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는 한국 연극 뉴트렌드의 주역

연출 느낌이 없는 연출… 배우 중심의 연극… 세트마저 배우들의 연기로 창조해내는 무대… 시장통 아주머니, 술 취한 동네 아저씨, 자장면집 배달원,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는 이들의 평범한 언어를 통해 현실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는 풍자… 아웃사이더의 시선…

1999년 공전의 히트작 ‘청춘예찬’을 선보인 후 한국 연극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작가 겸 연출가 박근형(43ㆍ극단 골목길 대표)의 연극에 대한 평가들이다. 일명 ‘박근형표 연극’이다.

그가 요즘은 ‘일주일(6월4일까지 공연, 문의 02-743-2274)’이란 작품으로, 중견 배우 김갑수(49)가 서울 대학로에 문을 연 ‘배우세상’ 소극장의 첫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배우세상’ 소극장은 100석 규모로 각계의 인사 100명이 자신의 이름을 가진 좌석을 구입하는 식의 후원금으로 시작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연극 ‘일주일’은 특수강간치사 사건 용의자로 몰려 구속된 4명의 시골 청년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주일’간의 진실게임이 줄거리다.

그는 여기서 진실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단지 추측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니냐고 되묻는다. 리얼리티(사실)는 안중에 없고 추측과 선입견만 난무하는 세상에 대한 조용한 고발이다.

식목일이자 청명(淸明)인 5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아무래도 무척 낯을 가리는 성격 같다.

초면인 사람과 앉아있기가 서먹한지 연신 담배를 피워 문다. 굵직한 연극상을 휩쓸며 ‘한국을 이끌어 갈 연출가 1위’로 꼽힐 만큼 각광받는 그이지만 말투며 차림새가 꾸밈 없이 담백하다. 본인의 표현대로 ‘그냥 동네 아저씨’다.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프로 극단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처음 만난 배우가 김갑수”라는 일화로 자신의 연극 인생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1981년 겨울, 파리한 인상의 고3생 박근형은 서울 장충동에 있던 극단 ‘연극촌’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배우가 되겠다는 막연한 열망 하나로 우기다시피 극단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이 대책없는 고등학생이 처음 대면한 극단 배우가 바로 지금은 스타가 된 김갑수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배우 생활을 접었다. ‘배우로 도저히 성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는 “배우를 우습게 알았다가 큰 코 다친 셈”이라며 웃는다. 그가 생긴 게 별로이고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가 체험한 배우는 평생을 바쳐 자신의 몸과 소리를 가다듬고 다스리는 일종의 장인이다. 연출가인 그조차 주눅들게 한 ‘대단한 사람’이 바로 배우더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러한 배우 예찬론은 연출, 조명, 세트보다 늘 배우들 스스로가 무대를 끌고 가게 하는 ‘박근형표 연극’으로 이어진다.

'박근형표 연극'의 힘

박근형은 고졸이다. ‘박근형표 연극’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고졸이라는 학력에서 나온다.

그는 이론파가 아닌 철저한 현장파다. 정규 연극 교육이나 연출 강의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소위 제도권 이론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학력 콤플렉스가 그만의 자유로운 스타일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학교 밖에도 스승은 있는 법.

그는 “85년 겨울, 연출가 기국서를 만나고부터 마침내 내 연극 인생의 진짜 사춘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기국서한테서 연극에 대해 질문다운 질문을 하는 법을 배웠다는 고백이다. 86년 그의 데뷔작 ‘침묵의 감시’도 기국서가 제작을 맡았을 정도로 그에게 진 빚이 크다.

또한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연극에 입문한 덕에 40대 초반임에도 20년이 넘는 연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쉬지않고 작품을 했다. 1년에 서너 편은 꼭 무대에 올렸다. 지금까지 그가 연출한 연극은 30여 편, 직접 쓴 작품만도 10편이나 된다.

이런 다작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우선 고졸인 그가 세상을 배워나가기 위해 터득한 게릴라식 공부에 있다.

그는 신문, 잡지, 만화, 소설, 철학, 역사…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는 지금도 무언가를 읽을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일종의 자기 방어적인 이런 ‘잡식성 독서’는 그만의 독특한 언어의 샘이자 작품의 창고인 셈이다.

어릴 적 꿈이 사건 현장을 탐사하는 신문사 사회부 기자였다는 그는 특히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 신문만큼 자신의 연극에 좋은 소재가 되는 리얼리티(사실)가 가득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신문에서 한자 표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뜻을 잘 모르는 한자어를 안 쓰게 되고 점차 단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말이 빈약해지니깐 생각도 빈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신은 신문을 읽으며 한자를 익혔다고 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는 걸 좋아한다. 종로구 필운동 집에서 대학로로 나올 때는 대개 골목을 구비구비 돌아서 걸어온다. 길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이 다 작품의 소재다. 지방 공연을 가도 꼭 동네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닌다. 그만큼 그는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그는 예술가도 현실 정치에 예민해야 한다는 주의다. 예술가입네 하며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고 한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투표에 기권한 적이 없을 만큼 투표 참여주의자이다.

세상 돌아가는 데 민감하지 않고서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난 떨치지 못하는 '연극쟁이'

그는 유명해졌지만 가난한 가장이다. 그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곳은 필운동의 낡은 아파트. 그것도 월세살이다. 하기사 이 집도 지난해까지 살았던 좁은 임대아파트에 비하면 발전한 셈이다.

“근데 부인은 연극하시는 것 지지하나요?” “그럼요”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뒤 빙그레 웃었다. 세상 사는 셈법이 다르다.

요즘은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들 그러지만 여전히 ‘배고픈’ 이 세계 사람들은 돈에 관해서는 말 못할 사연도 많다. 누가 가난을 벗 삼고 싶을까마는 그걸 겁내면 ‘연극쟁이’를 못한다는 게 이곳 사회의 통념이다.

“도대체 연극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그는 “연극은 무슨 사명감보다는 우선 재미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갖고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고 또 연극에 관객들이 웃고 흐느낄 땐 희열 같은 걸 느껴요. 특히 첫 공연의 막이 오를 때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두근거림, 이런 것들을 맛 본 사람은 여기를 떠나기 힘들다”고 했다.

가난이고 뭐고 예술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연극쟁이’들이 작품하려고 집 팔고, 방 빼는 경우는 다반사라는 것.

그 또한 작품한다고 사고 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번은 연출한 작품이 흥행에 완전 실패하는 바람에 인쇄비, 대관료 등 빚 독촉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한 그는 나중에 돈 생기면 되찾을 요량으로 장롱 속 어머니 패물을 ‘잠깐’ 빌렸다.

그는 전당포에 가져갈 금붙이를 고르다 패물함 속에 휴지 뭉치가 있어 ‘웬 휴지’하며 생각없이 버렸다. 근데 이게 어머니 반지에서 떨어진 다이아몬드를 싼 휴지 뭉치였다는 것.

그는 이 이야기를 하다 자신도 한심한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때 전당포에 맡긴 금붙이는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세상사는 방식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웃으면서도 웃고 울면서도 웃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하는 그의 작품들이 그의 삶과 닮아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비평의 부재가 연극판 더 위축시켜

그는 지금 연극판에서 아쉬운 것은 ‘비평의 부재’라고 꼽는다. 그는 “신문들이 관심을 가지고 비평을 해줘야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길도 열리는 것 아니냐”며 “예전에 비하면 연극 기사는 거의 실종 상태고 갈수록 대중문화로만 도배하다시피 한 신문 문화면을 보면 맥이 빠진다”고 했다.

다행히 재정적인 면에서는 정부도 연극을 ‘기초 예술’로 인식하고 지원을 늘려가고 있다고 한다. 또 연극 배우 출신들이 영화나 방송에서 성가를 높이다 보니 러브콜도 잦다.

그는 “예전에는 연극하다가 영화나 방송으로 나가면 외도로 치부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젠 그런 소리 안 한다”고 했다. 조만간 ‘박근형표 영화’도 나올 법하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