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종욱 전 WHO 총장 부인 가부라키 여사 '2006 파라다이스상' 받아

가부라키 여사가 13일 서울 중구 소피텔 앰베서더호텔에서 열린 파라다이스상 수상자 간담회에서 이 사무총장과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전 세 들어 살던 제네바의 집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집을 잃은 것은 남편이 나를 떠나간 순간입니다. 그는 나에게 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고(故) 이종욱 WHO(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의 부인인 일본인 가부라키 레이코(鏑木玲子ㆍ61) 여사가 한국을 찾았다. 파라다이스 그룹이 수여하는 ‘2006 파라다이스상’의 특별공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남편을 대신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3일 내한한 가부라키 여사는 “기쁘다. 너무나 좋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남편의 부재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인터뷰 도중 수시로 눈물을 글썽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가부라키 여사는 1971년 한센병 환자들의 간호를 위해 경기도 안성시 나자로 마을을 찾았다가 이듬해 역시 봉사활동을 나온 의대생 이종욱을 만나 79년 결혼했다.

“처음 봤을 때는 ‘참 잘 생긴 한국 남자다’라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어려보였는데 환자들에게 아주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아 ‘진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수녀가 되려던 마음을 바꾼 순간이었다. 평생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 단 한 번도 남편은 그러한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다고 여사는 말했다.

이 전 총장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WHO에 몸담으며 지구촌의 질병 예방과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보살폈다.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 질병관리 국장, 본부 예방백신 사업국장, 세계아동백신운동 사무국장, 결핵관리 국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백신 관련 업무를 하는 동안 소아마비 발병률을 세계 인구 1만 명 당 1명 이하로 낮춰 세계 의료계로부터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로 불렸다.

이렇듯 가난한 이들의 건강을 위해 질병과의 싸움에 온몸을 내던진 이 전 총장을 내조했던 가부라키 여사도 자연스레 봉사의 삶을 늘 동경했다. 5년 전부터는 페루의 봉사단체인 ‘소시오스 엔 살루(Socios En Salud)’에서 결핵환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공을 살려 영어 교사로 봉사를 펼쳤으나, 가난에 굶주린 아이들이 영어 수업을 받기 위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민에 빠졌을 때 이 전 총장의 조언을 받아 페루의 가난한 여인들에게 뜨개질과 수놓는 법을 가르쳤다.

이들이 만든 제품은 미국 하버드 대학과 연계해서 해외로 수출됐다. 첫해 1인당 연 수입은 10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700달러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이 수입은 아이들 학비와 양육에 보탬이 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가부라키 여사는 말했다. 이번에 받은 상금 4,000만원도 전액 페루 빈민들을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가부라키 여사는 14일 소피텔앰버서더 호텔에서 파라다이스 시상식에 참석한 뒤, 15일 이 전 총장의 유해가 안치된 대전국립현충원을 찾고 16일 페루로 돌아갔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