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손잡고 퍼포먼스 펼쳐

지난 2월 5일 서울 인사동의 서호갤러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낸시 랭, 플래트론을 만나다>전을 열던 때 팝 아티스트 낸시 랭(29)이 홀연히 사라졌다.

북적거리던 전시회장은 한 순간 싸늘해졌다. 조금 뒤 인터넷을 통해 낸시 랭이 납치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이 공개되고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인터넷에서는 ‘낸시랭 실종’이 검색어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낸시 랭이 준비한 또 한번의 ‘발칙한’ 퍼포먼스였다.

초대받지 않은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란제리 차림에 바이올린을 켜고 비키니를 입은 채 자신의 온몸을 드러내며 ‘예술’을 하던 당돌한 낸시 랭. 그가 현대 미술계와 쇼 비즈니스계에 불러 일으키고 있는 바람이 제법 거세다. 예술가의 상업 활동을 금기시하는 미술계의 해묵은 관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기업과 손잡고 예술 활동을 펼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낸시 랭은 최근 LG전자와 손잡고 <플래트론 와이드 게임> 퍼포먼스를 벌였다. 낸시 랭이 납치됐다는 설정으로 인터넷이나 LG매장에 단서를 숨겨 놓으면, 참가자들이 그 단서를 찾아내 범인을 추리해가는 게임.

낸시랭은 게임이 진행되는 60일 동안 실제로도 납치된 듯 완벽하게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낸시 랭의 퍼포먼스 직후 LG전자의 와이드모니터 판매량은 2배 이상 증가했다. 22인치 제품의 경우 판매량이 10배 정도 늘어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같은 성과가 반가운 건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낸시 랭 역시 마찬가지. 낸시 랭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흥미로운 도전이었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사람들에게 꿈과 판타지를 주기 위해 예술을 한다”는 낸시 랭은 “환상과 실제를 넘나드는 진행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퍼포먼스라는 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 4월 13일 <플래트론 와이드 게임> 우수 참가자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퍼포먼스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퍼포먼스를 시작했던 두 달 전만 해도‘실종’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로 인한 비판 여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낸시 랭 역시 “당시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자살’, ‘실종’ 같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그만큼 새롭고 파격적인 시도였기 때문이 아니겠냐”며 “팝 아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흥미를 자극하는 해프닝을 통해 반향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실험이었다”고 자신있게 답한다.

낸시 랭의 당돌한 도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중·일의 젊은 예술가들이 뭉친 'ARTLAN@ASIA'전시회가 20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시작된 것. 낸시 랭이 준비한 작품은 이번에도 역시나 파격적이다. 낸시 랭은 “자본과 가장 가까운 대중음악을 통해 팝 아트를 표현하는 음반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기존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다”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낸시 랭은 또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과 예술을 가깝게 묶을 수 있다는 게 팝 아트의 매력”이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품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꿈을 실현해 나가겠다”는 밝혔다.


이정흔 객원기자 lunallena99@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