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수 끝에 성공한 '안나푸르나' 잊을 수 없어… 지금 살아있는 것도 기적

“이미 다 지난 일인데요. 변함없습니다. 전 그냥 대자연을 경외하고 무위를 지향하는 산악인으로 남겠습니다”

엄 대장은 이명박 대선 후보 지지설과 관련한 질문에 기분이 상한 듯 더 이상의 말을 피했고, 영원한 산악인으로 남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2007년 5월 31일 해발 8,400m 히말라야 ‘로체샤르’ 정상에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꽂혔다. 그 영광의 주역이 바로 대한민국의 산악인 엄홍길(47)대장이다. 88년 ‘에베레스트(8,850m)’를 시작으로 마지막 ‘로체샤르’까지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완등한 순간이다.

히말라야 원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엄 대장은 ‘이명박 후보 선대위 문화예술지원단 상임고문’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으로 또 한번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당시 그는 원정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특정 후보 지지 상황이 연출된 것 같다며 곧바로 지지 의사를 철회했다. 엄홍길 대장은 여전히 이와 관련 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전생이 있다면 저는 아마 ‘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는 엄홍길 대장. 히말라야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지난 22년을 걸어온 엄 대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올 12월 중순경에는 또 다시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5,140m)’ 등반을 준비 하고 있다. 지난 10일 주말 청계산 등산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채비를 마친 엄홍길 대장을 만나봤다.

# 산자락 생활을 원망했던 소년, 산과 사랑에 빠지다

“태어나면서부터 산과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됐어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3살이 되던 해 서울 도봉산자락으로 이사를 온 엄홍길 대장은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 때 바위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산과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전깃불 마저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산 속 환경때문에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어요. 왜 편하게 도시에서 살지 않고 산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엄 대장은 산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됐고 주말마다 산을 찾는 산악인들과 만남도 잦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산에 흥미를 갖게 됐다.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산으로 간다”는 엄홍길 대장은 자신에게 있어서 산을 오른다는 것은 곧 운명이자 삶이라고 말했다.

“저는 어떻게든 산으로 가요. 산은 정신을 정화시켜주고, 마음 속 혼란을 깨끗이 없애 안정을 찾게 해주는 곳이죠”

# 엄홍길의 희망과 목표를 향한 도전정신

“85년부터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국내에 있는 산들을 다녔는데 알면 알수록 어떤 도전정신 같은 게 생겼어요”

국내 산행에서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엄 대장은 해외의 높은 산, 어렵고 험한 산을 목표로 등정에 올랐다.

“첫 번째 도전한 ‘에베레스트’에서 저는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미약함과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꼈어요”

그는 85년 첫 등정에서 고배를 마시고 이듬해 역시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를 한다. 이 때 처음으로 현지 셸파 동료를 잃었고, 충격은 받은 엄 대장은 산과의 단절을 결심했지만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결국 세 번째 도전에서 비로소 성공을 하고 에베레스트를 내려왔다.

“‘목표를 향해 죽을 각오를 하면 되는 거구나!’를 느꼈어요. 아마 제가 쉽게 성공했다면 좌절이나 실패, 또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겁니다. 최악의 시련을 겪고 이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거죠. 실패 속에서 피어나는 의욕과 열정이 곧 제 삶의 원동력이자 힘입니다”

# 38번의 도전 그리고 16좌 완등, 실패는 있어도 포기란 없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또 가장 힘들었던 산은 99년도에 오른 ‘안나푸르나(8,091m)’예요. 다섯 차례 도전 끝에 성공했죠. 그 과정에서 동료 3명을 잃었고, 저 역시 발목이 돌아가는 부상으로 여러 번 수술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어요”

엄 대장은 가장 고생했기 때문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산에 오를 때면 항상 2004년 사고로 숨진 휴먼 원정대 박무택 대원을 생각한다.

박무택 대원과 엄 대장은 2000년 ‘캉첸중가(8,586m)’를 첫 인연으로 14좌를 완등할 동안 네 번을 함께 했다. ‘얄룽캉’에 도전할 당시 2004년 박 대원도 다른 팀과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고, 준비와 이동을 같이 하다가 마지막 목적지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결국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고 박 대원의 시신이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그냥 노출돼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엄 대장은 전무후무한 시신 수습을 감행했다.

“박 대원 시신이 있던 길목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또 험준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길이었어요.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고 숨쉬기 조차 힘든 상황에서 다들 구조할 엄두를 못 내 불가능하다고 만류했지만 저는 시신을 수습하고 안장을 했습니다.

그 때 당시 엄청난 눈보라가 불고 저는 극심한 허리부상에 혀까지 말려들어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르겠어요. 안장을 하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그 매섭던 눈보라가 싹 그치더니 봄 날씨 같은 무풍 상태로 변하더군요. 박 대원이 ‘그제서야 한을 풀고 편히 가는 구나’ 싶었습니다”

어느새 엄홍길 대장의 눈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14좌를 성공하기까지 그는 28번의 도전을 했고, 38번의 도전 끝에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했다. 수 많은 실패와 동료의 죽음, 이런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에 대한 애정과 하나됨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 이제 남은 목표는 '인생의 산'

“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산이 저를 받아줬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거죠. 이제부터는 8,000m이상 고산 등반은 자제할 예정입니다. 산을 아예 떠날 수는 없어요”

엄홍길 대장은 올해가 가기 전에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5,140m)’에 오를 계획이다. 국내외 낮은 산들을 등반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쉽게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존재가치까지 비관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인간의 생명은 자연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청소년들이 겪는 정신적인 문제나 학교폭력, 자살 등은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죠”

편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다 보니 결국 인간 본연의 성질을 잃게 됐고, 삭막한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 문제는 인간 모두의 문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엄 대장은 강조했다.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면서 동료애나 희생정신, 공동체 정신, 역지사지 같은 바른 사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 자연 학교나 탐험,모험 학교 같은 시설을 설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엄홍길 대장은 등정 중에 사망한 동료들의 자녀와 남은 가족들을 위해 또, 국내와 현지 모두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산악인들을 위해 지원을 더욱 늘려나갈 예정이다.

“히말라야 문화재단을 창설해서 기금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제 남은 목표는 다름아닌 바로 제 ‘인생의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산에서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는 엄 대장은 앞으로도 산과 혼연일체를 이룬 삶을 살겠다고 이야기했다.

● 엄홍길은 누구인가

히말라야에는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다. 그리고 위성봉과 독립봉 사이에서 여전히 분분한 의견이 오가고 있는 ‘로체샤르’와 ‘얄룽캉(8,505m)’까지 포함하면 총 16좌.

엄홍길 대장은 지난 2000년 세계에서 8번째로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에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4년 뒤 ‘얄룽캉’과 최근 ‘로체샤르’까지 마지막 2좌 등정에도 성공하면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 산악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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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