스사진 · 연합뉴스

일본 무대 정복 뒤 메이저리그로

이승엽은 야구를 안 했다면 평범한 회사원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원래 야구부가 없는 대구 동덕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우연히 학교대표로 뽑혀 대구지역 공 던지기 대회에 나갔다. 당시 이승엽은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멀리 던졌다.

마침 이승엽을 유심히 지켜보던 중앙초등학교 야구 교사가 그를 전학시켜 야구선수를 만들었다. 이승엽이 멀리 던지기 대회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야구선수가 됐을까.

이렇게 해서 야구를 시작한 이승엽은 경북고 때까지만 해도 전도유망한 왼손투수였다. 삼성에 스카우트될 때도 타자가 아닌 투수였다. 그러나 입단 첫해 스프링캠프 기간 어깨에 이상이 발견되면서 글러브를 놓고 방망이를 들었다.

천부적인 소질과 피눈물 나는 노력은 입단 2년 만에 이승엽을 최고 타자로 만들었다.

이승엽은 97년 32홈런으로 최연소(만 21세) 홈런왕에 올랐다. 이어 99년엔 54홈런을 치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50홈런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리고 2003년엔 56홈런으로 한 시즌 아시아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한국에선 적수가 없었던 이승엽은 2004년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진출했다. 일본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첫해 부진했지만 지난해 30홈런 82타점을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바 롯데는 팀 내 최다 홈런과 타점을 기록한 이승엽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승엽은 그러나 지바 롯데의 파격적인 제안을 뿌리치고 ‘일본 야구의 심장’ 요미우리로 옮겼다. 조건만 보면 지바 롯데보다 못하다.

그는 “지바 롯데에 정도 들었고, 좋은 성적을 냈던 만큼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더 큰 꿈을 이루려면 요미우리에서 뛰어야 할 것 같아 이적을 결심했다. 올 시즌이 끝나면 오래 전부터 꿈꿨던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3월 WBC에 출전했다. WBC 한국대표팀에 합류하기로 했을 때만 해도 걱정스런 시선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새로운 팀으로 이적한 데다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까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미우리에서 생활한 것이 20일도 되지 않아 과연 그렇게 단시일 내에 하라 다쓰노리(48) 감독의 눈 도장을 확실하게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태극 유니폼을 입기로 했고 WBC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아시아 라운드 최종경기에서 일본전에서 야쿠르트의 이시이 히로토시로부터 역전 결승 홈런을 빼앗았고, 8강 리그 미국전에서는 플로리다의 돈트웰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

이시이는 지난해 37세이브를 올린 특급 마무리이고, 윌리스는 22승으로 내셔널리그 다승왕에 오른 최고의 선발투수다. 더구나 둘 모두 이승엽이 약점을 보였던 왼손투수다.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최정상 투수들을 상대로 홈런포를 뿜어내자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이승엽을 주목하고 있다. 일부에선 “올 시즌이 끝나면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떼놓은 당상”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정작 이승엽은 담담하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홈런을 칠 수 있었습니다. WBC가 끝나고 소속팀으로 돌아간 뒤로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거든요.”

여전히 겸손한 ‘라이언 킹’이다.


최경호 기자 squeeze@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