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서 이루지 못할 사랑 연기로 건재 과시

꼭 14년 만이다. 1993년 영화 <서편제>의 ‘송화’로 절절한 소리를 풀어냈던 배우 오정해(36)가 <천년학>(감독 임권택. 제작 KINO2)의 ‘송화’로 절절한 사랑을 다시 한번 풀어낸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천년학>의 개봉 첫날인 지난 12일. 1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뛰어 넘어 돌아온 한 많은 소리꾼‘송화’오정해는 여전히 그때처럼 달떴다.

“어젯밤엔 한숨도 못 잘 정도로 잔뜩 긴장했어요. <천년학>은 제가 워낙 애착을 갖고 촬영한 영화거든요. 그런 작품이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흥행은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웃음)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죠. 그렇다고 그 긴장감이 싫지는 않아요. 배우로서 정말 좋은 작품에 출연했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조마조마한 마음보다는 설렘이 더 크거든요.”

그의 목소리에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이 잔뜩 묻어난다. 영화 <천년학>은 눈먼 소리꾼 송화와 그의 이복 동생 동호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남매로 함께 자란 그들이기에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긴 채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무덤덤하지만, 무언의 소리를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깊이 숨겨놓은 서로의 사랑의 울림은 크다. 그는 그래서 ‘하늘과 땅 같은 사랑 이야기’라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천년학>이 예전의 <서편제>와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천년학>은 <서편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요. <서편제>는 소리가 주인공인 영화였다면 <천년학>은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러니 <천년학>의 송화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어요. <서편제>의 송화와 동일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죠. 그런 미묘한 차이를 표현해내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

굳이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같은 인물을 두 번 연기하기가 배우로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도전이었을 법하다. 더욱이 그에게는 96년 영화 <축제>이후 10년 만에 첫 출연이라는 점에서 그 부담감이 꽤나 컸을 것 같다. 오정해 역시 그 부담감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

“여배우로서 14년 전에 연기했던 작품을 다시 연기한다는 데 부담이 굉장히 컸어요. 제 얼굴에 늘어난 주름도 문제였고요(웃음). 처음 <서편제>에서 송화를 연기했던 게 20세 때였거든요. 그동안 저는 나이도 먹고, 애 엄마도 되고 정말 많은 것이 변했잖아요. 그런 제가 14년 전에 연기했던 송화를 다시 불러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죠. ”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이 같은 걱정은 자연스레 사그러들었다. 의상을 입고 연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그는 배우 오정해가 아닌 극중 인물송화가 되어 있곤 했다. 어린 시절의 송화를 연기할 땐 그 자신이 다시 열여덟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낀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걱정했던 것보다 연기를 시작하고 나니 훨씬 편해졌어요. 오히려 예전보다 안정감이 더해져서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14년 전엔 저 자신도 소리에만 몰두해 있었죠. <서편제>의 송화나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의 저는 가정을 갖고 사랑의 감정도 아니까 <천년학>의 송화에 더욱 가까운 것 같아요. 아마 예전에 <천년학>의 송화를 연기하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잘 해내지 못했을 거에요. ”

오정해는 <천년학>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촬영에 매달렸다. 1년 내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촬영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을 정도. 현장 스태프들과 한식구처럼 느껴야 더욱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정해는 진짜 ‘식구’들과는 대부분의 시간을 헤어져 지내며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거의 1년 동안을 영화 촬영으로 지방에서 여행하며 보내다시피 했어요. 다행히 가족들도 잘 이해해 줬어요. 남편은 물론이고 아들에게 제일 고맙죠. 이제 겨우 11세밖에 안 된 아들이 오히려 제가 마음 편히 촬영하고 올 수 있도록 저를 안심시켜줘요. 그 덕분에 1년 동안 ‘애 엄마’라는 걸 완전히 잊고 일탈을 마음껏(?) 즐겼죠.”

아들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이 영락없는 ‘애 엄마’다. 하지만 오정해는 이내 프로 근성 강한 배우로 돌아온다.“배우는 현장에 있을수록 인물에 몰입하기가 쉬워져요.

그래서 촬영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어울린 거죠. 그렇게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사소한 충돌 한 번 없었을 만큼 스태프나 연기자분들 모두 정말 좋았어요. 가족도, 함께 일하는 분들도 저에게 이렇게 잘해주기만 하니 저는 정말 인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물론 그 ‘인복’에는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도 포함된다. 오정해와 임 감독의 각별한 인연은 이미 유명한 사실. 오정해는 93년 <서편제>를 시작으로 <태백산맥>, <축제> 그리고 이번 <천년학>까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모두 임 감독의 작품이다. 임 감독의 입장에서도 오정해는 네 편이나 되는 영화를 함께 찍은 유일한 여배우가 되는 셈이다.

“감독님은 항상 제 옆에 계셨고, 저도 누구보다 편해서 그동안 제가 감독님이 어떤 분인지 잊고 살았던 거 같아요. 얼마 전 감독님의 헌정시사회에 참석했는데 그제서야 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달았죠.‘아, 내가 이런 거장을 바로 옆에 두고 있었구나. 이렇게 귀한 분이 아무것도 아닌 내 옆에 계셨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는 오정해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사람은 다름아닌 <천년학> 관객들. “영화를 보러 와주시는 관객만큼 고마운 분들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출연한 영화지만 <천년학>은 우리의 아름다운 소리, 영상과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정말 좋은 영화거든요. 볼수록 매력적인 영화니까 많이 찾아와 주세요.”

우여곡절 끝에 이제 날개를 활짝 편 <천년학>이 푸른 봄 하늘을 얼마나 높이 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정흔 객원기자 lunallena99@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