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 작품세계 '민경갑 스타일' 구축, 40여 년 동안 '산' 그림에 천착한 화단 거목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한낱 구호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 미술계의 거장 유산(酉山) 민경갑 화백을 보면, 그 뜻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흔도 훌쩍 넘은 민 화백(73)의 그림 인생은 여전히 한창 ‘현재 진행형’이다.

“일흔 셋, 젊죠 뭐. 옛날엔 육십만 넘으면 정리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칠순 잔치도 안 했어요. 무엇을 해놓은 게 있다고. 이제 겨우 작품의 결점을 보기 시작했는데 고쳐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 화백은 ‘이제 시작’이라고 표현했지만, 국내 화단에선 ‘민경갑 스타일’이란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한다. 그럼에도 창작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은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민 화백은 그림 얘기가 나오자 ‘다작주의론’부터 말을 풀어나간다. “둔재들이 크는 거예요. 꾸준히 노력해야 조금씩 깨우칠 수 있어요. 운동 선수가 시합을 많이 해야 실력이 늘듯이 화가도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 좋은 작품이 나와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죠.”

그는 인터뷰 내내 한결같이 ‘노력’을 강조했다. 지난 5년 동안 쓴 화선지의 분량만 6,000여 장에 달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의 일상은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여느 샐러리맨과 출ㆍ퇴근 시간도 같다. 9시면 작업실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한다. 점심시간은 12시. 심지어 토요일도 근무하는 주 6일제를 꼬박꼬박 지켜가고 있다. 누가 감독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철저히 일하는 시간을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유를 물었다. “리듬이 깨지면 오래 못 가거든요.” 그의 답은 단순 명료했다.

한국화 뛰어넘은 원색의 색감

민 화백만큼이나 그의 작품도 ‘생동 기운’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민 화백의 작품은 그림에 문외한인 기자가 보기에도 남달랐다. 한국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단번에 깨진다. 그의 최근 작품에선 청ㆍ적ㆍ황 원색의 색감이 눈부시게 발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유화로 그린 것처럼 또렷한 색감이 먼저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면 화선지 위로 번져나간 운필이 기묘하다.

민 화백은 “한국화로서는 낯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도 다 합치면 (수묵화의 기본인) 검은 색이 되는 것”이라며 서양화와 달리 재료와 기법면에서 제약이 많은 한국화의 표현을 뛰어넘는다.

사실 민 화백의 작품 세계는 처음 붓을 잡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들었다.

서울대 미대 3학년 때인 56년에 국전에 특선한 민 화백은 초기 한국화에 추상성을 가미한 반추상 그림을 그렸다. 60년대 중반에는 추상의 경향이 더 짙어졌다. 그러다 60년대 후반부터 다시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구상으로 돌아서더니, 80년대의 어두운 수묵화 단계를 넘어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원색적인 색채 이미지를 찾아냈다.

민 화백은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면서도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는다. 우직한 덩어리의 산을 그린다. 단순해 보이지만, 기실 그 덩어리는 먹이 모래같이 잘디 잔 점으로 번지면서 퍼져나간 수많은 점들의 합체이다.

그림은 끊임없는 창작의 산물이라고 믿는 그가 “종이 위에 색을 바르지 않고, 치는” 새로운 기법을 찾아낸 것은 우연만은 아닐 터. 민 화백은 “화선지를 찢어도 보고, 불태워도 보며” 종이와 물감이 일체화하는 경지를 찾아 헤맸다고 했다. “단순해보이지만 얇게 스며들도록 터치하는 것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토록 대단한 실험정신을 민 화백이 평생 변하지 않고 고수해온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바로 그림의 대상. 40여 년 동안 오로지 산만 그렸다. “그냥 산이 좋아서죠.” 그는 당연한 듯 말했다.

“산에는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어요.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정세가 급변해도 늘 한결같이 그곳에 있지요. 전 그 산의 깊이를 사랑합니다.” ‘산’ 예찬론을 펴는 그의 목소리에 기운이 넘친다. 흡사 산과 연애하는 산사람 같아 보인다.

산은 알수록 더 경이로운 존재라고 한다. 사실 학창시절, 근대 6대 화가로 꼽히는 심산 노수현 선생으로부터 “산을 타라”는 가르침을 받았을 땐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림을 그리는데 왜 산에 올라가야 할까. “산에 올라가면, 오히려 산이 보이지 않잖아요.”

궁금증이 풀린 건, 비로소 산의 맥을 느끼게 되면서였다. “미대생들이 해부학을 배워야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도 세밀하게 포착해낼 수 있는 것처럼, 산의 맥을 알아야 제대로 산을 그려낼 수 있는 이치였어요.”

일생 산과 그림 외길 "대통령 안 부러워"

 ◆ 주요 약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57)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 참가(69)
현대화랑 초대 개인전(79)
서울올림픽 세계현대미술제 운영위원 및 초대 출품(88)
서울국제현대미술제 초대전(94)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96)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정년퇴임(99)
마니프5!99 서울국제아트페어 초대작가상 수상
서울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02)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초대 개인전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04)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한일현대미전 '참 우정의 형태전'(05)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현)

그는 일생 산과 그림 외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단체나 관직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안 부럽죠.” 그는 잘라 말했다.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이 독자적 작품 세계를 일군 바탕이었으리라.

“관직에 나갔던 친구들은 20대에는 번쩍번쩍 빛났지만 70에 이른 지금은 그렇지 못하죠.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세계가 있는 제가 부럽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해요.”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 좋고 나쁜 건 항상 공존한단다.

“화가의 삶이 좋긴 한데, 또 많이 괴로워요. 매일 새로운 것 찾아낸다는 게 고통이죠. 송곳으로 쑤셔대는 것 같지요.”

지난 시절, 가난한 직업 화가로 많은 식솔을 먹여 살려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은 창작의 고통에 비할 바도 아니다. “대학 재학 중엔 재료가 없어 단 11점의 그림밖에” 못 그렸지만, 그래도 마음은 늘 넉넉했다.

그런 민 화백이 요즘 한국화가 처한 현실을 보면서 서글픔을 토로한다. “우리 ‘얼’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것이 바로 거기에 있잖아요. 일본 사람들은 일본화를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온통 서구의 것만 추앙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젊은이들의 ‘빨리빨리’ 병에 대해서도 민 화백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간단해 보이지만 선 하나 제대로 긋는 법을 터득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려요. 그런 과정을 젊은이들이 참아내지 못해요.”

현재 운니동 작업실에서만 30년. 혹자는 우직하게 일만 하는 그의 삶을 갑갑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를 좇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단번에 민 화백의 작품 세계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 화백은 여유롭기만 하다.

“역사는 냉혹해요. 당대에 이름 낼 필요 없지요. 평생 연구하다 떠나면 그만이지요.”

대신, 작품 욕심만은 가히 으뜸이다. 10월 12~31일 예술원전, 10월 17~29일 마니프전(예술의 전당), 11월 1~14일 한ㆍ일현대미술전(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2월 1일~2007년 1월 12일 한·중전(금호미술관) 등등.

전시 일정이 줄줄이 밀려 있다며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작업에 들어가는 민 화백. 그의 붓끝에선, 참으로 산을 닮은 묵직한 깊이가 진하게 배어나왔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