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사랑한 포세이돈의 왕비 파시파, 처음 본 외간남자에게 반해 트로이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던 헬레나…. 그리스 신화 속 ‘미친 사랑’들은 모두 아프로디테의 장난이래. 나도 아프로디테의 장난에 걸려든 것 같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탤런트 김희애(40)가 2일 첫 방송을 시작한 SBS 월화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도발적인 사랑을 하는 이유다. 그가 맡은 역은 어려운 시절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단짝 친구의 남편과 사랑에 빠진 여자 ‘화영’. 드라마마다 불륜이 없으면 인기 순위에 명함도 못내미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이쯤되면 말 그대로 ‘미친 사랑’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흥행 보증수표 김수현 작가와 정을영 PD가 ‘환상 콤비’를 이뤄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 <완전한 사랑>, <눈꽃> 등을 통해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김희애는 새 드라마에서‘미친 사랑’으로 180도 다른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그 때문일까. 김희애는 지난 3월 26일 열린 <내 남자의 여자> 제작발표회장에서부터 파격을 연출했다. 예의 그 단정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화려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와 섹시미를 한껏 과시한 것. 등이 깊게 파인 은빛 드레스에 오른 팔에 멋스럽게 걸친 금색 팔찌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김희애가 연기하는 화영은 ‘스칼렛’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화려하고 당당한 여자다. 재미동포 남편을 만나 부족함 없는 결혼생활을 누렸지만 사업 실패 후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자살하는 바람에 혼자가 됐다.

그렇게 홀홀단신 귀국한 화영을 거두어 준 이는 다름아닌 단짝 여고동창생 지수(배종옥). 화영은 지수의 남편 준표(김상중)와 운명적인 사랑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는 결코 사랑을 겁내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예고편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격정적인 키스신만 보더라도 아연실색케 할 정도. 그만큼 김희애는 자신있고 거침이 없다.

“요즘 센 거 많이 나오던데 이 정도 갖고 뭘 그러세요. 하다보니 자연스러워지더라고요(웃음). 촬영장에서는 유호프로덕션(성인비디오전문 제작업체) 작품이 아니냐는 농담도 나왔죠. 저도 처음엔 민망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촬영한 화면에 민망한 제 모습을 보니 더 부끄럽더라고요. 그래서 나를 버리고 철저히 화영에게 몰입하기로 했죠.”

하지만 당당한 ‘스칼렛’도 쌀쌀한 날씨에는 맥을 못추는가 보다. 김희애는“노출 많은 옷을 입고 나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며 엄살을 떤다. 그래도 베드신 촬영이, 실컷 두들겨 맞는 장면을 촬영할 때 보다야 훨씬 쉬웠다며 그동안의 에피소드를 살짝 털어놓는다.

극 중 불륜을 저지르는 역할을 맡은 만큼 김희애는 드라마에서 유독 많이 맞는다. 첫 회부터 불륜 사실이 들통나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에게 호되게 머리채를 쥐어 뜯기는가 하면, 4회 분에는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지수가 프라이팬으로 화영의 머리를 거세게 내려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은수 언니에게 속옷 차림으로 머리를 쥐어 뜯기는 장면은 연기를 하면서도 제가 진짜 잘못을 한 것처럼 수치심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맞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죠.” 하지만 ‘맞은 사람은 발 쭉 뻗고 잔다’는 말처럼, 맞은 김희애는 촬영 후 밥을 잘 먹고 와인 마시며 단잠을 잤다는데 때린 하유미는 촬영 후 아무 것도 못먹었다고 한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빠져 뭇매를 맞아야 하는 화영의 역할을 선뜻 맡기란 쉽지는 않았을 법한데…. 그런데 김희애의 대답은 질문을 무색케 한다. “화영처럼 나쁜 여자 역할을 맡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역시 프로답다.

“주변에서 그동안 걱정을 많이 했어요. 너무 반듯한 이미지로만 고정돼 있다는 거였죠. 그래서 저는 기존의 이미지를 깬다는 점에서 이번 역을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많은 분들이 배종옥 씨와 저의 역할이 바뀐 게 아니냐고 묻는데,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극의 또 다른 재미를 찾으려는 게 김수현 선생님의 의도였던 것 같아요.”

스스로도 만족한 역할이지만 무엇보다 김수현 작가가 극본을 써서 더욱 작품 출연에 욕심이 났다고 한다. <완전한 사랑>, <부모님 전상서> 등 수많은 작품에서 연기자와 작가로 인연을 맺어 온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다. 최근 종영한 SBS드라마 <눈꽃> 이후 긴 휴식을 계획하고 있던 김희애가 선뜻 새 작품 <내 남자의 여자> 의 출연을 동의한 것은 전적으로‘김수현 작가에 대한 믿음’때문이었다.

“김수현 선생님은 인물의 심리 묘사에 정말 탁월한 분이세요. 캐릭터마다 존재감이 강하죠. 이번 드라마도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많이 다를 거에요. 자극적인 불륜만 늘어놓기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에 더 중점을 둘 테니까요. 그 부분에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해 주실 거라 믿어요.”

김희애는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면 시청률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40대의 나이에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한 것은 자칫 ‘모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우라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많은 기대를 갖게 마련이죠. 이번에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그저 아무 생각 안하고 열심히 촬영에 전념할 뿐입니다.”

톱스타로서 뒤늦게 기꺼이 파격과 모험의 험난한 길을 선택한 김희애. ‘내 남자의 여자’에서 ‘모든 남자의 여자’로 더 원숙해진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된다.


이정흔 객원기자 lunallena99@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