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실 선 화랑 대표 - "화랑은 예술가와 세상을 잇는 공간"'선 미술상' 제정, 젊은 작가 발굴·지원, 미술품 경매 붐 '우리끼리 값 올리기' 지나쳐

‘선 화랑(www.sungallery.co.kr)’의 김창실(71) 대표.

미술의 거리, 인사동을 내년이면 꼬박 30년째 지키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산 증인이다. 우리 미술계의 숨은 이야기를 들을 겸 21일 선 화랑을 찾았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화랑 경영자답게 차림새며 표정이 회화적이다. 먼저 김 대표가 소개하는 자신의 30년 화랑 인생 서막은 이랬다.

“화랑 문을 연 직후였어요. 천경자 그림은 한 점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분의 화실을 찾아갔어요. 일언지하에 내줄 작품이 없다고 거절하더군요. 그래도 재차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니, 그제서야 ‘정 그렇다면 한 점 있긴 한데…’하며 내놓은 것이 자신의 작은 딸을 그린 소녀상이었어요. 그 작품을 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잠까지 설쳤죠.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천 선생이 화랑을 찾아왔어요. 흐트러진 머리에 창백한 표정으로 전날 사갔던 선물꾸러미까지 한 손에 쥔 채. ‘미안하지만 어제 가져가신 내 작품을 다시 돌려주셔야겠어요. 간밤에 그 작품 생각에 한잠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 그림이 없으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말해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았어요. 서운한 마음 탓이었겠죠. 하지만 한편으로 이게 바로 작품을 분신처럼 여기는 예술가의 모습이구나 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죠.”

화랑이란 곳이 단지 작품을 물건 사고팔 듯 하는 곳이 아닌, 예술가들의 그 유별난 영혼과 이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공명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일화 한 토막이다. 어쩌면 이러한 경험이 그를 이 세계에서 ‘경영인 김창실’ 보다 ‘문화인 김창실’로 뿌리내리게 한 계기인지도 모른다.

최근 한 미술평론지의 조사에 따르면, 김 대표는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몇 손가락에 꼽는 인사로 평가된다. 하여 그는 작가와 미술시장 사이의 성공한 매개자인 셈이다.

주부 약사에서 화랑 대표로

김 대표가 화랑을 연 것은 1977년이다. 그것도 약국을 경영하던 주부로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서다. 선 화랑 건물에 세들어 있던 ‘고옥당’이란 고미술점이 그만두게 돼 ‘자의반 타의반’ 시작한 셈이다.

당시만 해도 작품 전시는 대개 정부 공관이나 다방에서 많이 이뤄질 만큼 화랑이 드물었다. 그동안 약국하면서 돈 모이는 족족 사 모았던 작품들을 걸고 문을 연 것이 지금의 선 화랑이다.

이후 그는 전시 이외에도 79년부터 미술전문지 ‘선 미술’을 13년간 발행하며 미술계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또 84년에는 ‘선미술상’을 만들어 지금까지 젊고 유망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고 있다. 이미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 오용길, 손수광, 황창배, 이두식, 김영원, 김병종, 원인종, 서도호 등이 이 상의 수상자들이다.

김 대표의 영향력은 일찍이 샤갈과 부르델, 매그넘 등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현대미술의 세계적 거장들의 아우라(원작 특유의 분위기)를 국내에 온전히 소개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력들은 그를 한국화랑협회 회장(1985년~87년, 1991년~94년)을 두 차례나 맡게 했고, 20세기 한국 미술계의 여장부 노릇을 하게 했다.

천경자 화백과 인연이 각별했다고 들은 터라 그가 화랑협회 회장으로 있을 당시 미술계의 일대 사건이었던 ‘천경자 미인도 가짜 논쟁’에 대해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는 그 사건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일단 선을 긋는다. 다만 논란의 발단은 자존심 강한 천 선생이 자신의 미인도 사본(프린트화)이 현대그룹 사옥 지하 사우나에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라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진위야 어떻든 작가 자신이 자식 같은 작품을 가짜라고 하는 데야 더 이상 따질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더 이상 말을 삼간다.

미술품 진위와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화제가 자연히 요즘 미술계에서 한창 화제인 경매 붐으로 이어졌다.

우선 김 대표는 “화랑하는 사람이 경매회사를 차리는 것에는 반대한다”라고 분지른다.

미술품 평가에 친소의 문제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서울옥션, K옥션 등 미술품 경매의 경쟁체제가 구축되면서 한국의 미술품 거래가 예전과 판도가 많이 달라진 것에 대한 그의 반응은 우려감이 먼저 앞선다.

한국 미술 세계에 알리는 작업 시급

그는 요즘 미술품 경매에서 누구 작품이 몇 억원, 몇 십 억원 호가하는 것에 대해 한 마디했다. 경매 붐으로 미술품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진 건 좋은데, 너무 ‘우리끼리 값 올리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아직까지 세계적 미술품 경매에서 우리 작가의 작품이 제값을 받고 팔려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팔린다 해도 구매자를 추적해 보면 한국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국내 미술시장은 우물 안 개구리인데 비해 경매 사이트는 오로지 자본의 논리가 횡행한다고 우려한다. 즉 화랑은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키우는 역할을 하지만 미술품 경매 회사는 오로지 작품 거래의 과실만 따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해서 김 대표는 우리 미술계의 당면 숙제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이 급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끼리만 이중섭, 박수근 하면 뭐냐라는 것이다.

한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세계 순회 전시를 한다든지, 한국 미술이 이제는 ‘우물 안’ 풍토를 깨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미술 한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정부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도대체 미술품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서운해 한다.

또한 인사동 터줏대감으로서 그는 요즘 인사동 거리를 나서면 속이 이만저만 상하지 않는다. 지금 인사동은 우리 전통 문화의 거리가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 싸구려 잡탕 문화의 거리라는 것. 정체성이 없는 거리가 됐다는 비판이다.

/ 김지곤 기자

노점상을 양성하고 거리의 표정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다 좋은데, 우리 공예품, 우리 혼이 담긴 것들을 내놓고 팔아야 하지 않는냐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서울시의 인사동 전통문화 거리 가꾸기 정책은 실패”라고 단정한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국이 나서 우리의 컨텐츠가 담긴 거리로 꾸밀 것을 주문했다.

최근 화랑들이 사간동, 삼청동 쪽으로 옮겨가는 가장 큰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는 설명이다. 싸구려 잡탕 문화 거리를 피해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걸 보면 문화재청이 아니라 ‘문화정화청’이 필요한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했다.

김 대표의 고향은 황해도 황주. 실향민인 셈이다. 아버지는 동경유학 후에 고향서 과수원서 1만주를 키우며 문화사업을 벌였던 개화 사상가였다.

집 앞마당 넓은 뜰에 창고 겸 극장을 지어놓고 심청전 등을 공연하고 채플린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등 집안뿐만 아니라 동네 전체가 문화적 흥이 넘쳤다고 전한다. 어릴 적 이런 문화적 세례를 받았으니 김 대표가 미술과 인연을 맺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유화 한 점 얻은 계기로 화랑이 평생 업으로

그는 일찍이 서울로 유학 와 이화여고, 이화여대(약학과)를 나와 공무원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한때 부산 동대신동에서 약국도 경영하며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가 그림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계기는 1960년대 초 도상봉의 유명한 유화 ‘라일락꽃’ 한 점을 손에 넣게 되면서이다.

회고록 ‘달도 따고 해도 따리라(1995년 김영사)’에서 그는 “학교 후배이자 도 선생의 딸인 문희씨의 소개로 그림을 얻고, 어찌나 마음이 그림 속으로 빨려들던지 밤낮으로 정신없이 바라보고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자신의 심미안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평생의 업이 됐다.

관세사 일을 하고 있는 남편과의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두 아들은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고, 피아노를 전공한 외동딸이 어머니의 업을 잇고 있다.

작년에 사간동에 개관한 ‘선 컨템포러리’의 이명진 대표가 김창실 대표의 딸이다. 이씨는 젊은 작가들 중심으로 재미있는 현대미술 전시로 어머니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에 김 대표는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것이 남은 욕심”이라고 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